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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혁명가 안또니오 그람쉬.
그는 1919년 이탈리아 공장평의회 운동을 이끌었고,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당했다. 1922년 무솔리니가 집권하자 파시즘에 맞서 싸웠고, 1927년에 체포되어 10여년간 옥고를 치루며 이탈리아의 정치 경제에 관한 다수의 저작을 남겨 <옥중수고>로 출판되었다. 헤게모니, 시민사회, 진지전, 등 한번즈음 들어봤을 법한 익숙한 개념들이 여기에서 등장한다.
혁명가들의 평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는 혁명가들의 생애를 통해서, 그(녀)가 살았던 시대와 시대의 정신을 옅볼 수 있다. 무엇으로부터 고통받았고, 어떤 갈등을 겪었는지,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떻게 실천하는지를 볼 수 있다.
시중에 유행하는 <체 게바라 평전>과 같이, 혁명가들의 삶으로 부터 도덕적인 교훈을 얻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자신의 시대에 온몸 부딪혀 살아간 그(녀)들의 삶이야 말로, 그 시대를 가장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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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또니오 그람쉬의 삶이 어디에 놓여져 있는지 부터 살피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1891년 출생. 그는 이제 막 통일된 이탈리아에서 태어났고, 이탈리아 자본주의는 가장 활발하게 축적운동을 하고 있었다.
자본주의를 봉건시대와 구분하는 하나의 특징이, '대규모적이고 급속한 생산' 이라는 데에는 이견(異見)이 없을 듯 한데, 대규모적인 생산을 위해서는 대규모적인 생산수단이 필요한 것은 당연지사.
오로지 규모만이 경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초기 자본주의 사회는, '어떤 방식으로든' 거대한 투자용 자본을 마련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고, 이 과정에서 사회적 합의는 배제되는 것이다.
사회적 합의에서 배제된 것은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기도 했지만, 봉건시대의 생산활동에 머물러 있던 농촌이기도 했다. 안또니오 그람쉬는, 이탈리아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배제되고, 소외되어 있던 남부 농업지역에서 태어난다. 그는 어린 시절, 부제루 광산노동자들의 파업과 농민계층의 무정부적인 소요를 경험하며 자란다.
흥미로운 것은, 유년기 자본주의를 배경으로 태어난 그람쉬가 경험했던 저항의 주된 두가지 형태, 즉 농민계층의 무정부적 소요와 노동자들의 파업은, 그가 태어난 지 100여년을 훌쩍 넘어선 오늘 날에도 변함없는 저항의 형태라는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한미FTA' 라는 자본주의의 시장통합에 맞서, 노동자들은 파업을 농민들은 좀 더 거칠고 무정형적인 투쟁을 벌이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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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람쉬는 농업지역인 남부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지만, 공업지역인 북부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유학생활을 하게되었고, 그가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한 것도 바로 토리노 대학에서였다. 그가 대학에 입학한 것은 1911년, 유럽의 각국 자본주의가 한참 1차 세계대전에 시동을 걸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그람쉬는 <인민의 외침>이라는 잡지에 전쟁참여에 관한 글을 기고하면서 공식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하며, 곧 이탈리아 사회당에도 가입하게 된다.
우리가 익히 알고있듯이, 당시 유럽의 사회당 내지 사회민주당이란, 막연하게 '사회주의' 를 지향할 뿐 구체적인 실천방법에 있어서는 서로 달랐으며, '제2인터내셔널' 이라는 각국 정당의 연합체 역시도 다소 느슨한 형태였다. 따라서, 이러한 각국 정당들은 세계대전이라는 시험대 위에서 제각각 분열하면서,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정치적 입장의 차이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탈리아 사회당은 1915년 이탈리아의 참전을 막아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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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람쉬는 1918년부터 대학에서 사귄 따스까, 똘리아띠, 떼라치니와 함께 전국신문 <신질서>를 발행한다. 당시 이탈리아 노동자들은 곳곳에서 사회적 불만을 표출하고 있었으나, 사회당과 노동총동맹은 이러한 불만을 조직적 체계와 전망을 갖춘 사회적 운동으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었고, <신질서>는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의 소식을 이탈리아 내에 지속적으로 소개하고, 소비에트, 현장위원운동에 대한 연구자료를 소개하는, 등 노동자들의 불만에 호응하면서 명성을 얻게된다.
이러한 호응을 바탕으로, 그람쉬는 러시아의 소비에트에서 영감을 얻은 공장평의회 운동을 조직하기 시작한다. 노동조합과 달리, 생산활동의 기본 단위인 공장 내의 모든 구성원이 참여할 수 있는 공장평의회가 피아트 자동차를 비롯해서 사빌리아노, 란치아사, 등지에서 구성되나 사회당과 노동총동맹이 이를 방관하면서, 발전하지 못한다.
덧붙이자면, 평전인 <안또니오 그람쉬>에서 실제 공장평의회 운동이 어떤 범위와 양상으로 일어났는지를 살피는 것은 한계가 분명하다. 또한, 공장평의회 운동이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 역시 분명하다. 하지만,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유럽 전체를 뒤흔든 전쟁의 시대, 러시아 10월 혁명으로 시작된 혁명의 시대에 이탈리아의 정치운동가들이 노동자들의 대중적인 열망을 받아안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그람쉬의 글 「사회당의 혁신을 위하여」에 나타나 있다.)
제몫을 다하지 못한 정치세력의 분화는 필연적이다. 시기적으로 공장평의회 운동 이후에 나타난 사회당의 분열, 즉 개량주의 그룹, 최대강령 그룹(세라띠), 공산주의 그룹(보르디가, 그람쉬)으로의 분열이 이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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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그룹 내에서도 보르디가와 그람쉬는 대립하고 있었다. 보르디가는 그람쉬의 공장평의회 운동에 대해서도 '생디칼리즘'이라 격하했고, 개량주의 그룹과 결별하지 않는 사회당에서 분리 독립할 것을 주장했다. 그람쉬는 보르디가의 분리 독립에 대해 반대하다가, 1921년에 이르러서야 사회당과 결별,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당하게 된다.
하지만, 공산당 역시도 제 몫을 다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1922년 파시스트 무솔리니가 집권한 이후에도, 공산당은 사회당과의 연합문제, 등으로 끊임없이 당 내의 갈등을 일으키며 좌충우돌하게 되고, 급기야 1925년에 불법화된다. 그람쉬는 1927년에 투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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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에 투옥된 이후의 그람쉬는 1937년 사망할 때 까지, 집필 활동과 신병 치료에 매진한다.
<옥중수고>로 출판되어 있는 그람쉬의 방대한 옥중 저작은, 이탈리아의 정치 상황에 대한 해박한 이해와 분석을 보여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람쉬는 이 책을 통해서 지식인의 역할을 강조해, 이것이 '노동계급적 지식인'이라는 개념으로 알려져 있기도 한데, 이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이탈리아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남부 농업지대와 북부 공업지대로 나뉘어 갈등을 빚어온 이탈리아의 상황에서, 그람쉬의 고향이기도 한 남부 농업지대의 농민계층은, 빈곤에 대한 원인을 북부 공업지대 전부로 돌리고자 했고, 이 속에서 부르주아계급과 노동자계급의 구분은 없었다.
따라서, 농민계층의 불만과 분노를 사고있는 공업지대 노동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농민계층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남부의 지배세력인 지식인 그룹과의 싸움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그람쉬는 <옥중수고>를 통해서, 남부 농업지대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그동안 지배계급의 이해에 봉사해 온 지식인 그룹의 실체를 밝히고 그 사상을 비판한다.
"그람쉬의 글은 논리가 수미일관해서 문장 전체를 관통하는 실이 한가닥 있고, 그 실을 좇아 외견상 관계가 없는 듯이 보이는 여러 계기가 실제로 전혀 끊기지 않고 논리에 따라 하나의 논지를 펼치는 연속된 계기들로 연결되어 있었다. 또 그람쉬의 정치적 제안은 독창성과 확실성을 겸하고 있어서, 사실로 뒷받침되지 않는 이론은 무익한 추상이며 이론의 뒷받침이 없는 행동은 쓸모없는 충동으로 끝나고 만다는 확신을 깔고 있었다." <안또니오 그람쉬> 중 233쪽
# 더 읽어야 할 책
「능동적이고 효과적인 중립」- 1차 세계대전에 대한 입장
「리용테제」- 이탈리아공산당 3차 당대회에서 발표된 문건. 봉기를 주장하는 보르디가의 소비에트 그룹에 맞서, 현재의 시기는 봉기의 시기가 아니라 파시즘에 맞선 공동전선을 구축해야 하는 시기임을 주장함. 이탈리아의 경제 사회적 조건을 분석하며, 파시즘의 성격을 규정했다. 그람쉬는 3차 당대회를 통해서 보르디가와 확실히 결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