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주의 시각에서 본 한반도
김하영 지음 / 책벌레 / 2002년 9월
평점 :
절판


저는 요즘 역사서들을 계속 뒤적이고 있습니다. 오랜 친구일 수록 서로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서로의 성장배경, 즉 개인의 역사를 알고있기 때문이겠죠.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가 발딛고 살아가는 사회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역사를 잘 알고있어야 합니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를 비트는 것은, 현실에 대한 눈을 멀게하고, 지배자들의 통치를 더욱 쉽게 하죠. 그래서, 한국의 지배자들은 반공의식 주입에 그렇게 열성적이셨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지배자들의 펜(pen)은 부러진지 이미 오래입니다. 이들의 허구적인 반공의식과 위선을 증명해줄 숱한 자료들이 이미 공개되어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부러진 펜을 부여잡고 여전히 통치를 하고있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지지합니다. 바로, 물량공세 덕분이죠. 이들이 장악한 자본력과 정부, 사법기구, 언론이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오히려, 이들의 자신감이라고 봐야겠죠. 자신들의 물량이라면 어느정도 진실이 폭로된다 하더라도 충분히 무마가 가능하다는 자신감, 자신들의 물량이라면 어느정도 민주니 권리를 보장해주어도 무리가 없다는 자신감입니다. 감출 수 없는 위선과 별개로 그들은 굉장히 영특한 존재들입니다.

물론, 우리들의 글쓰기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이를테면, 1996년 북한군이 DMZ 무력시위가 김영삼 정부의 사주를 받아 이루어진 것이라는 북풍사건. 북풍사건은 반공논리의 모순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을 하나의 사건으로 국한시켜서는 안되는 것이었죠. 북풍사건은 그동안 지배자들이 주입해온 역사 속에서는 논리적으로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끔찍하게 증오하던 북의 지배자들에게 시위를 사주하다니요.

하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북풍사건 이후에도 반공논리는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저들의 압도적 물리력 외에도, 우리 스스로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한 노력이 부족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언론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지배자들의 모순이란 모순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실제, 김대중은 총풍사건을 정쟁에 이용했고, 논리적으로 보더라도 이미 저들과 한통속인 언론이 폭로하는 지배계급의 모순이란 애초부터 한계가 분명한 것이죠.

따라서, 북풍사건과 같은 명백한 지배자들의 모순을 하나의 사건으로 국한시키지 말고, 완결된 전체의 그림을 보기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북풍사건에 분노하는 것을 넘어서, 왜 북풍사건이 일어났느냐를 추론할 수 있어야 하죠.

이것이 우리가 북한과 한국, 그 이전의 조선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물론, 이것은 조선을 둘러싼 열강들, 미국, 러시아, 일본, 중국, 등을 포함해 폭넓게 해야하겠죠.
북한은 주사파들이 얘기하는 꿈의 사회주의국가는 물론 아닐 뿐더러, 멍청한 우익들이 얘기하듯 사회주의의 몰락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며, 한국의 지배자들과 극단적인 대치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들은 마치 함께 훔친 장물의 배분을 놓고 싸우는 도적들과 같죠.

그런 점에서 김하영씨가 쓴 <국제주의 시각에서 본 한반도>를 추천합니다.
1장 ‘미국과 한반도 위기‘ 에서는 미국이 한반도에 가지고 있는 실질적인 이해관계에 대해서,
2장 ’김대중의 햇볕 정책‘ 에서는 단순히 평화통일 방안으로 인식되고 있는 햇볕 정책의 실체를 구체적인 사례와 모순을 통해 밝히고 있고,
3장 ’싸우는 형제 - 북한과 남한‘ 에서는 반공논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남북한 지배자들의 커넥션(connection)을 해방 이후 계속 있어온 북풍사건의 전모를 통해서 밝히고 있으며,
4장 ’황장엽 망명과 주체사상‘ 은 황장엽이라는 북한 거물의 입국이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한국의 지배자들이 이것을 어떻게 왜곡하고 이용해왔는지를,
5장 ’북한 사회의 본질‘ 에서는 김일성에 대한 주사파들의 환상과 우익들의 비방 모두를 비판하며 해방 이후 정부수립 과정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고, 동시에 국가 건설 과정 및 이후 사회체제를 분석하며 이 국가가 사회주의와는 전혀 상관없을 뿐 아니라, 반대로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인 운동과 생존권적인 권리를 철저하게 짓밟아왔음을 밝힙니다. 이 속에서 사회주의의 정수를 옅볼 수 있죠.
마지막 6장 ’남한 좌파와 대안‘ 은 이러한 분석을 토대로 그간 있어왔던 對북한 관련 사안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해햐 하는지 언급하고 있습니다.

덧붙여, 김하영씨는 ‘다함께‘라는 운동단체의 주필진이기도 합니다. 저는 그녀의 주장 일부, 특히 6장에 서술된 실천적인 태도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견이 있지만, 나머지 부분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이견에 대해서 짧게 설명하자면, 그녀를 비롯한 ‘다함께‘는 운동의 대중성을 중요시하고, 이들은 가장 많은 대중을 결집시킬 수 있는 운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죠. 하지만, 저는 이들이 조금더 자기 정체성을 뚜렷하게 하는 활동이 좀 더 우선순위에 놓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함께가 대학이나 강연, 거리캠페인의 방식을 뛰어넘어서, 좀 더 노동자운동 속에 뿌리내리길 바랍니다.
물론, 운동에 있어서 대중성은 중요한 가치이고, 대중성과 정체성은 대립하는 가치가 아니지만, 진정한 대중성은 정체성의 확립과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니까요.

펜의 힘은 결코 궁극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합니다, 펜의 힘은 저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실제적인 힘 (소수의 테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을 구축하는 운동에 종속되어야겠죠.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이상을 흩뿌리는 것으로 자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실천의 방식도 함께 고민되어야 할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