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미디어참세상)

여름휴가, 책 한 권 갖고 떠나자 
풀무질 은종복 씨, "좋은 세상 올 때까지 책방은 내가 지킨다" 
  
김해숙 기자  
 
고속도로 빠져나가는 차량 행렬, 해변 가득 메운 인파, 휴가중 달랑 써놓고 문닫은 상가들, 한산한 공장 라인들... 7말 8초 본격 휴가철이다. 현실은 휴가를 여유있게 누리는 사람들과 휴가를 생각하는 것조차 스트레스인 사람들로 정확히 나뉘어진다.

휴가는 여유있는 사람들이 두 번, 세 번씩 돈 걱정 없이 바다도 가고, 계곡도 가고, 해외도 나가는 그런 것이다. 그래서 휴가는 남 일이거니 싶다. 가까운 곳을 다녀올라 쳐도 여건이 안 돼 주저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탓이다. 우리 사회 구성원의 절대 다수가 실업에, 불안한 비정규직에, 만성 부채에, 장기불황에 정신없이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눈 질끈 감고 단 하루라도 가까운 곳에 가서 시원한 계곡 물에 발이라도 담글 수 있을까? 나무그늘 밑에서 낮잠이라도 한숨 자고 올 수 있을까? 그렇게라도 떠날 수 있다면 떠나자. 기왕이면 떠나는 길 배낭 안에 책 한 권 넣어 가는 것 잊지 말고.

명륜동 풀무질 서점을 들러 은종복 씨를 만났다. 책방도 사람도 한결같이 옛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수인사를 하고 올 여름휴가 때 들고 가서 볼만한 책 몇 권을 골라달라고 부탁했다.

노동자라면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전순옥,한겨레신문사),
'말해요 찬드라'(이란주,삶이보이는창),
'맨발의 겐1-10'(나카자와케이지,아름드리미디어),
'세계는 상품이 아니다'(조제보베,울력),
'너의 이름은 희망이다'(제12회전태일문학상,사회평론) 중 한 권을 권한다.

학생이라면
'아름다운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헬렌니어링,보리),
'월든'(헨리데이빗소로우,이레),
'뜻으로 본 한국역사'(함석헌,한길사),
'스콧니어링자서전'(스콧니어링,실천문학사).
'자발적 가난'(E.F.슈마허 외,그물코) 중에서,

성 문제에 관심이 있다면
'페미니스트'(제인프리드먼,이후),
'아주 작은 차이'(아리스슈바르처,이프),
'행복한 패미니즘'(벨훅스,백년글사랑) 중에서,

반전과 파병을 생각한다면
'이봐 내 나라를 돌려줘'(마이클무어,한겨레신문사),
'미국의 세계재패전략'(알렉스캘리니코스,책갈피),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노엄촘스키,한울),
'미국의 이라크 전쟁'(하워드진 외,북막스) 중에서 한 권을 챙기면 좋겠다는 제안이다.

풀무질 서점은 1985년에 생겼고, 은종복 씨는 1993년 4월부터 지금까지 11년 간 풀무질을 지켜왔다. 지금은 투병중인 박준성 선생의 주례로 1996년 결혼해서 8살 된 아들과 살고 있다. 1997년에는 이적표현물이 문제가 되어 그날이오면, 장백, 풀무질 서점 대표가 구속된 사건도 있었다. 경기도 안 좋은 데다, 사회과학 서적이 많이 읽히지도 않는다며 아쉬움을 토로한 은종복 씨는 그래도 꾸준히 찾는 사람들이 있어 풀무질을 계속 이어간다고 말했다.

작년 9월, 풀무질에서 일한 지 10년을 맞으며 쓴 글에서 낡은 책방만큼이나 오래된 이력이 자연스레 베어있다.

"지난 4월 1일은 내게 뜻있는 날이다. 그날은 내가 이곳, 풀무질에서 일한 지 꼭 10년째 되는 날이다. 설날과 한가위를 빼고는 하루도 쉬지 않고 책방 문을 열었다. 단 한 차례 책방 일을 못 한 적이 있었다. 1997년 봄, 김영삼정권 말기에 불어닥친 공안바람의 첫 희생양이 되었을 때다.… 과거 인문사회과학 책방은 단지 책만 파는 곳이 아니었다. 책방에 자주 오는 학생들에게는 책을 외상으로 주기도 할뿐더러 돈도 빌려주고 가방이나 깃발, 정부 반대 유인물을 맡아 주기도 했다. 그리고 책방 앞에 작은 알림판은 학생들의 만남과 모임의 이정표 구실을 했다.…"

세월이 많이 흘러 새로 출판되는 책도, 책을 파는 서점도 바뀐 환경에 적응하느라 애먹는 시절이다. 몇 되지 않는 남아있는 인문사회과학 책방의 의미에 대해, 특히 풀무질의 의미에 대해 은종복 씨는 군더더기 없이 간명하게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 아니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를 기본으로 하고, 살아있는 것을 죽이는 문화가 계속되는 한 책방은 살아남아야죠. 책방은 책방에 오는 사람들에게 당대에 가장 첨예한 사회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공간이 될 수 있어야 하니까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헌 책방 풀무질을 묵묵히 지키는 이유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인문사회과학 책방이 살아 남아 자연 친화의 문화를 일구고, 더러운 인간 착취 자본의 문화를 없애고, 죽임의 문화가 아닌 살림의 문화를 일구는 책방, 단순히 책을 파는 게 아니라 책을 사고 파는 사람 간에 작은 사랑방 기능을 하는 책방을 만들어가겠다는 이야기다.

한참 어려울 때는 부모님이 많이 도와주었는데, 지금은 돈을 모으지는 못 하지만 은행에서 빌려야 할 형편은 아니라고 했다. 쪼개고 쪼개서 이러저러한 단체에 풀무질 이름으로 후원하는 액수만 한 달에 약 15만원 정도라고 한다.

"2001년 미국의 아프칸 침공을 보며 마음이 많이 바뀌었어요. 요즘 학생들 신문도 잘 안 보잖아요.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이제는 뭔가 글로 하고싶은 이야기를 표현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작년부터는 한 달에 한 번씩 꾸준히 글을 쓰고 있는데, 한겨레신문에 기고하기도 했고, 다음 달부터는 인권운동사랑방에도 보낼 생각입니다."
 
풀무질에서 책을 사면 부록을 끼워주는데, 다름 아닌 A4 한 장으로 된 은종복 씨 자신의 글이다. 매 달 한 편 정도 글을 쓰고, 그것을 복사해두었다가 서점에서 책을 사거나 들르는 사람에게 읽어보라며 전해준다. 6월 26일에는 '누가 김선일을 죽였나'를, 7월 24일에는 '송두율과 국가보안법'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다. A4 종이에 직접 복사해서 나눠주는 모습이 다소 고전적으로 보였지만, 오히려 받아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의미가 남다를 수 있겠구나 싶었다. 인터넷 매체나 홈페이지, 블로그같은 표현 공간과는 차원이 다른...

책은 인문사회과학이 10%, 수험서적이 3-40%, 교재가 40%, 기타 선물용 등이 판매된다고 했다.
"사회과학서점이란 말이 무색하네요?"
"그런 셈이죠."
"다른 서점들도 그런가요?"
"크게 다르지 않을 거예요. 논장 서점의 경우도 컴퓨터나 여성지 등이 많이 팔린다고 하거든요..."

한 달에 20권 정도 팔리면 풀무질 베스트셀러라고 한다. 일주일에 4-5권 정도 나간다는 이야기인데 그나마 종류도 많지 않다. 최근에 많이 팔렸거나, 읽을만한 책을 생각나는대로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휴가갈 때 챙겨가도 좋다고 했다.

'자본을 넘어선 자본'{이진경,그린비), '전태일평전'(돌베개),
'9월이여 오라'(아룬다티로이,녹색평론사), '누가 세계를 약탈하는가'(반다나시바,울력),
'환경학과 평화학'(토다키요시,녹색평론사), '자본론'(맑스,비봉),
'경계인의 사색'(송두율,한겨레신문사), '알기쉬운 정치경제학'(김수행,서울대출판부),
'전쟁에 반대한다'(하워드진,이후),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요시다타로,들녘),
'한티재 하늘1,2'(권정생,지식산업사), '잡초는 없다'(윤구병,보리)......

에어컨도 없는 좁은 풀무질 서점, 책을 뺐다 꽂았다 하기 두어 시간, 한 권 한 권 마다 책 소개를 빼놓지 않았다. 수북히 쌓인 책 너머에서 땀을 훔치고 있는 은종복 씨에게 앞으로도 이 일을 계속 할 거냐고 물었다. 10년 후쯤 미국의 침략 패권주의가 수그러들고, 신자유주의에 따른 문제도 해결되어진다면 시골 가서 살겠다고 한다.

은종복 씨는 '삼각산재미난학교'에 8살 아들을 보내고 있는데, 올 여름휴가도 변산에서 있을 공동체 프로그램에 다녀올 예정이다. '삼각산재미난학교'는 12가구 13명의 아이들이 다니는 대안학교다. 미래에 농촌에서 자연과 함께 나누며 사는 것이 꿈이라고 말한다. 하고 싶은 일 하면 될텐데 제국주의의 신자유주의라는 거대담론을 자신의 문제로 삼아 미래를 고민하는 은종복 씨를 보며, 풀무질은 앞으로도 좋은 세상 안내하는 든든한 가이드가 되겠구나 싶었다.

"통일이 되더라도 흡수통일이 되고, 자본에 의한 통일, 신자유주의가 관철되는 통일이라면 농촌 가는 일은 미룰 수밖에 없겠지요. 책방을 지켜야 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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