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6일 사건의 영향 - 1934년 프랑스 우익의 쿠데타에 붙여」
공동전선은 다양한 가능성들을 열어줄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공동전선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 것도 결정하지 못한다. 오직 대중의 투쟁만이 결정할 뿐이다.
위대한 전쟁이론가 클라우제비츠의 멋진 말을 그대로 옮기면, 전쟁은 다른 수단을 가지고 하는 정치행위이다. 이 정의는 내전에도 완벽하게 적용된다. 물리적 투쟁은 정치투쟁의 다른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각각의 군사기계 뒤에는 기술적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인간들이 존재한다.
사냥감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소총에 총알을 장전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너무 신중한 사냥꾼이 말한다. 그러나 사냥감이 나타났을 때 장전하면 너무 늦는다.
'만약에' 라고 생각하는 것은 투쟁형태가 부르주아계급의 선의에 따르며 계급이해의 비타협성에 따르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다시 한번, 프랑스는 어디로?>
경기의 요동은 노동계급이 자본주의를 타도하기에 좀 더 쉽거나 좀 더 어려운 상황을 조성할 뿐이다.
자동적으로 모든 것이 상승했기 때문에 과거의 방식대로 선전, 선거활동, 조직 등에만 치중하면 승리가 저절로 성취될 것이라는 개량주의적 환상이 조금씩 생겨났다.
맑스주의자와 레닌주의자에게 선동은 언제나 대중과 나누는 대화이다.
혁명적 위기가 다가오면 책임지기를 두려워하는 많은 지도자들이 대중의 보수적 경향 뒤로 숨어버린다.
지방자치선거와 의회선거는 계급역관계를 파악하는 중요한 잣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이상은 아니다.
노동계급 지도자들은 대중 앞에 혁명적 군력장악의 임무를 계속 제기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총파업의 정치적 의미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들은 총파업에 대해서 감히 입도 뻥끗하면 안된다. 총파업을 투쟁수단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곧 혁명투쟁을 부인하는 것이며 이것은 곧 노동계급을 파시즘 세력에게 팔아넘기는 범죄행위가 된다.
기회주의와 모험주의는 동전의 양면이다.
"현대적 기술로 무장한 군대에 대해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 주장만큼 공허하고 진부한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군대의 핵심부를 획득하거나 최소한 중립화시키지 않고는 혁명은 승리할 수 없다.
결정적인 것은 단결 자체가 아니라 단결의 실제적 내용이다.
독재의 기초는 노동자 민주주의다.
<결정적 단계>
대중은 행동을 통해서만 배운다. 이들에게는 이론적인 연구를 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프랑스 정세가 제기한 문제에 대해서>
스탈린은 러시아의 인민전선을 제압했던 10월혁명의 이름으로 프랑스의 인민전선을 지원했다.
<결정적인 순간>
원하든 원치 않든 지구가 계속 축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매일 확인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계급투쟁의 법칙들은 우리가 인식하든 않든 독립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혁명계급의 혁명적 공세가 제때에 객관적 요인을 돕지 않는다면 혁명적 상황은 반혁명적으로 변한다.
투쟁전선에 제일 먼저나서고 제일 나중에 물러서는 혁명정당의 도리
<프랑스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논조는 정치적 내용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논의해야 할 것은 바로 이 내용인 것입니다.
<중도주의와 제4인터내셔널>
중도주의의 치명적인 질병은 자신의 일반적인 원칙으로부터 전술적 조직적 결론들을 용기있게 도출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혁명운동의 역사 전체는 중도주의자들이 이렇게 사실들과 사상들을 가지고 숨바꼭질하는 행태를 풍부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혁명가는 정치적 거처를 두 곳에 둘 수 없습니다. 영혼을 위해 부르주아 거처에 있다가 현실정치를 위해 노동자 거처에 있을 수 없습니다. 이중성은 노동자 혁명과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공동전선"은 대중조직들간의 문제일 때만 의미가 있습니다.
<트로츠키주의와 노동자농민사회당>
분파가 무엇인가? 가능하면 가장 짧은 시간 내에 자신들의 올바름을 당에 설득시키려는 목적으로 당내에 생각이 가장 가까운 자들이 일시적으로 규약없이 자발적으로 모인 그룹이다.
정치인의 견해가 애매모호하면 할 수록 그리고 그가 남의 비판을 참는 능력이 적으면 적을 수록 그에게는 날카로운 논쟁이 비하하는 발언인 것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