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문으로 가는 길 - 20세기 현대 중국사의 불꽃
찰리 호어 지음, 김희정 옮김 / 책갈피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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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팡시의 <나의 중국혁명 회상>은 1950년 이후의 역사에 대해서 거의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한권을 더 읽게 되었습니다. 찰리 호어의 <천안문으로 가는 길>은 중국 근대사의 중요한 사건들을 빠지지 않고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회주의 역사가들이 그러하듯, 호어는 사건을 나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된 주객관적인 조건들을 서술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모든 사회문제는 경제체제의 강한 영향을 받는다는 마르크스주의에 비추어, 경제 사회문제에 좀 더 집중해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중국공산당을 지도했던 마오쩌둥은 어떤 인물이었는지, 1949년 중국 2차혁명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막연히 비효율적인 집산정책이라고 알려져있는 마오쩌둥의 경제정책은 어떠했는지, 중국의 시장화를 이끌었다는 덩샤오핑은 어떤 인물이었고 어떤 정책을 펼쳤는지, 1976년과 1989년의 천안문시위의 원인과 내용은 무엇이었는지, 등 주된 관심사들은 결국, ‘중국의 대대적인 개방과 개혁의 의미‘를 밝히기 위함입니다.

1차 국민당-공산당 합작을 통해서 형식적이나마 한편이라고 믿었던 국민당의 장제스가, 공산당원과 노동자들의 시위에 대해서 무차별적인 쿠데타를 저지르면서 공산당의 세력은 크게 줄어듭니다. 그리고, 그나마 남아있던 공산당원들은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광둥에서 무모한 폭동을 일으키면서 절멸하는 수준에 이르게됩니다.

한줌밖에 되지 않았던 공산당은 대부분의 도시에서 철수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는 이가 바로 마오쩌둥입니다. 중국에서 공산당이 결성된 것은 고작 6년 전이었으니, 초기 정당의 모습이 의례 그러하듯 지식인 출신들이 대부분이었을겁니다. 마오쩌둥 역시 그러했구요.
그리고, 도시에서 철수한 공산당은 국민당 정부의 대대적인 탄압을 받으며 산간지대를 근근히 돌아다녔으니, 당의 주축은 응당 농민과 지식인들 중심이었을 것이구요.
당원들의 구성정도는 응당 정당의 정책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1949년 중국혁명의 성격은 당원의 구성을 떠나 실제 과정에서도 나타나는데, 중국공산당은 일본에 맞서던 게릴라식 전투로 권력을 장악하게 됩니다. 봉건적인 소작제로 고통받던 많은 농민들이 중국공산당을 지지했을 뿐, 중국공산당은 노동자들에게 시위 자제를 요청할 정도였습니다.

당시 중국혁명을 취재했던 한 미국인 기자는,
“주목할 만한 것은 공산주의자들이 도시 노동자들에게 과도하게 높은 임금을 지불하여 환심을 사려 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사유공장에서 생산에 대한 최고 권위를 경영자에게 부여했다는 것이다.”
라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대중적인 지지를 받으며 국가기구를 장악했다는 점에서 ‘혁명‘임에 틀림없으나, 구성이나 방식 면에서 사회주의 혁명과 어떤 공통점도 없었던겁니다.

물론, 이러한 성격은 이후 공산당 정부의 정책에도 그대로 반영되는 것이기에 중요합니다.
중국공산당은 처음부터 사회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오랫동안 타국의 지배와 봉건적 소작제에 고통받았던 기존의 경제 대신, 자립적인 경제를 수립하고 싶었을 뿐이고, 생산수단의 공공소유라는 형식을 선택하게 됩니다.
하지만, 내용이 빠진 채 형식만 갖추어졌다고 해서 변화를 기대하기란 힘듭니다. 역사에는 순리, 즉 나름의 운동법칙이 있는 것이니까요.

내용이 빠진 생산수단의 공공소유란 오히려 해악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중국에서 보게됩니다.
더구나 대중의 지지를 받았을 뿐, 대중의 자발성이 단순히 지지를 보내는 것에 그쳤던 중국혁명에서, 공공소유된 생산수단에 대한 통제력을 대중들이 발휘할 수는 없었겠죠. 모조리 국가기구의 손에 쥐어졌던 셈입니다.
1958년부터 시작한 대약진, 인민공사 운동을 통해, 강제적으로 생산수단의 국가소유를 이루게 되고, 지극히 강제적인 방식으로 노동자와 농민들은 착취받게 되고, 대중의 착취를 기반으로 한 경제란 그것이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어떤 명찰을 달고있느냐에 상관없이 비효율, 곧 경제침체로 귀결되는 것이죠.

결국, 마오쩌둥은 4년 만에 정책을 철회하고 농업과 공업의 사유화를 시작하는데,
정책적 실패를 인정한 그의 입지가 약해지는 것에 따라, 반대파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문화혁명과 덩샤오핑의 등장이 여기서 시작됩니다.

찰리 호어는 마오와 덩 두 사람으로 대표되는 두 그룹을 두고 이렇게 논평합니다.
“전체 전략의 성격과 속도에 대한 논쟁이 있었지만, 이것은 명확하고 체계적으로 정립된 대립이라기 보다는, 현대화 전략 그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모순의 반영이었다. 보수파는 중국이 뛸 수 있기 전에 먼저 걷는 연습부터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덩샤오핑파는 설사 계속 뒤지는 한이 있더라도 뛰는 것만이 따라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대응했다.”

덩샤오핑의 집권을 두고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급선회했다는 평가를 내리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 무지한 평가자들은 덩샤오핑의 개방화 정책을 찬양하는데 급급한 나머지, 전혀 사회주의적이지 않았던 마오쩌둥에게 사회주의자라는 명찰을 달아준 셈입니다.

여튼, 덩샤오핑의 경제정책은 마오쩌둥의 그것에 ‘전면적’ 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야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는 바로 수출지향적 경제와 전면적 시장화를 실시했는데, 필연적으로 부작용을 안고 있었습니다.
1978년에 집권한 덩샤오핑의 경제정책은 흡사 박정희의 그것과 비슷한 셈이죠. 덩샤오핑과 박정희가 도달했던 같은 결론이란, 자본주의는 축적된 대규모의 자본을 바탕으로 하는데, 축적된 자본도 없는 상태에서 규모있는 경제발전을 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국외의 축적된 자본을 빌려와야 한다는 사실이었을겁니다.
그리고, 외자를 유치하기 위해서는 자본이 구미를 당길만한 요소, 이를테면 세금의 감면이나, 저임금 상태로의 동결, 등이 반드시 필요했을거구요.

그 이후에 중국에서 표방했던 구호가 ‘정치와 경제의 분리‘ 였습니다. 이 아이러니한 구호는, 경제분야에서는 자본주의 개방정책를 채택하지만, 정치는 여전히 사회주의를 유지한다는 것이었죠.
하지만, 그 이후에도 사유화가 지속적으로 확장되었다는 점이 시사하듯이, 애초부터 실현 불가능한 공문구에 불과했습니다. 정치와 경제는 서로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전자는 후자에 종속적이니까요.
정치체제는 해당 경제체제에 가장 합당한 형식으로 유지될 뿐입니다. 이를테면, 무역, 세금, 금융, 노동에 관한 법안들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 처럼요.
이것들은 특정 시기의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변화하기 마련입니다.

여튼, 경제는 경제대로 발전시키고 통제는 통제대로 하고싶었던 중국 지배계급들의 순진한 소망과 상관없이, 중국이 세계경제에 편입되는 그 순간부터, 중국의 정치란 중국 지배계급이 아닌 세계자본주의의 흐름 내지 대세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것이죠. 지배계급의 통제에서 벗어나는겁니다.

1978년부터 1988년 사이에 일어났던 소위 민주화에 대한 대중적인 열망과 1989년의 천안문 시위까지는 이러한 경향들은 반영한다고 생각됩니다.
외국자본을 유치하기 위해서 노동자들을 저임금의 착취 속에 가두어두어야 하고, 금융 은행업 부문이 팽창하면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점점 경제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는 관료들의 부패가 이들 시위의 원동력이었습니다. 500만에 가까운 시위대가 거리로 쏟아져나왔고 인민을 해방시킨다는 군대가 2,000여명 이상의 인민들을 학살했던 천안문 시위는, 중국의 경제위기가 극심했고 당국이 초긴축정책으로 옥죄였던 1989년에 있었구요.

중국의 정치는 앞으로도 지속적인 변화를 겪을 것이고, 다당제가 시행되면 중국공산당은 가장 보수적인 정당으로 자리매김할 것입니다.
일당독재의 중국공산당, 부르주아 의회체제에서 왼쪽 날개를 맡고있는 이탈리아 재건공산당, 프랑스 공산당을 비롯해서 각국의 숱한 노동당, 사회당, 등등
당명은 스스로의 정치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혼재되다 못해 극과극의 경향을 이루면서도 같은 당명을 가진 정당들이 있다는 것이 재밌습니다. 하긴, 군사독재 시절 정권을 장악한 쓰레기들도 당명에는 ‘민주’며 ‘자유’를 갖다 붙였지만요.

당명 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꼭 부르주아 의회체제에 국한시킬 필요도 없습니다.
누가 임명시켜주는 것도, 자임할 수 있는 것도 아닐겁니다.
진정한 노동자계급의 정당, 사회주의 정당은, 정당 역사상 단 한번, 혁명의 시기에만 대중적인 지지를 받을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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