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제1차 중국 혁명
- 신해혁명이 청제를 붕괴
- 1919년 베르사이유 조약에서 일본이 중국을 점령하는 것으로 결정나면서, 54운동이 촉발. 3000여명의 학생시위와 200여개 이상의 도시에서 동맹휴업
- 노동자운동은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의 영향을 받아 1922년 제1차전중국노동자대회 개최.
- 1921년 공산당이 조직되나, 코민테른의 지시로 국민당에 입당.
- 1925년 임금인상파업 도중 한 노동자가 죽는 것으로 시작해, 530운동 촉발. 16만 이상의 노동자가 거리시위. 광저우와 홍콩에서는 파업위원회를 비롯한 대중권력기구가 등장
- 1926년 국민당(공산당을 포함한) 좌파들이 국민당 우파와 각기 정부를 수립.
- 1927년 장제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상하이의 노동자들과 국민당 좌파들을 학살.
2장 권력으로 가는 길
- 장제스의 대학살에도 불구하고, 우한을 비롯해서 후베이, 후난, 장시, 등 다른 곳에서는 아직 혁명이 상승기세. (이때 트로츠키는 소비에트 수립 주장)
- 그러나 우한정부를 장악한 국민당 좌파가 머뭇거리는 사이, 군벌들의 반혁명이 시작. 공산당은 소규모화되어 전략적 도시에 대한 전쟁을 벌이다가 파편화됨. 나머지 세력조차도 1927년 광둥 코뮌 봉귀로 일소됨.
- 공산당은 당내 반대파와 단절, 당내 반대파가 합당.
- 정강산을 거점으로 도망한 공산당은 1928년 제창된 코민테른의 3기론에 따라 몇차례의 봉기를 일으키나 실패하고, 스탈린계 진소우가 권력을 장악.
- 모택동부대는 국민당 군대에 쫒겨다니다가 1934년 대장정을 시작.
- 1936년 서안사변으로 장제스가 연금당하고 2차 국-공합작이 시도됨. 항일전쟁에서 전과를 발휘한 공산당은 이후 권력에 도전할 수 있는 세력으로 탈바꿈. 이 기간동안 모택동이 장악한 공산당은 스탈린계 공산당과는 일정정도 거리가 있었음. 그러나, 홍군은 빈농과 부농을 구분하지 않는 비계급적 부대였으며, 대부분 농민과 지식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 1949년 부패한 국민당, 경제공황, 등의 호조 속에서 공산당이 집권. 국민당은 대만으로 도주.
3장 1949년 : 과연 사회주의 혁명이었나?
- 중공은 강력한 자립적 민족경제를 세우려 하였으며, 이에 반할 경우 노동자들의 투쟁을 잠재우기까지 하였다. 토지몰수, 가부장제 폐지, 식량배급제 실시, 교육의 보급, 등을 실시함
- 1953년 1차 5개년 계획에서는 대중의 빈곤을 바탕으로 압도적인 자본을 중공업과 무기생산에 집중했다.
- 이러한 계획경제가 파탄에 이르자, 주의주의자 마오쩌둥은 1958년, 대약진(식사시간 폐지, 18시간, 24시간 교대제), 인민공사(25,000명으로 이루어진 농민 협동조합), 등 3면홍기 운동으로 이를 극복하려 하였고, 극심한 노동력 착취와 강제적인 농업집산화가 이루어졌다.
- 위와 같은 정책적 실패는 1962년 다시금 농업과 공업에서의 사유화를 가져왔고, 마오쩌둥의 입지를 약하게 만들었다.
4장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정당하다" - 문화혁명
- 입지가 좁아진 마오쩌둥은 1966년, “자본주의적 길을 걷는 권력 내부의 사람들”에 대한 전국적 봉기를 호소하게 되고, 억눌려있던 학생 중심으로 홍위병이 구성되어 부르주아적, 봉건적 문화로 간주될 수 있는 것, 도서관, 절, 박물관, 모두를 무차별적으로 파괴하게된다.
- 지방 관료들도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홍위병을 구성해 내전으로 치닫게되고, 노동자들의 독자파업이 일어난다. 지방 관료들과 결탁한 군부가 혁명위원회를 수립하여 문화 혁명을 종식시킨다.
- 문화혁명 이후에는 당과 국가장치의 재건, 경제문제 해결이라는 과제를 놓고 분파싸움이 치열했으며, 마오쩌둥과 4인방를 위시한 세력과, 덩샤오핑을 위시한 현대파 세력들이 대립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마오쩌둥이 후계자로 지목한 린뱌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 당시 세력을 쥐고있던 4인방이 계속적인 포위모델을 진행하자, 불만에 찬 노동자들의 시위는 1976년 천안문 소요로 이어짐. 베이징에서만 10만이 동원되었고, 공공기관이 불타고 파괴당함. 항저우, 난징, 장저우, 쿤밍, 구이양, 안후이성, 광시성에서 같은 소요가 발생. 책임을 빌어 덩샤오핑이 실각하게 됨.
-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가 사망.
5장 '시장 사회주의' : 마오쩌둥 사후의 중국 경제
- 덩샤오핑의 경제정책은 크게 수출지향적 경제와 전면적 시장화라고 볼 수 있다. 그는 경제특구를 조성하고 홍콩자본을 비롯한 외자유치에 힘썼으며, 인민공사에 의해 조성되었던 공동경작지를 다시금 가족경작지로 되돌렸고, 소비재와 대부분의 중공업에서 전면적인 자유화조치를 실시하였다.
- 외자유치는 중국경제에 대한 중국정부의 통제력을 감소시키면서 중국경제를 세계경제에 통합시켰으며, 농업의 사유화는 인민공사에 의해 제공되었던 복지서비스를 감소시켰고, 공업의 자유화는 정부가 향진기업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는 것을 뜻했다.
- 인플레이션은 단지 물자 부족 때문 만이 아니라, 금융과 은행업 부문의 팽창, 이에 따른 신용의 확대 때문이었다.
- 전체 전략의 성격과 속도에 대한 논쟁이 있었지만, 이것은 명확하고 체계적으로 정립된 대립이라기 보다는, 현대화 전략 그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모순의 반영이었다. 보수파는 중국이 뛸 수 있기 전에 먼저 걷는 연습부터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덩샤오핑파는 설사 계속 뒤지는 한이 있더라도 뛰는 것만이 따라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대응했다.
6장 개혁을 기다림 - 1978~88년의 저항 운동
- 경제부문과 더불어 문화 출판부문에서도 대거 자유화가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상당 부분 검열이 이루어졌다. 문화 혁명 희생자 일부에 대한 복권과 농촌으로 하방당했던 일부 학생들의 도시 귀환으로 복권 요구를 비롯한 사상의 자유에 대한 열망이 끌어올랐고, 운동을 정부가 정한 한계에 가두어두려했던 덩샤오핑 정부는 1980년초 모든 비공인 신문을 금지시키고 민주벽을 폐쇄하였다.
- 민주벽 운동이 끝난 직후, 1981년 정신오염 추방운동을 비롯해 가지각각의 사회통제 도구들이 등장하기 시작해, 생활과 복장까지 통제하게 된다.
- 소수인종에 대한 공격은 티베트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티베트에서는 1987년~1989년 사이 몇차례의 소규모 시위와, 대중집회가 열렸으며 중국경찰과의 충돌이 있었다.
- 학생운동 또한 1980년대 대학규모의 확장으로부터 시작되어 열악한 생활조건과 노동조건에 대한 불만을 표현했다. 그러나, 이들의 이념은 중국 사회를 좀 더 효과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대안적인 전략에 불과했다. 실제, 이들의 핵심 논리는 민주주의 없이는 현대화 없다는 것, 즉 중국의 후진적 또는 봉건적 정치 구조가 실질적인 경제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었다.
- 변화를 요구하는 물결은, 1986년 12월에 지방인민대표자대회 선거부정에 대한 항의로 시작되었고, 이 시위가 20여개 이상의 도시와 150여개 대학으로 확산되었다. 1987년까지 계속된 시위로 지도부들이 징계처분을 받거나 서부 변경지방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7장 "우리는 여전히 늑대들에게 지배받고 있다" - 1989년의 반란
- 1989년 천안문시위는 인플레이션과 관리들의 부패 때문에 시작되었다. 1989년 초 중국은 최악의 경제 위기에 빠져있었고, 지배계급은 초긴축정책으로 이를 극복하려고 했다. 후야오방의 추모시위로 시작해 4월 20일 11개 이상의 도시에서 동조 행진과 동조 항의 시위가 벌어졌고, 4월 22일에는 천안문 시위 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15만에 이르는 시위자들이 광장으로 행진했으나 베이징 시장의 대화요청으로 5월 7일 이후 투쟁의 기운이 사그러들었다.
- 그러나 리펑 파면과 덩샤오핑 퇴진 요구를 하며 5월 13일에 시작된 단식투쟁을 기점으로 다시 운동이 사직되었고, 5월 16일에는 200만의 시위대가 광장에 운집하고 제철 제강공장의 노동자들까지 시위에 참가했다. 시위대는 무척 질서정연했고, 항저우, 광둥, 허페이, 내몽골, 원난성, 쓰촨성, 저장성, 심지어 티베트에까지 시위가 확장되었다. 그리고 5월 19일 계엄령이 선포됨과 동시에, 노동자들도 이 시위에 적극 가담하기 시작했다.
8장 혁명과 반혁명
- 노동자들은 버스, 트럭, 건설장비로 군대에 대한 바리케이트를 쳤으며, 병력 수송용 지하철 운행 중지, 제철 제강의 동맹 파업, 총파업 요구로 까지 확대되면서 500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천안문에 운집했다. 조직된 시위대는 여전히 질서정연했으며, 약탈 폭력사건은 일어나지 않았고, 심지어 이들은 바리케이트를 통해 군인들을 설득시키려 하였다. 노동자와 학생들은 서로 토론하거나, 선동가의 연설에 집중했으며, 여성차별도 사라졌다. 5월 21일 홍콩에서는 인구의 1/6이 참가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 베이징 공인자치연합이 월요일 총파업을 제기했으나, 학생들이 총파업을 저지하며 운동을 가로막기 시작한다. 이들은 국민경제의 손실을 우려했으며, 노동자들을 거리시위의 동참자 정도로 제한했다.
- 베이징에서의 시위가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운동의 방향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으며 대오는 조금씩 와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6월 3일에 수만명의 인민해방군이 투입되어 2,600명 이상의 시위대가 학살당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평화운동을 주장하며 군대와 협상하려 하였으며, 심지어 노획한 무기를 군에 돌려주기까지 하였다.
- 대학살 이후 전국에 걸쳐 항의 시위가 잇다르고, 다른 도시에서도 사상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학생지도자들은 6월 7일 시위철수를 결정한다.
- 6월 24일, 자오쯔양이 모든 지위에서 물라나고, 장쩌민이 공산당 총서기에 올랐다.
9장 다음은 무엇이?
- 농촌에서는 37만개 이상의 향진기업이 원료나 자금 결핍으로 문을 닫으면서 180만에 가까운 대규모의 잉여인력이 발생하였다. 지배계급은 계속해서 중국경제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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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야오방 [胡耀邦(호유방), 1915.11~1989.4.15]
1933년 중국공산당에 가입, 1934년 장정(長征)에 참가하였다. 1945년 항일군정대학 정치부 주임, 중앙군사위원회 총정치부 조직부장, 1949년 신민주주의청년단 중앙집행위원, 1956년 당 제8기 중앙위원을 거쳐 1957년 중국 민주주의청년단 중앙위원, 중앙 제1서기, 1964년 공산주의청년단 제9기 중앙상임위원 겸 제1서기 등으로 문화대혁명 이전까지 공산주의청년단 업무를 맡았다. 1966년 문화대혁명으로 공산주의청년단 중앙서기처가 해산되고 홍위병(紅衛兵)의 비난을 받고 실각되었다.
그 후 1973년 덩샤오핑[鄧小平]이 복권됨에 따라 다시 활약, 1975년 중국과학원 부비서장, 1976년 당 제11기 중앙위원, 당 중앙조직부장이 되었다. 1978년 제5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 그해 11월 당 제11기 3회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중전회)에서 정치국 위원으로 승격되고 1979년 당 중앙비서장 겸 선전부장, 1980년 2월 당 제11기 5회 중전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당 중앙서기처 총서기로서 당의 실권을 장악하고, 1981년 6월 당 제11기 6회 중전회에서 문화대혁명에서의 마오쩌둥[毛澤東]의 오류를 비난하고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에 선출되었다. 1982년 당 기구 개편으로 중앙서기처 총서기가 되었다.
자오쯔양 [趙紫陽(조자양), 1919.11~2005.1.17]
중학교를 중퇴하고 1932년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하고, 1938년에는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1948년 위어환[予鄂?]지구 당위원회 서기가 되었다. 1951년 광둥성[廣東省] 인민정부 토지개혁위원회 부주임으로 토지개혁을 주도하였으며, 1953년 중국공산당 화남분국 부서기에 임명되었다. 1955년 광둥성인민위원회 위원, 1956년 중국공산당 광둥성위원회 서기 겸 광둥성 군구(軍區) 제1정치위원, 1963년 광둥성위원회 제1서기 겸 당 중앙 중남국 서기가 되었다. 1967년 문화대혁명으로 비판·숙청되었다가 1971년 복권, 1973년 중국공산당 제10기 중앙위원, 1975년 쓰촨성[四川省] 당위원회 제1서기, 혁명위원회 주임, 청두[成都]부대 제1정치위원이 되어 농업진흥과 기업자주권을 확대시켜 현저한 성과를 거두었다.
1979년 당중앙정치국 위원을 거쳐 1980년 상임위원이 되었으며 제5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3차 회의에서는 국무원 총리로 선임되었다. 이어서 1981년 당중앙위원회 부주석으로 임명되었고, 1987년 총서기, 1988년 군사위원회 부주석이 되었다. 그러나 1989년 4월 베이징[北京]에서 발생한 민주화운동 때에 민주화시위에 동조하였다는 이유로 숙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