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동이 정치투쟁 혹은 군사투쟁으로까지 고조되면 문학의 소리는 곧 들을 수 없게 된다. 그 운동이 불행히도 좌절이나 실패에 부닥친다면 다양한 방식의 문학활동이 또 생겨난다. 만일 혁명이 성공한다면 문학은 적어도 한동안은 쇠약해진다.


- [1926년] 장개석에 대해서는, 내가 남쪽으로 오기 전 적어도 지부회의에서는 불만이나 비판의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 당시는 공산당이 자체적인 의혹에도 불구하고 코민테른의 지침에 따라 국민당에 입당한 시기였다.


- 이곳의 국민당은 좌파와 우파로 분열하고 있었다. 특히, 우파의 역량이 컸으면 그들은 군사적인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서산회의파는 결코 몇몇의 완고한 늙은이들이 아니었고, 장개석도 원래는 이들과 같은 길을 갔다. 당시 광주에서 세력을 떨치던 손문주의학회는 대계도를 정신적인 지주로 삼았는데, 이것은 곧 장개석의 국민당 내 전투조직이었다. 이른바 국민당 좌파는 기실 ‘외부공작’을 하는 공산당원과 장개석과 반목하는 몇몇 상층 인물들에 불과했다.

: 국공합작 이후의 국민당 내 상황을 잘 보여준다. 공산당은 국민당 내 좌파의 역할을 했다.


- 우리 청년학생들은 아무도 국민당을 신뢰하지 않았다. (중략) 그런데도, 우리 모두는 국민당에 가입되었다. 심지어 국민당원으로 행세하라는 명을 받기도 했다.


- [1927년] 이렇게 우리는 완전히 못한 사상을 고무시켰고, 간명한 목표(반제반군벌)에 대해 부담 없는 낙관적인 태도로 날로 광기를 더해가는 반동적 공포 통치 아래에서 행동 또 행동했다. 하지만, 4월에 이대조 동지가 붙잡혀 살해되고 나서야 우리의 행동 양상, 특히 해동할 때의 심리상태는 완전히 바뀌었다. (중략) 장작림은 한때 이들을 관외로 호송하여 장기간 감금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 남방 혁명군의 총사령관인 장개석이 비밀리에 연락을 취해 이들을 죽이라고 재촉하였고 마침내 장작림은 결단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중략) 북방의 공산당원을 더 경악하게 하고 불안과 곤혹감에 빠뜨렸던 것은 남방으로부터 전해오는 ‘청당’ 의 소식이었다. 우리는 사상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너무 준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혁명군의 지도자’가 노동자를 도살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 27년 장개석의 쿠데타와 공산당원들의 혼란을 묘사


- 들리는 바로는 풍옥상이 “남경과 무한의 충돌을 조정”하려 한다고 했다. (중략) 풍옥상의 혁명적인 태도는 단지 소련의 무기를 갈취하기 위한 가장일 뿐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다. 자신의 입장이 공고해지면 그는 곧바로 반동 군벌의 진면목을 드러낼 것이다. (중략) 왕정위 등은 공공연히 호남 호북 농민운동의 과격성을 비난했고 공산당원에게 무한 노동자들의 혁명행동을 제한할 것을 요구했다.

: 우한정부와 남경정부가 분리된 이후에, 장개석의 쿠데타와 더불어 우한정부 내에서도 국민당 좌파들이 반공적인 태도를 드러내고 있었다.


- 일부 사람들을 뽑아 소련으로 학습을 보내는 것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들은 바로는 이것이 모스크바의 생각이라고 했다.


- 당초 그곳에 이미 선하고 아름답기만 한 지상천국이 실현되어 있다고 순진하게 생각했던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상상은 그리 명확하지 않았고 실제의 상황과도 커다란 거리가 있었다.

: 당시 중국의 공산당원들이 가진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을 드러냄


- 소련에서 관리는 꼭 러시아인만 하는 것은 아니구나! 이곳에서는 협애한 민족의 벽이 사실상 허물어져 있었다. 우리는 책이 아닌 현실 정치 가운데서 국제주의를 보았다.


- 그의 말에 따르면 오늘 아침 반대파가 ‘반대 시위’를 했는데, 그들이 ‘레닌의 유촉을 실행할 것을 요구한다’는 표어를 들고 대열 가운데 끼어서 붉은광장을 통과할 때, 표어는 사람들에 의해 찢겨졌고 양측의 충돌이 발생했으며 어떤 사람은 트로츠키의 자동차를 향해 총을 쏘았다고 한다.

: 1927년 러시아 당내반대파의 반대시위를 묘사


- [1928년] 중국혁명은 1927년 여름과 가을 사이에 이미 확실히 실패했다. 실패의 주요 원인은 스탈린-부하린의 기회주의정책이다. 이제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새로운 정세를 인식하며서 지난간 일을 분석해 앞으로의 일을 확고히 다져야 한다. (중략)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은 말로 당시의 정세와 우리의 임무를 총괄했다. “중국은 현재 퇴조기에 처해있다. 따라서 현재는 당 안에서 철저히 이론을 연구하고 자기비판과 교육을 행할 시기이다. 이 시기에 우리는 노동운동의 각 방면에 거점을 수립, 이를 공고히 하고 농촌 지부를 건립하며 노동자, 빈농을 지도, 통일하여 각지에서 분산적인, 처음에는 방어적이고 나중에는 나서서 싸우는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또한 다가올 혁명적 사회의 내용에 관해서 그는 “앞으로 시작되는 시기가 닥치면 도시와 농촌 부르주아의 재산을 몰수하며, 아직 해결되지 않은 민주의 임무는 프롤레타리아독재로 완성될 것” 이라고 지적했다.


- 1928년 봄부터 모스크바의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떼지어 반대파로 향했던 주요 원인은, 중국과 소련의 정세에서 놀라운 속도로 반대파의 주장이 실증되었기 때문이다. (중략) 1928년에 비교적 유명한 반대파의 지도자들이 계속해서 잘못을 뉘우치고 스탈린에게 투항했지만, 일반 다원, 특히 젊은 세대의 노동자 당원들은 오히려 지하로 숨어들고 있던 반대파 조직의 주변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 소련 내 반대파의 대세


- 플리아코프가 공장에서 파업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었고 자신도 이제 대학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했다.

: 스탈린주의에 대한 반대투쟁


- 진독수와 그와 친했던 일군의 동지들이 트로츠키파로 옮겨갔던 일이 중앙 내부에 비교적 커다란 파문을 부러일으켰기 때문에 실권파인 중앙 지도자는 트로츠키파에 대해 매우 심각하고 비타협적인 입장을 취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중공의 노간부들이 가졌던 트로츠키-진독수 반대파에 대한 적의는 소련의 스탈린파가 트로츠키파에게 품었던 것과는 시종 같지 않았다. 이는 한편으로 중국의 트로츠키파가 끝내 그들에게 대항할 세력으로 발전할 수 없었기 대문이지만, 한편으로 더 중요한 이유는 노간부들의 진정한 적대자는 미프-왕명파라는 데 있었다. 왕명파는 그야말로 증국에서 스탈린의 직접적인 대리인이었다.

: 소련 외 국가에 반드시 존재했던 출신논쟁


- 나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방침을 위해 이렇게 유쾌하게 노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첫째, 공작 속에서 반대파 노선이 옳다는 것이 착착 증명되었고 둘째, 몇몇 진정한 혁명가들은 공작하면서 고민하고, 경험 속에서 6전대회 방침의 착오를 점차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으며 셋째, 이 기회에 실제적인 공작의 처리 방법을 어느정도 배웠다는 데 있다.


- 나이 든 중공 활동가들은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유학생들을 매우 깔보았다.


- [1929년] 현 정세에서 국민회의는 유일하게 정확한 구호이며, 이를 통해 궤멸된 노동자계급을 다시 뭉치게 하고 농민과 도시 중소자산계급의 투쟁을 통일함으로써 공산당을 다시 정치 무대에 내세워 새로운 혁명의 도래를 촉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중략) 국민회의 구호에 관한 견해는 그후 중국 반대파가 여러 해를 지내며서 가장 많이 논쟁해온 문제가 되었다.


- 당시 파벌 사이의 투쟁 상황을 회고하면 단지 난장판 같은 혼란이 느껴질 뿐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것도 어떤 정치사상이든지 운동의 최기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이다. 개인적 야심과 파벌 간의 편견은 진정한 혁명사상과 뒤엉켜 종종 매우 괴상한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 앞 단계에서 주로 논쟁한 것은 내 기억에 의하면 국민회의 구호 문제, 홍군 문제, 장래 혁명의 성격, 그리고 이른바 과거 혁명 실패의 교훈에 관한 것이다.


- [1930년] 1903년 9월 홍군의 두 차례에 걸친 장사 공략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 노선은 이미 파산했음이 모든 동지들 앞에 사실로 드러났다. 이에 같은 달에 소집된 6기 3중전회에서 구추백을 중심으로 한 일부 중공의 지도인물들이 들고일어나 이른바 이립삼노선 시기를 마감했다.


- [1931년] 그 힘은 바로 스탈린으로 대표되는 소련과 코민테른의 성망, 그리고 그가 지배하는 물질적인 역량, 특히 중국공산당에 지급하는 매월 수만 원의 돈이었다! 바로 이런 정신적 물질적 역량이 이립삼과 구추백으로 하여금 잘못을 뉘우치고 물러나게 하고, 주은래로 하여금 자아비판하고 손을 들어 진계와 합작하게 했으며 진소우 조무래기들을 제위에 올려놓았던 것이다. (중략)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진소우의 정변을 중국공산당의 어떤 사람들이 어떤 시기에 범한 착오로 간주해서는 결코 안 되며, 소련과 코민테른의 몰락이 세계공산당에 저지른 죄악의 영향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 1930년대초부터 전세계의 공산당에서 진소우와 같은 인물들이 집권하게 되는 계기를 설명


- 진소우는 본격적인 공격에 나섰다. 원래 가지고 있던 코민테른이라는 배경에 새롭게 얻은 당내의 권세를 덧붙여서 대단히 맹렬한 반우파 공격을 발동했다. 모든 우세는 진소우 등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러나 ‘우파’는 오히려 완강한 기세를 보이면서 굴복하려 하지 않았다.


- 그 시기에 반대파분자들이 생활 때문에 직접 번역해 낸 사회과학서적들은 중국 사회주의사상의 보급과 심화에 확실히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 흥정에 성공한 사람들은 예외 없이 당의 권력층에 친한 친구가 있어서 당에서 거금을 내어준 경우였다.


- [1934년] 국민당정부는 계속 ‘먼저 국내를 안정시키고 나중에 외적을 물리친다’는 정책을 시행했다. 그들은 일본제국주의에 양보를 거듭하면서도 전력을 강서의 공산군을 공격하는 데 집중했다. 1934년 말에 국민당은 결정적인 승리를 획득했고, 공산군은 간신히 포위를 뚫고 장정에 올랐다. 그리고 1935년 1월 귀주성 준의에서 열린 중공중앙회의에서 모택동은 진소우를 대신해 당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이것은 이른바 중국 토착 공산당의 스탈린의 직계에 대한 승리를 의미한다.  같은 해 8월 1일 중공은 모스크바의 새로운 노선에 근거해, 내전의 중지, 국민당과의 연합항일, 계급투쟁의 포기, 항일강령의 기초 등을 주장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 심지어 국민당을 인정하는 합작을 하기 위해서 계급투쟁을 포기하고, 홍군의 편제를 취소하며, 삼민주의로 개종하는 것 조차 서슴지 않았다.


- [1937년] 독소협정은 독수의 사상을 크게 바꾸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는 그에게 있어서 마지막 사상적 전변이다. 이 전변은 이미 있는 표현을 빌려 간단하게 말하자면, 볼셰비키주의에서 카우츠키주의로 물러선 것이다.


- 군사적인 기회주의에 반대한 나머지 모든 성질의 군사활동을 두려워하고 완전히 포기함으로써 자신을 항일전선 주류의 바깥에 위치시켰던 것이 적어도 지금은 커다란 잘못이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 폭넓고 진실하게 일어나는 반국민당적 대중운동을 스탈린다이 이용하게 나둬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중략) 그러나 이군중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이 이른바 민주당파들에게 가질지도 모르는 환상을 깨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환상을 깨뜨리려면, 우리는 그들과 동맹을 체결해서는 안 되며 반드시 독자적인 입장을 지켜야 했다. 구체적인 문제에서는 그들과 공동 보조를 취할 수는 있지만, 사상과 정치에서는 그들에 대해 비판을 전개해야 했다. 따라서, 나는 따로 신문을 내자는 의견을 다시 제기했다.


- 나는 본래, 적대시하는 태도를 타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 따라서 적대시하지 않고, ‘새로움과 낡음’ 또는 다른 추상적이고 낙후한 표준으로 울타리를 삼지 않으며, 자신의 주의를 정치사상으로 끌어올리고, 눈길을 더 멀리 있는 이익 위에 놓는 것이라 여겼다.


- [1939년] 이런 진독수의 태도는 당시 제4인터내셔널에 제기된 소련 문제에서 반대파와 본질적으로 일치하는 것이다.


- [1941년] 중국 트로츠키파의 분열은 1941년 태평양전쟁 뒤에 다시 발생했다.


- 장개석의 변화는 1941년 4월에 일소협정이 조인되고 일미전쟁이 더욱 임박함에 따라, 게다가 같은해 6월 독소전쟁이 발발하면서 더욱 더 분명해졌다.


- 진독수는 중국의 혁명사상사에서 적어도 플레하노프에 견줄 수 있다.


- 혁명가와 정치가는 서로 다른 품격을 가진 존재이다. 혁명적인 정치가도 있고, 혁명적이지 않은 정치가도 있다. 정치가의 품격을 겸한 혁명가가 있고 전혀 그렇지 못한 혁명가도 있다. 일반적으로 어렵고 힘든 창업 시기에 필요하고 따라서 유행하는 것은 혁명가이다. 하지만 일단 혁명이 완성되면 권력을 장악하고 전열에 나서는 것은 정치가이다. 진정으로 위대한 정치가는 필경 혁명가이지만, 위대한 혁명가 중에는 결코 정치가가 아닌 사람도 많다. 반대로 정치가의 단편적인 조건만을 갖춘 사람들은, 설령 시세를 좋아 혁명가의 대오에 휩쓸린다 해도 사태가 발전하는 가운데 대부분 실패하면 가장 먼저 변절하며 승리하면 가장 먼저 관료로 부패한다.


- [1945년] 전쟁이 바로 혁명의 어머니이다.


- 혁명을 준비해야 할 뿐 아니라, 나아가 혁명의 도래를 위해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일단 혁명이 앞에 닥쳐왔을 때, 우리는 여전히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고 느꼈다. 조직적으로 확실히 그랬고, 심지어 사상적으로도 어느 정도 그랬다. 대중은 발효되었지만, 그들을 구워 과자로 만들거나 술을 담글 만한 강력한 조직과 정확한 사상을 갖춘 혁명당은 없었다. (중략) 그때 중국 트로츠키파가 수천의 기간조직을 가지고 있었다면 가장 좋았겠지만, 만약 수백 명이라도 있었다면, 능히 이 공백을 메울 수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 국민당정권은 전쟁 속에서 빠져나온 뒤 이전보다 훨씬 부패했다. 그 상황은 본래 누구나 다 아는 것이다. 당시 국민당을 둘러싸고 있던 통치계급은 이미 투기꾼, 밀수꾼, 기생충 그리고 약탈자들의 거대한 집단으로 변모해 있었다.


- 타인의 승리를 인정하는 것은 투항이 아니며, 자신의 실패를 확인하는 것은 낙담이 아니다.


- 1946년에서 1949년까지 국공양당이 내전을 진행하던 시기에 우리는 비록 충심으로 중공측을 지지하고 그들이 승리를 쟁취하도록 힘을 다했지만, 동시에 늘 소자산계급정당이 이끄는 농민군대는 승리할 수 없으며 설령 승리한다고 해도 반드시 막다른 골목에 빠지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다.


- 동시에 혁명노선의 일관성이나 지도자가 노동자계급 및 전체노동자에 대해 취하는 태도로 본다면, 중공은 결코 러시아의 볼셰비키당과 같은 무산계급정당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중략) 이 새로운 계급을 초린은 국가자산계급이라고 칭했고, 나는 집산주의적 관료계급이라고 이름지었다. 우리의 견해에 따르면, 이러한 계급들이 출현하게 된 것은 바로 연이은 세계혁명의 실패와 자본주의 제도의 과도한 성숙의 결과였다. 따라서, 그들은 반동적이지만 강대했다.


- 그의 유일한 관심은, 분명한 모순 속에서 올바른 해결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순들 속에서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일관된 정확성을 지키려는 데 있었다.


- 한 정당의 계급성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당원 중의 노동자 성분 뿐만 아니라 그 정당을 지도하는 사람이 누구인가와 행동 및 정책의 내용이 어떤 것인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 스탈린당은 어떤 시간과 조건 속에서도 혁명을 파괴할 뿐, 그것을 성공시키거나 승리로 이끌 수 없으며 심지어 그것을 바라지도 않는다고 여겼다. 이런 선입견을 품고 중공의 승리를 대면했으니, 자연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우리는 결코 앞에서 서술한 두 측면을 헷갈려서는 안 된다. 스탈린당이 아직 자본주의를 반대할 수 있으며 어떤 특정한 조건에서 혁명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과, 그들이 어떻게 자본주의에 반대하고 어떻게 혁명을 달성하며 또 어떤 혁명과 제도를 만들어낼 것인가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후자는 전자에 비해 결코 중요성이 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국가가 더욱 많아지면서 후자가 전자보다 더 중요해진다. (중략) 그렇다면 극도로 전횡하는 관료통치하에서는 어떠한 사회제도를 건설할 수 있는가? 이전에 나는 그 아래에서 관료집산주의적인 사회를 만들어낼 수는 있지만 결코 사회주의에 도달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나 관료통치는 사회주의에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 대신 생겨나는 것이 관료집산주의 제도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국유재산 제도 위에 서 있는 관료통치는 끊임없이 전쟁과 혁며을 일으킬 수 있다고 믿는다.


- 모든 공산당 파벌과 공산국가를 어떤 시기와 상황을 막론하고 모두 한통속으로 간주하여 똑같은 태도로 공격하고 배척하게 되면, 사실 우리 스스로 고립에 빠질 것이며 객관적으로도 진짜 스탈린주의자와 관료제도를 돕는 결과가 될 것이다.


- 모택동이 스탈린의 적계에 속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결코 그 자신은 완고한 스탈린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중공은 충분히 스탈린주의화된 정당이다. (중략) 창광하는 개인숭배, 엄격한 등급특권, 특무에 의한 사상통제, 무고를 통한 반대파의 제거, 당내의 파벌 금지, 당 외의 당 금지. 이 모든 것들을, 모택동과 중공은 설사 본래보다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더라도, 결국 그대로 본떠서 실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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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표[린뱌오] : 1926년 황푸[黃埔]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27년 국공분열 후 난창[南昌]폭동에 참가하였다가 실패하고, 주더[朱德]·마오쩌둥[毛澤東]과 함께 게릴라활동을 전개하였다. 1929년 공농홍군(工農紅軍) 제4군장이 되고 1934∼1935년 장정(長征)에 참가하였다. 1936년 항일군정대학 교장, 1937년 팔로군(八路軍) 115사단장(師團長)이 되었다. 1947년 중국공산당 제7기 중앙위원, 8월 만주(滿洲)에서 소련군으로부터 일본군의 무기를 접수하고, 둥베이[東北]인민해방군을 조직하였으며, 사령원, 당중앙둥베이국 서기 등으로 만주를 장악하였다. 1949년 제4야전군 사령원, 당중앙 화중국[華中局] 서기, 10월 중국공산당 정권 수립 후 중앙인민정부 위원, 중앙인민혁명군사위원회 위원,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전국위원회 상무위원, 1950년 중난군[中南軍] 군정위원회 주석 겸 중난군구 사령원이 되었다. 1954년 국무원 부총리, 국방위원회 부주석, 1956년 당중앙정치국 위원, 1958년 당중앙위원회 부주석, 정치국 상임위원, 1959년 국무원 부총리, 국방위원회 부주석을 연임하고 국방부장이 되었다. 1959년부터 군 내부에 마오쩌둥사상 학습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65년 〈인민전쟁 승리 만세〉 논문을 발표하고, 마오쩌둥의 ‘농촌으로 도시포위’ 전략을 세계전략으로 확대하였다. 1967년 문화대혁명 속에서 마오쩌둥·장칭[江靑]과 결합, 군의 힘을 동원해 권력을 탈취하고, 1969년 중국공산당 제9기 전국대표대회에서 마오쩌둥의 후계자임을 당규약으로 명기하였다. 1971년 9월 실각하였으며, 반(反)마오쩌둥 쿠데타를 음모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가자, 가족과 함께 비행기로 탈출하여 소련으로 망명하던 중 몽골 지방에서 비행기가 추락하여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진소우[천사오위] (왕명) : 별명 왕밍[王明]. 우창[武昌] 중화(中華)대학을 거쳐 1925년 모스크바 중산(中山)대학을 졸업하였다. 1930년 귀국한 후에는 상하이[上海]에서 공산당활동에 종사하였다. 1931년 당 중앙위원, 정치국 상임위원 겸 장쑤성[江蘇省] 위원회 서기, 그해 중국공산당 총서기인 샹중파[向忠發]가 체포되자 그의 뒤를 이어 당 중앙 총서기로 선출되었다. 그 후 중국공산당 코민테른 주재대표단 수석대표로 파견,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 집행위원, 주석단위원, 서기처 후보서기가 되었다. 1942년 정풍운동(整風運動) 때 마오쩌둥[毛澤東]으로부터 신투항주의 ·교조주의로 몰려 비판을 받았다. 1956년 당 제8기 중앙위원이 되었으나, 그 해 건강악화로 모스크바에 가서 요양하면서 그 곳에 계속 머물렀다. 문화대혁명 때 비판을 받게 되자 1969년 마오쩌둥을 비난하는 글을 캐나다의 공산당 기관지에 발표하였다. 1974년 모스크바에서 병사하였다. 저서에 《왕명최근논문선》 《왕명항전언론집(王明抗戰言論集)》 등이 있다.


주은래[저우언라이] : 지주·학자의 집안에서 태어나 1913년 톈진[天津]의 난카이[南開]중학에 입학하였으며 졸업한 뒤에도 계속 공부하기 위하여 1917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등에서 청강하기도 하였다. 톈진의 난카이대학 재학 중 5·4운동에 참가하여 투옥, 퇴학당하였고 1920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였다. 1922년 중국공산당 파리지부(支部)를 창설하였고, 런던 ·베를린 ·모스크바를 거쳐 귀국하였다. 1924년 황푸[黃織]군관학교 정치부 대리에 발탁되었고, 1927년 북벌군에 호응하는 상하이[上海] 봉기를 지도하였다. 그 후 장제스[蔣介石]의 반공 쿠데타를 피하여 우한[武漢]으로 가서 노동자의 무장규찰대(武裝糾察隊)를 조직, 난창[南昌]폭동을 지도하고, 광저우[廣州] 코뮌을 조직하였다. 1931년 말 광시성[廣西省]의 소비에트구(區)에 들어가 군사부장·제1방면군 정치위원으로서 정보공작과 국민당군의 포위에 대한 전략을 지도하였다. 1936년 혁명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서 장정(長征)에 참가하였고, 시안[西安] 사건 때에는 국공(國共)내전의 정지와 항일연합전선의 결성에 힘썼다. 항일전이 발발한 후에는 우한·충칭[重慶]에서 공산당의 대표로서 국민정부의 국방위원회·군사위원회 위원 등 요직에 있으면서 국공관계의 처리를 맡아 탁월한 정치적·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1949년 4월 공산정권 수립 후 문화대혁명을 거쳐 최후까지 공산당에서 지도적 위치를 유지하면서 27년간 총리(1958년까지 외교부장 겸임)로서 국내외의 중요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였다.


유인정 : 모스크바에서 중국으로 돌아오면서 독자적으로 활동을 전개한 인물


구추백[취추바이] : 독학으로 러시아어 ·프랑스어 ·영어를 익히고, 러시아 유명작가들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을 많이 번역하였다. 1920년에는 《베이징천바오[北京晨報]》의 모스크바 주재 기자로 있었다. 1922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소련에서 개최된 극동민족대표대회 및 코민테른 제4차 세계대회에 참석하였다. 1923년 중국공산당 제3기 중앙위원 겸 선전부 부부장, 1924년 국공(國共)합작으로 중국국민당 후보 중앙집행위원, 1925년 중국공산당 제4기 중앙위원, 1926년 중국공산당 제5기 중앙위원 및 정치국 위원 등을 지냈다. 1927년 국공합작 결렬 후에는 코민테른의 지시로 중국공산당 중앙 8 ·7긴급회의를 개최하여 천두슈[陳獨秀]의 ‘우경 기회주의’를 비판하고 중국공산당 총서기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1928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좌경 모험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아 중앙총서기직을 박탈당하고 모스크바로 소환되었다. 1930년에 중국으로 돌아와 중국공산당 코민테른 주재 대표, 코민테른 집행위원 등 당 지도부에서 활동하였으나, 1931년 ‘조화주의자(調和主義者)’라는 비판을 받고 당의 핵심기구인 정치국에서 물러났다. 그 후 1935년 2월 상하이[上海]로 도주(逃走)하다 국민당의 군대에 체포되어 그 해 6월에 처형되었다. 저서에 《아향기정(餓鄕紀程)》(1921) 《적도심사(赤都心史)》(1924) 《다여적화(多餘的話)》 등이 있다.


당생지[탕성즈] : 1915년 바오딩군관학교[保定軍官學校]를 졸업한 뒤, 후난 군벌의 자오헝티[趙恒?]의 부하로서 사장(師長)까지 진급하였다. 1926년 국민혁명군으로 전향하여 제8군장 ·후난성 주석으로서 우한 정부[武漢政府]의 무력적 배경을 만들었다. 우한 ·난징[南京] 정부가 합친 뒤인 1927년의 가을 장제스[蔣介石]의 배척으로 일본에 망명하였다가 곧 귀국하여, 1929년 반장전(反蔣戰)에 실패하여 홍콩으로 도망쳤으며, 1931년 광둥[廣東] 국민정부에 참가하였다. 광둥 ·난징 정부 통합 후 군사참의원장 ·훈련총감을 거쳐, 1937년 난징 위수사령관이 되었으나 일본군에 패하였다. 그 후 군사위원회 위원을 거쳐, 1948년 총통부 전략고문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나, 1949년 8월 중공군에 항복하였다. 그 뒤 후난성 부성장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 ·중국국민당 혁명위원회 상무위원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무한정부 : 1926년 7월 국민당은 장제스[蔣介石]를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으로 하여 북벌(北伐)을 개시하였으며, 불과 수개월 만에 양쯔강[揚子江] 연안까지 진출하였다. 이때 북벌 진행상 보다 효율적인 수행을 위하여 정부 소재지를 광저우[廣州]에서 이전할 필요가 생겼다. 국민당좌파와 공산당은 난창[南昌]을 주장한 장제스에게 반대하여, 1927년 2월 우한 천도를 강행하여 혁명 주도권을 잡으려 하였다. 이러한 정세에 대항하여 장제스는 상하이[上海]에서 4월 12일 반공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을 축출하고, 4월 18일 난징[南京]에 국민정부를 수립하여 우한정부와 대립하였다. 우한정부의 국민당좌파는 국민당의 경제 압박과 외국 제국주의 세력의 압력 밑에서 동요가 심하였다. 특히, 토지개혁문제를 둘러싼 공산당과의 대립이 심각한 우한정부는 6월 소련인 고문을 해임하였다. 7월 정부 수반(首班)인 왕자오밍[汪兆銘]이 공산당과의 관계를 단절하여 반공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9월 난징·우한·시산[西山]파가 국민당 임시중앙위원회를 개최하여, 양정부의 합류 및 난징을 국민정부의 소재지로 한다는 것 등을 결정함으로써, 결국 우한정부는 소멸하였다.


국민정부 : 중국 본토에서 1925~1949년까지, 본토가 공산화된 이후에는 타이완[臺灣]에서 현재까지 국민당이 장악하고 있는 정부. 국부(國府)라고도 한다. 중국국민당 제1기 전국대표대회 결의에 따라 1925년 7월 1일 광둥[廣東]에서 조직되었다. 쑨원[孫文]의 삼민주의(三民主義)를 건국이념으로 삼고 국민혁명을 군정(軍政)·훈정(訓政)·헌정(憲政)이라는 3단계 시기를 거쳐서 성숙시키려는 방침과 함께 연소연공정책(聯蘇聯共政策)을 취하여 중국공산당과의 합작을 실현하였다. 이와 같은 국공합작 아래에서 국민혁명군을 조직하여 1926년 7월 북벌전쟁을 개시하였다. 1927년 2월 정부를 우한으로 옮겼는데, 국민당 내의 좌우 양파가 항쟁함으로써 정부는 우한[武漢]·난징[南京]의 2개 정부로 분열되었다. 1927년 4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장제스[蔣介石]에 의한 상하이[上海]쿠데타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계기로 국공합작은 와해되었다. 이 사건 후 정부는 국민당 일당독재 아래 장제스가 정치·군사상의 실제적 독재자가 되었고 우한·난징 정부도 난징으로 합체되었다. 1937년 7월 발발한 중·일전쟁 중에는 정부를 충칭[重慶]으로 옮겼고 전쟁 중에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일본이 항복한 후 정부는 다시 난징으로 돌아왔으나 국공관계는 다시 결렬되어 중국 전토는 내전상태로 들어갔다. 4년간의 내전을 통하여 국민정부군은 괴멸상태에 빠졌고 장제스는 미군의 원조로 본토를 탈출, 타이완으로 건너가서 국민정부를 재조직하여 중국 본토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였다. 한편, 중국 본토에서는 1949년 10월 1일 중공정부가 탄생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이라 하고 베이징[北京]을 수도로 정하였다. 중공정부는 타이완의 국민정부를 인정하는 국가와는 일체의 외교관계를 체결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1950년 이후 국제연합 총회 및 국제조직·기관들은 타이완·베이징 중에서 어느 쪽을 중국의 합법적 정권으로 인정하느냐 하는 문제로 논란이 거듭되었는데 1971년 국제연합 총회에서 중공이 승인되었다.


모택동[마오쩌둥] : 1911년 10월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혁명군에 입대하였다가 1912년 제대한 뒤 제1중학에 입학하였으며, 다시 제1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대학이나 외국유학을 하지 못한 그는 이 학교에서, 영국에 유학하고 돌아와 중국의 봉건사상 비판에 힘썼던 교사 양창지[楊昌濟]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재학 중인 1917년, 거의가 제1사범학교 학생들로 구성되고 후난성 혁명 지식인들의 본영이 된 신민학회(新民學會)를 조직하였다. 1918년 학교를 졸업한 뒤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후난 청년들의 외국유학을 도왔다. 그해 10월 마오쩌둥은 소년중국학회에 가입하였고, 양창지의 소개로 베이징대학 도서관 주임인 리다자오[李大釗]의 조교로 일하면서 방청하였으며 철학회와 신문학연구회(新文學硏究會)의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또 양창지에게 유물론적 철학과 윤리학 강의를 받았고 비밀학생단체들과 접촉하면서 무정부주의에 관한 책을 많이 읽어 그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로 기울게 되었다. 1919년 5·4운동 발발 후 후난학생연합회를 설립하고 《샹장평론[湘江評論]》을 펴냈으나 곧 폐쇄당하고 베이징으로 도망쳤으며, 러시아혁명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다. 1920년 상하이[上海]에서 천두슈[陳獨秀]를 만났으며 다시 창사로 돌아와 1924년까지 창사 제1사범학교의 부속소학교 교장 겸 사범부의 어문(語文) 교사가 되었다. 1922년 양창지의 딸 양룬후이[楊閏慧]와 결혼하였고, 그해 7월 상하이의 중국공산당 창립대회에 참가하였으며, 후난성 대표로서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 출석하였다. 1924년 국공합작(國共合作)이 되자 공산당 중앙위원, 국민당 제1기 후보, 중앙집행위원, 선전부장 대리, 중앙농민운동 강습소장, 정치주보 사장 등을 겸임하였다. 1926년 장제스[蔣介石]의 숙청으로 상하이에 갔다가 1927년 우한[武漢]으로 가서 중국공산당 중앙농민부장이 되었고 국공분열(國共分裂) 뒤 농홍군(農紅軍) 3,000명을 조직하여 징강산[井岡山]에 들어가 근거지로 삼고 주더[朱德]의 군대와 합류하였다. 이듬해 공농홍군(工農紅軍) 정치위원이 되었고, 1930년 홍군 제1방면군 군사위원, 중국 공농혁명위원회 주석에 올랐다. 1931년 장시성[江西省] 루이진[瑞金]의 중화 소비에트정부 중앙집행위원회 주석이 되었고, 그 인민위원회 주석으로 뽑혔다. 1934년 10월 루이진에서 산시성[陜西省] 옌안[延安]까지의 1만 2,500km에 이르는 대서천(大西遷)을 시작하였으며, 도중에 구이저우성[貴州省] 쭌이[遵義]회의에서 당 지도권을 장악하였다. 시안사건[西安事件]을 거쳐 국공합작에 성공하자 항일(抗日)민족통일전선을 수립하고, 홍군을 국민혁명 제8로군으로 개편하여 일본군에 대항하였다. 그리고 《지구전론(持久戰論)》(1938) 《신단계론(新段階論)》(1938) 《신민주주의론》(1940)을 발표하였는데, 마지막 것은 중국공산당 강령으로 채택되었다. 1945년 4월 중앙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정치보고로 연합정부론을 발표하였고, 중앙위원회 주석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인 1945년 8월 충칭[重慶]에서 장제스와 회담하여 화평건국의 제원칙에 합의하였으나 실행이 불가능하게 되자, 1946~1948년 내전을 벌여 승리하였고,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베이징에 세우고 국가주석 및 혁명군사위원회 주석으로 뽑혔다. 1949년 12월 소련을 방문하여 1950년 2월 중소우호동맹호조조약과 기타 협정을 맺었다. 1957년 반우파(反右派) 투쟁과정에서 《인민 내부의 모순을 바로잡는 문제에 대하여》를 발표하였고, 1958년 제2차 5개년계획의 개시와 더불어 ‘총노선’ ‘대약진’ ‘인민공사’ 등 이른바 3면홍기(三面紅旗)운동을 폈다. 1959년 4월 국가주석을 사임하고 죽을 때까지 당주석으로만 있었다. 1964년 4월 《마오쩌둥어록[毛澤東語錄]》을 간행시켰고, 1965년 10월 이후에는 당내에서 완전 고립되어 연금상태에 있었으나 문화대혁명을 지휘하였으며, 1960년 이후의 중소논쟁과 문화대혁명 기간을 통하여 ‘마오쩌둥사상’을 높이 내걸었다. 1968년 10월, 1959년부터 국가주석으로 있던 류샤오치[劉少奇]를 실각시켰다. 1969년 마오쩌둥-린뱌오[林彪]체제가 확립되는 듯하였으나, 1971년 9월 린뱌오는 반(反)마오쩌둥운동에 실패하여 죽었다. 1970년 헌법수정초안을 채택하여 1인체제를 확립하고 중국 최고지도자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그가 사망하기 직전인 1976년 4월 대중반란이라고도 할 천안문사건(天安門事件)이 일어나 위대한 영웅 ·독재자 마오쩌둥은 완전히 고립된 채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의 전생애를 살펴볼 때, 중국의 독립과 주권을 회복하고, 중국을 통일하여 외세에 의해 국토를 유린당한 중국민들의 굴욕감을 씻어주며, 관료제도를 견제하고 대중의 정치참여를 유지하여, 중국의 자립을 강조한 그의 목표는 칭송할 만한 것이었으나, 2가지 개혁정책인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은 잘못된 것이었다.


진독수[천두슈] :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 및 프랑스에 유학하고, 1916년 상하이[上海]에서 《신청년》 잡지를 발간, 문학혁명을 주창하여 ‘5·4운동’의 사상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1917년 베이징[北京]대학 문과대학장으로 후스[胡適]와 함께 백화문(白話文)을 제창하는 한편, 《신청년》을 통하여 유교사상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1921년 7월 코민테른(제3인터내셔널)에서 파견한 마린의 지도하에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를 개최, 중국공산당의 창당을 선포하고 중앙서기(中央書記)에 피선되었다. 1922년 당 제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국국민당과의 연합전선 수립과 코민테른 가입 등을 결의하고, 당 기관지 《향도주보(嚮導週報)》를 발간하였다. 그 해 11~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4차 코민테른대회에 참석한 후 중국국민당과 합작하라는 코민테른의 지시를 마지못해 따랐다. 1925년 중국국민당 내부에 분열이 생기자 국민당에서 집단탈당하려고 하였으나 코민테른에 의하여 거부되었고, 당 제5차 전국대표대회까지 당 중앙총서기직을 연임하였다. 1927년 국공합작이 깨지자 코민테른은 합작실패의 책임을 물어 그를 총서기직에서 축출하였다. 1929년 당적을 박탈당하자 ‘전당 동지에게 고하는 글[告全黨同志書]’을 발표, 코민테른의 중국혁명 지도상에서의 오류와 당시 당 중앙의 오류를 규탄하여 트로츠키파(派)로 지탄받았다. 1933년 상하이에서 당 조직을 획책하다가 체포 ·구금되어 1939년 출옥하였다. 만년에는 사상적인 전환을 가져와 영 ·미식 민주주의를 찬성하고 공산주의를 반대하였다. 1942년 병사하였다.


향충발[샹중파] : 5·4운동의 영향으로 노동운동에 참가하였고, 뒤에 한예핑[漢冶萍] 청(淸)나라말기 중국 최대의 제철회사의 노동조합 간부가 되었다. 1921년 중국공산당이 결성되자 이에 가입하고 주로 후베이 ·후난성[湖南省]에서 당과 노동조합 조직에 종사하였다. 1925년 소련에 유학하고 1927년 귀국 후에는 후베이성 전성(全省)노동조합 주석이 되고, 1928년 중국공산당 제6차 대회에서는 취추보[瞿秋白]의 뒤를 이어 당의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국민혁명 [國民革命] (북벌) : 1924~1928년에 걸쳐 중국국민당에 의하여 전개된 민족통일운동. 1920년대에 들어와서 쑨원[孫文]이 이끄는 중국국민당은 삼민주의(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에 반제국주의 ·반봉건군벌의 내용을 확실히 담고, 연소(聯蘇) ·용공(容共) ·노농원조(勞農援助) 등의 3대 정책을 함께 표방하여 1924년 제일차 국공합작을 성립시켰다. 이후 중국에서는 민족통일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25년 3월 쑨원이 죽은 후에도 민족통일운동은 계속 추진되어, 5월의 5 ·30운동, 12월의 동정(東征), 즉 장제스[蔣介石]의 광둥성[廣東省] 통일을 거쳐 1926년 7월 장제스를 총사령관으로 하고, 중국공산당의 적극적 지원과 협력을 얻어 북방군벌의 타도를 위한 북벌전쟁을 개시, 국민혁명군을 북진시켰다.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북벌군은 연내에 후난[湖南] ·후베이[湖北] ·푸젠[福建] ·저장[浙江] ·장시[江西] ·안후이[安徽]의 6성을 석권하고, 우페이푸[吳佩孚] ·쑨추안팡[孫傳芳] 등의 군벌을 격파하여 북방의 군벌 장쭤린[張作霖]과 대치하였다. 그러나 1926년 3월 장제스에 의하여 공산당원이었던 중산함장(中山艦長) 이지룡(李之龍)을 비롯한 국민혁명군 내의 공산당원 60여 명이 체포된 중산함사건으로 국민정부 내부의 좌우 대립은 심각한 단계에 이르렀다. 1927년 3월 상하이[上海]의 노동자들이 무장봉기하여 장제스의 북벌군을 맞아들였지만, 노동자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금융매판자본, 즉 저장재벌은 장제스에게 중국공산당과 관계를 끊을 것을 강권하고, 또한 제국주의 열강도 장제스에게 공산세력을 물리치고 혁명운동을 반대하도록 강요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27년 4월 12일 상하이 ·난징 등지에서 중국공산당 탄압을 위한 쿠데타가 일어나, 제1차 국공합작은 분열하였다. 그 후 장제스의 중국국민당이 중심이 되어 1928년 7월 북벌을 완성함으로써 중국 통일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 단계의 과업이 외부와 군벌의 제휴와 타협으로 이루어졌으므로, 국민혁명의 앞날에 많은 문제를 남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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