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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연습
조정래 지음 / 실천문학사 / 200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내 문학에서 분단문제를 마무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번 소설을 지었다.”
조정래 선생께서 <인간연습>을 내어놓으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4년 만에 출판되었다는 선생의 소설은, 30년의 옥고를 치루고 출옥한 한 비전향 장기수의 말년을 다루고 있습니다. 선생이 전향을 했다는 자극적인 보도기사도, 사회주의 몰락 이후의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모색한다는 거창한 소개글도 그리 마땅치가 않습니다.
소설은 사회주의의 몰락을 배경으로 시작합니다.
30년의 옥고를 마치고 출옥한 두 노인은 소련의 해체 소식에 “이거 우리 헛산 것 아니오?” 라며 허탈해합니다. 오랜 친구의 고발과 체포, 사상전향을 목적으로 한 경찰 검찰 교도관의 폭력, 연좌제로 인한 가족들의 고통과 외면, 몸과 마음의 병환을 이기지 못한 전향의 아픔으로, 이미 반쯤 무너져있는 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소련의 해체는, 그들이 그동안 겪어온 고통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무엇이었죠. 그것은 살아가기 위해 감내해야 할 고통이 아니라, 살아갈 이유의 상실이었으니까요.
같은 무게의 고통 속에서, 한 사람은 죽었고, 한 사람은 죽지 못해 살아갑니다. 그리고 소설은 박동건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윤혁의 뒤를 쫓기 시작합니다. <태백산맥>과 <한강>이 분단 현실에서의 고통을 짚어왔다면, <인간연습>은 고통 이후를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박동건의 죽음이든 윤혁의 삶이든, 고통 이후를 말합니다.
윤혁을 보호감찰하는 형사와의 대면에서, 우리는 소설이 쫓아온 윤혁의 삶을 찾을 수 없습니다. 윽박지르고 비꼬는 형사에게, 윤혁은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할 뿐입니다. 소설은 다시 그를, 어떻게든 살고있는 윤혁의 삶의 자취를 쫓습니다. 그리고, 이제 등장하는 두 사람과의 관계는 윤혁이 살아가는 이유, 즉 선생이 말하고자하는 사상 이후 삶의 방식을 의미합니다.
기준과 경희. 부모를 잃은 이 아이들은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훔치다 윤혁의 도움을 받으며 인연을 맺게 됩니다. 이들은 몇일에 한번씩 윤혁 할아버지를 찾아와 함께 식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며 손주 노릇을 톡톡히 합니다.
강민규. 노동운동을 하다 투옥되면서 윤혁을 만나게 된 그는, 간간히 일거리를 구해오거나, 보호관찰중인 윤혁이 접하기 힘든 사회의 소식을 전해줍니다. 그가 자연스레 전하는 소련의 해체와 관련한 토론회 내용 - 공산당의 일당독재, 이기적인 인간 본성에의 어긋남, ‘무오류’라는 당의 독선 - 이나 시민단체의 활동 - 진보와 보수의 균형 - 이, 사상 이후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윤혁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죠.
소설은 결국, 기준과 경희, 강민규와의 관계 속에서 윤혁이 새로이 선택하는 삶을 통해서 보여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결국, 한 보육원에서 기준과 경희를 비롯한 아이들을 돌보는 삶을 선택하죠. 강민규를 통해서 ‘모색’되었던 사회주의 몰락 이후의 삶의 방식은 대화와 독백에서 더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보육원에 자리잡은 이후 윤혁을 찾아온 강민규에게,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죠. “나 자네 보고 싶은 적 한 번도 없었어.”
저는 이것이 선생이 말하는 ‘분단문제의 마무리’인 것 같습니다. <태백산맥>에서도, <한강>에서도, 그리고 <인간연습>에서도, 선생께서는 삶을 모습을 통해서 시대의 아픔을 비출 뿐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