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부분 본문을 그대로 옮겼으나, 일부 자의적으로 변경하여 정리한 부분 있습니다. 본문과 전적으로 일치하지 않음을 밝힙니다. - sb
트로츠키주의를 표방하는 국제사회주의 경향과 제4인터내셔널 경향의 주도적 인물들이 1990년~1992년까지, 국제사회주의 경향의 계간 이론지의 지면을 통해 벌였던 논쟁.
토니 클리프, 만델의 논문이 소개되어있고, 논쟁의 대략적인 흐름을 잡을 수 있다.
「트로츠키에서 국가자본주의로」(크리스 하먼) : 소련에 대한 트로츠키의 태도의 변화, 그리고 중국 동유럽을 비롯해 소련 스탈린주의 관료들에 대한, 트로츠키의 입장을 계승하고자 했던 두 세력들의 상이한 견해. 그중 타락한 노동자국가론을 대표하는 만델의 입장은 곳곳에서 혼동이 발견되며, (1) 스탈린주의 관료들과 서구 자본가계급 중 전자를 더 진보적으로 보는 오류 (2) 28년 이후의 소련경제가 소비재보다 중공업분야에서 축적해온 것에 대해서 규명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클리프는, 제국주의 시대의 자본주의에서 자본과 국가가 융합하고 이것이 전쟁과 군비경쟁으로 치닫게되는 원리에서 소련 중공업분야의 축적을 도출했으며, 이후 소련의 개방은 자본의 세계화와 맥을 같이 하며 소련이 세계 자본주의체제의 일부였다고 주장한다.
- 트로츠키는 초기 분석에서, 관료 문제는 노동자계급에 의해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 전망했지만, 이후 자신의 입장을 수정했으며, 정치혁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관료는 여전히 계급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 트로츠키는 40년에 이르러, 소련의 내부 모순이 지속된다면 부르주아 반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전망했지만, 실제 스탈린 관료주의는 전쟁 이후 훨씬 더 강해졌다.
- 4인터내셔널 국제서기국의 주류경향은 러시아 블록을 역사적으로 진보적인 동력으로 보는 경향이 있고, 그 중 일부, 이를테면 아이작 도이처의 경우는 53년 베를린 봉기와 56년 헝가리 봉기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 관료화는 무엇보다도 대규모의 축적률을 낳았다. 그리고, 이러한 축적은 관료들이 소비한 “재화와 용역”의 축적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철강, 시멘트, 전력, 석탄, 석유 등과 같은 중공업의 축적이었다. 소련의 경제학자인 바실리 셀류닌에 의하면, “소련 경제는 인간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더욱더 경제 자신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
- 자본주의에서 가치법칙은 관료적 전제와 필연적으로 대립하지 않는다. 관료적 전제와 가치법칙 사이의 모순은 사회가 가치법칙의 규정을 받기 때문에 일어난다.
- 1928년 이후, 급격한 변화드이 일거에 발생했다. (1) 노동조합의 독립성 폐지 (2) 실질임금의 30% 까지의 감소 (3) GPU(비밀경찰) (4) 관료와 노동자 사이의 임금격차 격심 (5) 토지집단화 (6) 노동수용소 규모 확대 (7) 생산재 생산을 위한 계획 목표는 기준을 상회하여 달성되었지만, 소비재 생산을 위한 목표는 간단히 무시되었다. 생산수단을 축적하기 위한 드라이브가 나머지 모든 것들을 규정하는 것.
- 제국주의 시대에, 공업들의 수뇌부들은 국가 관료들과 점차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된다. 말하자면, 공업과 국가가 하나로 융합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 융합 현상은 전면적인 제국주의 전쟁기에 가장 완전하게 발전된 모습을 나타낸다. 클리프는 전시경제가 자본주의의 한 종류로 존속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경쟁형태는 다름아닌, 서로 다른 국가들에 소속된 경쟁적 국가자본주의 지배계급들 사이의 군사적 경쟁이다. 군사적 패배의 위협은 거대한 국가자본주의 지배계급으로 하여금, 자국의 기업들에게 가치법칙을 부과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 클리프의 해석은, 1960년대 들어 세계 경제의 국제화 현상과 소련의 폐쇄된 경제가 서로 모순했다는 것을 설명해준다. 공업들은 이제 새로운 국제적 노동분업의 일부로 개편되어야만 생존할 수 있게 되었다. 소련은 세계체제의 일부이고, 따라서 축적 방법을 바꾸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사실의 검증을 이겨내지 못한 이론」(에르네스트 만델) : (1) 사적소유에 기반하지 않은 자본주의가 자본주의인가. 소련은 가치법칙의 지배가 아니라 세계 시장의 매개를 통해 간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뿐이다. (2) 관료가 지배계급인가. 관료는 부르주아지도 수탈했다. 잉여를 통제해도 그것이 곧 지배계급을 뜻하지는 않는다. (3) 소련 사회의 이행기적 성격과 소련의 공업화에 대해서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4) SWP가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하는 국가의 노동자투쟁을 방관하거나 기권하지 말아야 한다.
- 적어도 마르크스가 분석하고 정의한 의미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은 일반화된 상품생산인데, 소련은 그러하지않았다. 화폐 없이는 자본 축적도 있을 수 없다. 소련은 자본주의가 아니었으며, 공황도 자본주의의 공황 일반과 달랐다. 직접생산자로부터 잉여노동이 추출되는 것을 지적하는 것 만으로는, 소련에서의 자본주의 운동법칙의 존재를 입증할 수 없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각 사회의 성격은 잉여노동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잉여노동이 추출되는 특수한 형태에 의해 규정된다.
- 소련에서 중요한 투자는 가치법칙을 통해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대부분 국가 수준에서 관료에 의해 결정된다.
- 소비에트 경제의 기능은, 가치법칙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가치법칙의 영향으로부터 스스로를 완전히 벗어나게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시장의 요소를 가지고 있는 탈자본주의적 경제이다.
- 오늘날 소비에트 경제가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한편으로는 민주적 중앙계획의 결여, 다른 한편으로는 시장의 결여 때문이다.
- 군비경쟁을 다루면서, 마르크스주의의 경제학적 의미에서의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경쟁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 1927년 이후에 가속화된 소련의 공업화에 대한 SWP 동지들의 맹렬한 공격은 비합리적이며 심지어 무책임하기까지 하다.
- 어떤 사회일지라도, 지배계급이나 지배집단의 동기를 유발하는 것, 다시 말해 그들 자신의 소비를 증대시키려는 욕망만을 가지고 그 경제 전체의 동력이 모두 설명될 수는 없다.
- 동유럽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관료는 단지 노동자계급만을 초과착취한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지도 수탈했다. 역사적으로 관료는 자율적인 역할을 연출했다.
- 완전고용과 사적소유의 폐지라는 성과를 지켜야한다. 파시즘에 반대하는 독일 사회민주당을 방어하는 것은 생각할 수 있으면서도, 어째서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소련을 방어하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인가.
- 제3제국 말기에, 나치의 군관료는 사회적으로 생산된 것의 분배를 사실상 통제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도 지배계급은 아니었는데, 왜냐하면 사회적 잉여의 대부분은 여전히 자본가계급이 전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관료가 지배계급이라면, 이들이 반혁명 없이 살금살금 퇴장할 수 있는가.
- 어느 지도적 인물들도 노동자들의 봉기에 반대하여 관료의 편에 선 예는 단 한번도 없었다. 우리는 소련의 성격에 관한 논쟁에 참여하기 시작한 이래 정치혁명을 지지해 왔고, 그 입장은 지금도 변함없다.
- 국가자본주의 이론은 이러한 모든 갈등(소련, 동유럽, 중국, 쿠바, 니카라과)과 관련하여 어떠한 종류의 지침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러한 모든 갈등에서 그 나라들의 노동자들은 물론, 인민 대중들은 중립적 입장에 서있지 않았다. 그들은 스탈린과 그 후계자들에 대한 자신들의 증오심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편에 섰다.
「논리의 검증을 이기지 못하는 이론」(크리스 하먼) : (1) 동구권 경제는 규칙적으로 성장하지 않았다. (2) 과소생산에 의한 공황과 과잉생산에 의한 공황은 궁극적으로 다르지 않다. (3) 동구권 경제들은 평균성장률의 하락이라는 장기적 추세 때문에 수십년간 고통을 받아왔다. (4) 낭비가 소비에트 경제의 수준을 낮춘 주된 원인은 아니었으며, 낭비 그 자체는 무리한 축적의 부산물이다. (5) 실업이 존재했다. (6) 관료들은 사적자본주의 이후에도 여전히 존재했다. (7) 사유화라는 형식보다는 내용이 중요하다.
- 동구의 위기와 서구의 위기 사이의 상호작용을 나타내고 있는, 세계체제에 대한 분석을 제공하는 것이다. 불행이도 에르네스트 만델은 이 점에서 실패한다.
- 제국주의시대에 가치법칙은 거대 기업 내부 또는 국가의 군사적 부문 등에서는 작용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법칙은 대외적으로 볼 때는 그들에게 매우 중요한 규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 국가와 자본의 융합 현상은 1930년대와 1970년대 사이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 전반에 걸친 추세였다.
- 파괴수단에 대한 소비수단의 예속, 과소생산의 위기 및 경제 부문들간의 불비례 현상, 원자재의 부족 등등, 영구군비경제의 모순을 낳는 과정을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과 세계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사회주의적’ 국가들에 동등하게 적용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 국제적 투자의 시대가 개막되었고, 아르헨티나, 브라질, 스페인, 아일랜드, 남한, 이집트 등 개별 국가자본주의들의 세계 시장이 개막되었다. 그리고 기존의 서구 자본주의들의 국내 경제는 세계 노동분업의 변화에 따라 점차 재구조화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들 때문에 국가가 공황의 징후들을 억제하고 자본의 과잉축적을 중지시킬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기 시작하여, 과잉생산 공황이 유발되고, 급기야 1970년대 중반과 1980년대 초반에 일반화된 불황이 도래했고, 서구와 제3세계의 수많은 국가들은 낡은 케인즈주의 방식이나 또는 수입대체 발전 전략이 더 이상 유효할 수 없다는 사실에 갑작스럽게 직면하게 되었다.
- 헝가리와 폴란드에서는 공업의 최소한 80%가 국가가 지정한 자들의 수중에 있으며, 사유화된 나머지 20%의 대부분 역시 노멘클라투라의 배경을 가진 자들의 소유로 이전되고 있다. 군대, 경찰, 언론 매체 등에서 통제 위계는 예전의 그 인물들의 수중에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다.
- 사유화는 핵심이 아니다.
- 사회주의자들에게 가장 잘못된 대안은 낡은 방법을 고수하도록 희생할 것을 노동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진정한 사회주의자들이라면 관료 분파들 모두에 반대한다는 확고한 입장을 가지면서, 그 분파들 모두는 그들 자신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노동자들의 희생을 요구할 뿐이라고 주장해야만 한다.
<중간결산>
1. 만델의 타락한 노동자국가론
(장) 소련을 이행기체제로 규정
(단) 관료들에 대해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거나, 아래로부터의 운동에 잘못된 태도를 취했던 것. 그러나, 이것이 4인터 국제서기국의 이론상의 취약점이나 전반적인 태도는 아니었다. 중국 북한 쿠바에 대해서도 기형적인 노동자 국가라는 시각을 견지하는 것.
2. 토니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
(장) 소련경제가 세계자본주의와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규명했고, 동시에 국가자본주의가 자본주의의 세계화 시점에 어떻게 사적자본주의로 변모했는지 규명. 형식 보다는 내용이 중요하다는 측면.
(단) 반혁명이 10월혁명의 물질적 기반을 어떻게 파괴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고, 그저 반혁명 이후에 소련경제가 세계자본주의와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만 밝혔다. 그렇다면, 세계혁명이 동시에 일어나지 않고서는 자본주의 가치법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가치법칙과 소련」(데렉 하울) : 1928년을 기점으로 스탈린의 반혁명이 성공하였고, 그 이후의 노동생산성의 증가는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이라기 보다는 국가적 경쟁의 표현이었다. 축적은 축적을 위한 축적이었고, 당시의 생산은 노동자계급의 의지와는 무관했다. (1) 관료들은 경쟁을 통해 정치적 결정을 내린다. (2) 무기경쟁이 존재했다. (3) 임금이 존재했다. (4) 직장 이전의 자유가 있었다. (5) 국가자본주의적 축적 내부에는 축적률의 장기적인 저하 경향이 존재했다. (6) 이윤의 매커니즘이 소련에도 작동했다.
* 제국주의시대에 경쟁은 국민국가 사이에서 격렬해지는가.
- 60년 동안 이러한 시장 매커니즘은 소련 안에서 작동하지 않았다. 가치법칙이 소련에서는 발전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 우리의 전통은 언제나 세계 경제를 국민 경제들의 단순한 총합이 아니라 하나의 독자적인 실체라고 강조해 왔다. 자본주의의 주된 동학은 경쟁적 축적이 자본 단위들에게 외적 강제법칙으로 강요된다는 것이다. 축적 경향은 심리적인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중심적 과정의 표현이다.
- 제국주의시대에 가격은 이제 객관적으로 결정되는 양(量)이기를 멈추고, 의지와 의식을 가지고 가격을 정하는 사람들의 계산에 맡겨지는 문제가 되어 버린다. 가치법칙의 작용은 자본의 집적과 집중 때문에 변형될 뿐이다. 계획과 경쟁은 서로 반대되는 경향이 아니다.
- 경쟁은 ‘국민’경제의 영역 내에서는 최소한으로 줄어들지만 국민국가 사이에서는 무척 격렬해진다. (부하린)
- 토니 클리프는 만약 우리가 소련을 따로 떼어 내서 하나의 자본주의 모델과 비교한다면 국가자본주의론은 성립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 우리가 소련에서 관료적 국가자본주의가 확립된 시기를 1928년으로 잡는 것은 그때부터 국제적 경쟁이 소련의 국내적 과정의 주요한 결정 요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1925년에 스탈린은 일국사회주의 문제를 둘러싼 투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 노동생산성을 증가시키는 것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의 측면이라기 보다는 국가적 경쟁의 표현이 되었다. 축적이 외부에서 강제된다는 특징이 축적의 형태를 결정했다. 이것은 축적을 위한 축적이었다. 노동자계급은 축적과정의 희생자였다. 이 시기의 러시아를 어떤 의미에서는 ‘노동자 국가’라고 묘사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소련의 경제적 동학은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나 노동자계급의 필요에 따라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이.
- 소련에서 가치법칙의 작용을 “소련에는 상품생산이 있는가?“ 하는 형태의 질문으로 제기하는 거은 인위적이며 정태적인 문제제기이다. 일단, 분석 수준을 국제적 경쟁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면 소련의 재화들은 상품의 사회적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국가자본주의에서는 관료가 인격화된 자본이다. 관료의 정치적 결정들은 비록 시장경쟁이라는 제한된 의미의 경제적 경쟁은 아니라 할지라도 경쟁에 의해 결정된다.
- 소련에 가해진 외적인 무기경쟁 압력이 노동자 국가에게도 마찬가지로 작용한다는 주장은 스탈린의 반혁명을 무시하는 것이다.
- 노동의 국제적 분업체계로부터의 일정한 괴리는 더욱 고립된 경제들에게는 비용의 증대를 가져온다. 그들은 서방에 문호를 개방하는 것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마음을 굳혔다.
「궁지에 몰린 도식적 교조주의」(에르네스트 만델) : (1) 소련의 해체는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해체이다. (2) 제국주의시대의 특징은 국가독점주의적 트러스트가 아니라 다국적기업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다. (3) 관료들은 가치법칙에 따른 동기부여가 아니라 관료로서의 동기부여를 받았을 뿐이다. (4) 평균이윤율의 저하 경향은 자본의 과잉공급 때문이 아니라,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되는 결과 때문이다. (5) 관료에 대한 기대, 노동자국가주의 등은 중상모략에 불과하다. (6) 사유화 반대 투쟁은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해서가 아니라 대중의 생활수준 하락을 막아야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7) 전쟁에 대한 태도 - 2차 세계대전은 다른 특성의 전쟁들이 한데 섞여 있었으며, 우리가 방어해야 하는 인민의 봉기들이 존재했다. 이것을 방관하는 것은 옳지 못한 태도이다. (8) 제3세계 국가에 대한 태도 - 국가의 계급적 내용을 그 정치적 지도의 성격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9) 국가자본주의론에 대한 입장차이를 확대시키지 말아야 한다.
* <제국주의론> 제국주의시대의 특징으로 묘사된 내용 참고 / 동유럽의 변화들 참고 / <미국의 세계제패전략>
- 만일 자본주의의 부활이라는 결과가 나타난다면, 그것은 세계 제국주의의 중대한 승리를 의미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 기형화된 그리고 타락한 노동자 국가들의 관료는 자본주의의 부활에 저항할 능력이 없다. 실제로 관료의 모든 분파들은 자본가로서나 또는 재구성된 자본주의 체제의 국가기구에서 자신들의 새로운 자리를 차지할 채비에 나서고 있다.
- 우리의 입장은 이 국가들에서 노동자계급과 소규모 소수파 사회주의자들이 이중의 투쟁을 수행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구 스탈린주의 정당과 신 스탈린주의 정당의 분파들을 설득하여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에 대한 진실한 정치적 처방일 수 없다. 대규모의 독립적인 노동조합들과 새로운 노동자 정당들을 건설해야만 한다.
- 동독의 서독으로의 통합은 결국 이러한 획득물들에 격렬한 공격을 가하는 것으로 결말지어졌다. - 약, 40%에 달하는 실업률, 무료 탁아소의 폐지, 강제로 가정에 돌려보내진 여성들, 치솟는 지대와 물가
- 하먼의 전반적인 논거는 구소련의 위기를 자본주의적 공황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논거에는 현대 자본주의의 특징, 그리고 특히 자본과 국가의 통합에 관한 매우 매혹적인 일련의 명제들이 포함되어 있다. 어느 누구도 제국주의의 기능을 세권의 <자본론>에서 정초된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일반법칙들로부터 분리해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 하먼은 부하린의 정식이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의, 즉 지난 반세기 동안의 자본주의의 현실과는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는 점에 유념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자본의 주된 조직 형태는 국가독점주의적 트러스트가 아니라, 모든 국가들로부터 더욱더 독립적인 다국적 기업이다. 오늘날 국제자본주의의 네가지 주된 특징, 즉 다국적기업, 제3세계의 끊이지 않는 과잉착취, 제3의 기술혁명 동안 배가된 기술 혁신 속도, 그리고 영구적 인플레이션 등은 국가자본주의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다.
- 우리는 텅 빈 상점은 판매되지 않은 재화로 가득 찬 상점의 변종으로 결코 설명될 수 없으며, 사용가치의 과소생산을 상품의 과잉생산의 변종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말로 우리의 주장을 요약한 바 있었다.
- 소비에트 관료들이 자본가들과는 다르게 행동하고 다르게 동기부여받으며 다른 제도적 틀 속에서 움직인다는 것,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지난 60여년 동안 구소련에서 산출이 수요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던가? 기본적 배분은 미리 결정된 우선순위에 따라 국가, 즉 최고위층 관료가 사전적으로 배분하는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러한 우선순위는 이윤이라는 동기에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권력과 특권을 유지하고 강화하려는 관료의 욕구에 따라 결정된다. 어째서 그들은 일본이나 서독, 프랑스, 이탈리아는 물론이고, 브라질이나 남한에서조차도 부분적으로 이루었던 ‘내포적 공업화’에 성공할 수 없었는가? 자본가들과는 대조적으로 소비에트 관료들은 효율적인 산출이나 성공적인 경쟁에 어떤 관심도 없었다는 것이 올바른 해답은 아닐까? 개별 관료들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관료로서의 지위의 안정성 여부에 연연해 한다.
- 사회주의적 계획과는 대조적으로, 관료적 계획은 시장이나 가치법칙으로 교정되지 못하는, 불투명성이라는 요소를 간직한 채 수립된다. 관료들은 자우너의 사전적 배분 경제에 기반하여 움직인다.
- 구소련과 동유럽 여러 나라들의 사회적 정치적 투쟁에서 핵심 사안인 사유화 문제는 이런저런 시위에 참여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보다 정치적 정향을 판단하는 데 몇 천 배 더 결정적인 문제이다.
- 우리는 그들의 이데올로기가 무엇이든 간에, 또 일부 관료가 그들을 지지하는지 여부에 상관없이, 사유화에 반대하는 노동자들 편에 무조건적으로 선다.
- 동유럽에서 관료적 독재의 붕괴, 그리고 구소련에서 체제적 위기의 심화 등은 동유럽에서의 거대한 대중 동원 및 구소련에서의 대중 동원이 상승되는 직접적 여파로 발생할 것이었다. 그러한 여타로부터 정치적 변화의 동학, 즉 혁명 직전의 동학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동학은 다음과 같은 서로 다른 세 가지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노동자계급의 패배를 의미하게 될 관료적 독재의 재확립, 노동자계급의 훨씬 중대한 패배를 의미하게 될 자본주의의 부활, 노동자계급의 승리를 의미하게 될 정치혁명의 승리.
- 자본주의의 부활은 노동자 계급의 저항을 분쇄해야만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 부활이 어떤 형태를 취하게 될지는 노동자계급의 저항 수준과 정치적 의식에 전적으로 의존할 것이다.
- 자신들을 노예화하려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중국 인민들이 수행했던 전쟁은 제국주의간의 전쟁이 아니었다. 그 전쟁은 모든 사회주의자들이 지지해야만 했던 정의의 전쟁이었다. 나치 독일의 노예화와 대량학살에 대항하여 소비에트 인민들이 수행했던 전쟁에 대해서도, 우리는 제국주의간의 전쟁이 아니었다고 말해야 한다.
- (레닌) 순수한 사회혁명을 기다리는 어느 누구도 살아생전에는 그것을 구경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진실한 혁명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단지 말뿐인 혁명가들인 것이다.
- 캘리니코스는 국가의 계급적 내용을 그 정치적 지도의 성격과 혼동했다.
「파산한 이론을 은폐할 수 없는 수사학」(알렉스 캘리니코스) : (1) 소련에서 35년 넘게 거대한 생산력의 발전을 이루었던 것은 가치법칙의 작용 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으며, 이것은 제국주의시대의 군비경제에 대한 설명을 밑바탕으로 한다. (2) 만델은 그의 표현과는 달리 사유화의 형식 자체에 의존하고 있으며, 사회주의는 노동자계급 자신의 해방이라는 과제로부터 벗어나고 있다.
- 20세기 벽두에 레닌, 룰셈부르크, 힐퍼딩, 부하린 등이 이룩한 마르크스주의 경제 이론의 결정적인 반전은 마르크스가 탐구한 주요 경향들 중의 하나인 자본의 집적과 집중의 효과들 - 자본의 규모 증대, 은행자본과 산업자본의 융합 경향, 사적 자본과 국가의 통합 - 을 고려하기 위해 마르크스의 분석을 정교화하는 것을 자신의 목적으로 했다.
- 스탈린주의 사회를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관료적 집산주의’의 형태로 보는 샤흐트만주의적 분석의 지지자 로버트 브레너가 전개한 바 있다. 그러나 소련은 전자본주의 사회들에 특징적인 기술과 산출의 상대적으로 완만한 성장이 아니라, 만델이 과장할 정도로 강조하듯이, 35년 넘게 생산력의 거대한 발전을 경험했다. 이것을 주로 탐욕이 동기가 된 노멘클라투라의 자의적인 우선순위 결정으로 설명하는 것은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는 것과 거의 마찬가지다.
- 국가자본주의 이론은 우리들로 하여금 1930, 40년대 부르주아 세계의 일반적 국가화를 군사화된 국가자본주의의 출현을 중심으로 하는 더욱 장기적인 과정의 정점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 1930년대의 대공황은 높은 자본의 유기적 구성과 낮은 이윤율의 결과였다. 그러나 대공황은 세계 시장의 붕괴를 재촉했고, 그럼으로써 국가자본주의로 향한 경향을 강화했는데, 그 극단적인 경우가 처음 두 5개년계획 기간(1928~1937) 동안의 스탈린주의 체제의 성립이다. 그것은 서구에서는 전시에만 완전하게 실현된 양상들이 반세기 이상 지속되는 과정이었다. 1980년대에 이러한 형태의 자본주의는 자본의 점증하는 국제화 때문에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어버렸다.
- 제3세계 혁명들의 성격은 만델이 사용하고 있는 스콜라적 논리보다는 그 혁명들 속에 작동하고 있는 실제 사회적 과정에 의존할 것이기 때문이다.
- 그것은 어떻게 하여 자본주의보다 질적으로 우수하다고 상정된 사회가 그들의 서구 경쟁국들의 성취와 비굑하여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데 형편없이 실패했으며, 이들 사회가 그들의 이익을 위해 조직되었다고 상정되는 노동자계급 자신들로부터 결정적으로 거부되었는지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