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츠키의 노동조합투쟁론
레온 트로츠키 지음, 서상규 옮김 / 풀무질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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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슬슬 트로츠키의 저작에 대한 여행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마지막으로 선택한 저작은 <노동조합투쟁론>입니다. '노동조합'이라는 가장 익숙한 주제를 제일 마지막으로 선택했습니다.

그동안 여타의 독서후기가 현저히 낮은 조회수를 기록했는데, - 어느정도 짐작했지만 제 예상보다도 낮았습니다. - 덕분에 이번에는 좀 더 현실 중심적으로 후기를 써볼까 합니다.


# 어용노조

제목에 걸맞게 노동조합 얘기로 시작해볼께요.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다들 아실텐데, 한국노총을 소위 '어용노조'라고 불러왔습니다.

어용의 사전적인 의미는 '권력에 아첨하고 자주성이 없다'는 뜻입니다. 본래 노동조합이라는 것이, 사용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파편적이고 힘이 없는 노동자의 권익을 지키기위해서 결성되는 것이니 만큼, 사용자에 대해 독자성 내지는 자주성을 가져야하는데 그러하지 못한 경우를 일컫는 것이죠.

하지만, 한국노총의 노조간부들이라고 해서 대놓고 "나는 親사용자적이요." 라고 할 수는 없을겁니다.
겉으로는 어떤 방식이든 시늉을 해야하기 마련이죠. 제 경험을 빌리자면, 이런 사람들이 종종 내세우는 것이 '합리적 사고' 혹은 '공존의 사고' 입니다.

"무조건 우리 주장만 할 수는 없으니 상대방(사용자)의 입장도 반영하자."
"요구하는 것을 무조건 관철시킬 수는 없으니 적당히 우리도 양보하자."
"회사가 무너지면 결국 우리 일자리도 사라지는 것 아니냐."

기타 등등의 논리가 '합리적 사고'라는 이름을 빌리게 됩니다.
여기서 합리적 사고란 대부분 양보 내지는 쟁의행위를 하지 않음을 뜻하는 것인지라, 사용자들에게는 무척이나 환영할 만한 일이고 사용자들과 노조간부들의 관계는 돈독해집니다.

사용자 입장에서 노조간부의 역할이란 실로 막중한 것입니다.
노조간부가 사용자와 노동자의 사이에서 중재를 빙자한 양보를 해주어야 회사측의 이익을 보존할 수 있는 셈이니까요.

이익이 되는 일에는 투자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사용자들은 노조간부에게 온갖가지 특혜를 주기 시작합니다. 차도 사주고, 비싼 술집도 데려가고, 노조전임자로서 일하지 않아도 월급을 꼬박꼬박 지급하며, 기타 등등

또 소위 강성인 노조원을 공격하는데 있어서도 이들은 동맹을 맺습니다.
강성인 노조원은 회사에는 물론이거니와, 노조간부들을 비판하면서 이들의 달콤한 지위를 공격할테니까요.
노조간부에게 해고할 권한은 없으니, 회사에서 해고를 시키고, 노조는 이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서로 장단을 맞춥니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그들의 이해관계가 잘 짜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가능한 동맹일겁니다.
한국노총이든 민주노총이든 태어날 때 부터 어용딱지 붙이고 태어난 것이 아닌 이상, 이름에 '민주'가 들어갔건 들어가지 않았건, 어떤 노동조합이든 이런 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됩니다.


# 노사정위원회

위에서 전해드린 얘기가 노조간부와 사용자간의 야합이라면, 노조간부와 국가기구간의 야합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정리해고법 근로자파견제 변형시간근로제를 통과시키려 했고 실제 날치기 통과되었던 96년 노동법 개악이 그 사례가 될겁니다.
이때 민주노총의 최대 이슈는 복수노조 금지, 3자개입 금지, 공무원 교사의 단결권 제한과 같은 법안을 폐지하는 것이었는데, 도리어 정부는 정리해고와 근로자파견제, 변형시간근로제를 합법화하려고 했습니다.

이 노동법 개악은 96년 '노사관계개혁위원회'에 상정된 안이었고, 정부의 강행의지로 민주노총은 10월에 탈퇴하게됩니다.
노사관계개혁위원회는 깨졌지만 이 법안이 날치기 통과될 것이라는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었는데, 이때 민주노총의 노조간부들은 총파업을 연기하면서 논란을 빚게 됩니다.

이때 노조간부들은, "실질적으로 노동법 개정을 할 수 없는 현실적 상황에서, 일단 정리해고법 근로자파견제 변형시간근로제의 강행 통과만이라도 막자" 고 말하며, 국회가 이것을 강행처리 할 경우에 파업에 들어간다는 것이었습니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격이었죠.
결국, 총파업은 몇차례 유보되었다가, 12월 25일 날치기 통과가 된 이후에야 일어나게 되는데, 결국 법안을 철회시키지 못하고 일부를 개정하는 수준에 그치게됩니다.
단 하나, 민주노총 합법화를 따내게되는데, 이 때문에 민주노총 합법화와 노동법 개악을 맞바꾸기 했다는 얘기들도 있구요.

그런데 그로부터 몇년이 지난 얼마 전,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오해 민주노총 대의원대회 때 소속 조합원들끼리 물리적 충돌이 있어 이슈가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현재 민주노총 지도부가 다시 노사정위원회에 가입하려하자 이에 반대하는 조합원들과 충돌이 있었던거죠.
민주노총 지도부는 민주노동당의 비정규직 관련 법안을 통과시키고자 했고, 정부는 도리어 비정규직보호법안 - 노동계의 표현은 비정규직개악안 - 을 강행통과하려 했던겁니다.

96년과 꼭 닮은 형국입니다. 노조간부 몇몇의 협상으로 양보안 타협안을 도출하려는거죠.


# 관료주의의 항변

위에서 전해드린 얘기들은 몇해 전부터 노동운동 내의 굉장히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어온 것들입니다.
'관료주의'라는 제목을 달고있는 이 문제의식은, 노조의 상층부가 사용자나 정부의 이해를 대변하며 조직의 기반이 되는 조합원들과 심각하게 괴리되는 현상을 뜻합니다.
그리고, 트로츠키의 <노동조합투쟁론>은 이것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 현대 전 세계 노동조합의 발전, 아니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퇴보에 있어서 하나의 공통된 특징적 현상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노동조합이 국가권력과 유착하거나 함께 성장하는 현상이다. "
" 개량주의 노동조합의 지도부인 노동귀족과 노동관료 특권층은 노동자들을 부르주아국가의 이익을 위해 통제한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에서만 국가는 이 특권층의 사회적 지위를 보호한다. "


트로츠키의 분석에 따르면, 퇴보기의 노조운동은 노정교섭이나 노사정위원회와 같은 국가기구와 함께 발을 맞출 것이고, 노조 지도부는 국가의 이해를 어느정도 반영하면서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속 노조를 적당히 통제하면서 국가의 이해를 받아들이고 대신 자신의 위치를 보호받는 것이죠. 대신, 노조간부가 소속노조를 적당히 통제하지 못한다면, 언제든 국가는 이들을 내칠 것이구요.

민주노총 지도부가 조합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사정위원회 참가를 강행하려 했던 것은,
노사정위원회에 참가하지 않았을 때 국가로부터 버림받을 걱정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1930년대에 쓰여진 이 저작이 2005년 한국의 문제들을 훌륭하게 분석하고 있는 것은, 트로츠키가 뛰어난 예지능력을 갖추고 있어서는 아닐겁니다.
그의 분석이 단순히 직관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을 둘러싼 객관적인 조건을 면밀히 분석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겠죠. 세계 어는 곳에서나 물은 섭씨 100도에서 끓는 것 처럼.


# 관료주의 분석하기

그렇다면, "왜 노조간부들은 타락하는 것일까?" 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동조합이란, 자본주의적 기구이죠. 자본주의 사회의 헌법에도 노동3권이 명시되어 있으니까요.
이마저도 현실과 괴리되어있지만, 허울좋은 법안이나마,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어 사용자의 횡포에 대항해 자신들의 임금이나 근로조건, 등을 개선할 권리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나마 이만큼의 법적 지위도 그간 전 세계적으로 노동자들의 죽고 다치는 투쟁이 있었기 때문이지만요.

여튼, 노동조합 자체는 부의 분배를 조정하려하지, 자본주의 자체를 변화시키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적 기구이죠.
노동조합의 한계, 그리고 노조간부들의 타락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보여집니다.

한국자본주의가 어느정도 부를 축적하고 있다면 분배도 가능하겠지만,
시장이 개방된 제국주의 시대에, 한국자본주의가 초국적자본주의와 경쟁을 해야하고 경쟁력에 뒤쳐져 분배할 능력을 상실한다면, 부의 분배를 목적으로 하는 노동조합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으니까요.

이 경우, 노조간부들은 필연적으로 사용자와 유착하거나, (혹 사용자의 지불능력이 없다면) 국가기구와 유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과의 유착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어느정도 조합원들의 요구를 양보하거나 조절해야하구요.


# 관료주의 벗어나기

이런 필연적인 귀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의 목적을 자본주의 내에서 부를 분배하는 것 정도로 '제한하지 않는 것' 밖에 없을겁니다.
트로츠키는 정당의 역할이 여기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정당은, 아무리 정체되고 퇴보한 노동조합이라 할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활동해야하며 노동조합이 그 목적을 자본주의 내로 한정하지 않도록 꾸준히 설득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극심한 위기에 처하게되어 노동조합이 무기력해진다면, 이때 정당은 노동조합이라는 덫에 걸리지 않고 노동자들이 다른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한국에도 97년 총파업 이후에 민주노총 40만 조합원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며 민주노동당이 결성되었는데, 민주노동당이 트로츠키가 언급한 정당에 부합하는지는 확연하지 않습니다.
다만, 민주노동당이 기존의 정당들에 비해 단지 정책적으로 조금 왼쪽에 있을 뿐이라면, 그리고 단지 집권을 목표로 한다면, 이들도 타락한 노조간부들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상을 해봅니다.

연일 노동조합운동의 내부비리로 메이저 언론 뿐만 아니라 노동계 내에서도 문제가 심각한 이때,
트로츠키는 다시 한번 질문합니다. 그저 노조간부를 새로 선출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일까 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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