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상 - 나의 중국혁명
왕범서 지음, 김승욱 옮김 / 새물결 / 2003년 6월
평점 :
절판


한국에서 ‘사회주의‘는 무척 먹칠되어 있어서, 그것은 ’부패한 관료‘와 ’비효율적 경제‘를 뜻하는데 사용됩니다.
이것은 사회주의를 표방했던 현실의 국가들, 즉 소련과 중국의 경험들이 미친 영향입니다. 사회주의 사상은 멀지만, 소련과 중국은 가까우니까요.
따라서, 소련과 중국의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사회주의의 복권을 위해서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사회주의는 노동자계급 스스로의 힘으로만 가능하다“라는 오랜 공식에 비추어 볼 때에도, 소련의 1917년 10월혁명과 같은 명실상부한 노동자혁명이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반세기 가까이 사회주의국가를 표방하고 있는 - 이제는 거의 억지수준으로 - 중국이기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던 중국역사에 대한 부채의식을 조금이나 덜 수 있었던 기회이기도 했구요.

최근 중국의 세계경제의 엔진으로 각광받으면서 중국 관련 서적들이 쏟아져나왔고, 그중의 일부는 중국의 역사나 사상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중국의 역사를 돌아보는데 있어 나름대로 풍족한 조건이 갖추어져 있는 셈이죠.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객관적인 역사란 존재할 수 없고, 사료를 선택하는 순간부터 역사가의 주관이 강하게 개입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누구에 의해 쓰여진 역사인지도 무척이나 중요한 사실일겁니다.

<나의 중국혁명 회상>은 중국의 트로츠키주의자였던 왕팡시(왕범서)의 회고록입니다.
그는 중국 사회주의운동의 2세대이고, 1953년에 중국공산당에 의해 트로츠키주의자들이 거의 절멸된 이후, 2002년 사망할 때 까지 오랜 망명생활을 하며 트로츠키의 저작들을 중국어로 번역하는데 애썼습니다.

그는 본래 공산당원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1차 중국혁명으로 알려진 1925년 혁명이 장제스에 의해 파괴되면서 모스크바로 일종의 도피성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가 일종의 환상을 가지고 있던 러시아의 현실과 스탈린에 맞선 트로츠키의 활동과 저작들을 보며, 트로츠키주의자가 됩니다.

1차 중국혁명의 실패는 스탈린이 장악한 코민테른의 정책과 밀접한, 아니 거의 절대적인 수준의 영향을 받았고, 트로츠키의 反스탈린 활동이란, 단순히 개인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공산당 정책에 대한 대립, 중국의 당면한 혁명정세에 대한 정책의 대립이었으니까요.

그는 중국혁명에 대해 올바르게 분석하고 있는 트로츠키의 의견에 동의하게 되고, 유학을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와 트로츠키주의 활동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세 번의 감옥살이를 거쳤고, 단 한번도 정권을 장악하지 못했던 소수파였던 왕팡시를 비롯한 중국의 트로츠키주의자들, 그의 회고는 마치 제 자신이 1920년대에 중국과 소련에 있는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그 당시 분위기를 감지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붉은 10년‘이라고도 불리우는 1930년대는 사회주의역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실패의 경험들을 전해주고 있는데, 사건 나열식으로만 접했던 당시의 역사를 경험담을 통해 생생히 전해들을 수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1949년 중국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하기 이전 50년의 중국역사는 한국역사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았습니다. 대략적이기는 하지만, 1911년에서야 봉건제 사회였던 청이 몰락하고, 1차 세계대전과 함께 본격적인 경제발달이 시작되었으며, 인접국가였던 러시아에서 1917년 10월혁명이 일어나면서 사회주의사상이 조금씩 보급되기 시작했고, 한국의 3.1 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 그 해에 5.4 운동이 일어났던 점, 일본 제국주의의 착취와 봉건적 잔재 하에서 어떤 형태로든 운동이 일어났다는 점, <태백산맥> <경성트로이카>에 등장하는 국내파 사회주의자들과 국제파 사회주의자들(스탈린의 코민테른과 연계되었던)의 갈등도 공통점입니다. 퍼즐을 맞추듯 하나의 큰 그림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1930년대 한국에도 트로츠키주의자가 있었을까요? 저로서는 알 수가 없지만, 왕팡시가 말년에 ‘중국에 좀 더 일찍 좀 더 강력한 트로츠키주의정당이 있었다면..’ 하고 회상하듯, 한국에도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있었다면..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역사에 ‘만약’이란 없겠지만.

“혁명을 준비해야 할 뿐 아니라, 나아가 혁명의 도래를 위해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일단 혁명이 앞에 닥쳐왔을 때, 우리는 여전히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고 느꼈다. 조직적으로 확실히 그랬고, 심지어 사상적으로도 어느 정도 그랬다. 대중은 발효되었지만, 과자를 만들거나 술을 담글 만한 강력한 조직과 정확한 사상을 갖춘 혁명당은 없었다. (중략) 그때 중국 트로츠키파가 수천의 기간조직을 가지고 있었다면 가장 좋았겠지만, 만약 수백 명이라도 있었다면, 능히 이 공백을 메울 수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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