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혁명 이후 러시아에 대한 분석
트로츠키가 누구인지, 그리고 제가 왜 트로츠키의 저작을 권하는지에 대해서는 지난 <인민전선 비판> 후기에서 대략 말씀을 드렸습니다.
트로츠키는 오랫동안 당내의 비판세력으로 남아있었지만, 1933년 소련 공산당이 히틀러의 집권을 눈감은데 대해, 더 이상 소련 공산당의 개혁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그 해에 ‘국제공산주의자동맹’ 을 창립하고 코민테른 (소련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각국의 공산당 연합. 본래는 ‘제3인터내셔널‘ 이라고 합니다.) 을 대체할 새로운 국제조직 (제4인터내셔널) 을 준비하게 됩니다.
<배반당한 혁명>은, 볼세비키당 중앙집행위원으로서 1917년 혁명을 이끌었던 트로츠키가 스탈린을 위시한 관료집단에게 장악되어버린 볼세비키당에게, 그리고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에 던지는 파산선고와 같습니다.
그는 이 저작의 후반부에 ‘평화적인 해결책은 불가능하다’ 라고 못박으면서, 다시 한번 정치혁명이 일어나지 않으면 소비에트 공화국은 자본주의로 복귀할 수 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1917년 이후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연방 해체 이전의 소비에트 연방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배반당한 혁명>은 러시아의 각 분야에 대한 트로츠키의 세심한 분석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 사회주의는 포커판의 조커(Joker)가 아니다?
91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된 이후, 한국에서는 소련의 사회체제에 대한 규명 논란이 한참이었을겝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서구에서 이미 반세기 전에 논란이 되었던 얘기들이 이제야 봇물 터지듯 쏟아져 들어옵니다. 제가 소개하는 <배반당한 혁명>이 1936년에 출판되었고, 정통 트로츠키주의와는 견해를 달리하는 토니 클리프의 분석이 1948년에 출판되었습니다. 물론, ‘소련은 곧 죽었다 깨어나도 사회주의며, 연방의 해체는 곧 사회주의의 몰락이며 동시에 위대한 자본주의의 승리‘ 라는 사람들도 있었죠. 가장 많았습니다.
사회주의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오해 중 하나는, 바로 사회주의를 포커판의 조커(Joker) 쯤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을 두고 회심의 조커를 던져 일어난 마술인 것 마냥 생각하고는, 그 결과가 시원치않자 이내 비방을 시작합니다.
저는 이들이 마르크스-엥겔스의 이론을 조금이라도 읽어주는 예의를 보이기를 바랍니다.
저의 조약한 수준에 비추어봤을 때에도, 사회주의는 언제든 내키는 대로 꺼내어 쓸 수 있는 조커가 아닙니다.
사회주의 경제체제는 생산수단을 국유화하고 계획적인 생산을 하지만, 이 형식만을 가지고 사회주의라고 얘기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형식은 사회주의를 구성하는 일부분일 뿐이며, 생산수단의 국유화나 계획적인 생산이야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공기업, 공공의료, 공공교육, 계획경제, 등으로 존재하니까요.
마르크스는, 경제체제의 변화 발전이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에 의해 일어난다고 분석하였습니다. 미래의 어떤 시대도 과거보다는 뛰어난 생산력을 가지고 있는데, 일정시점이 되면 노예제니 봉건제니 자본제니 하는 한 시대의 고정되어 있는 생산관계와 갈등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의 이론에 따른다면, 사회주의는,
‘생산력’ 에선 자본주의보다 나은 생산력을 보유할 것인데, 이는 ‘생산관계’ 의 변화를 통해서입니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인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와 경쟁에 따른 무정부적인 생산‘을 ’공공소유와 계획적인 생산‘ 으로 변경하는 것을 통해서, 생산력이 월등히 나아진다는 것이죠.
생산력 없이 생산관계만으로 사회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미 달성된 노동생산성과 무관하게 소유형태만 가지고는 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견해이다.“
# 자본주의도 아닌, 사회주의도 아닌
그래서, 트로츠키는 시작을 러시아 각 산업부문의 낙후된 생산력을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생산수단을 국유화하는 것을 통해서 이전에 기대할 수 없었던 훌륭한 발전을 이루어냈지만, 서구의 자본주의 국가에 비해 생산력이 월등히 낮다는 점을 언급합니다.
그는 암소에의 비유를 드는데, “암소가 사회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암소의 수가 너무 적거나 암소의 유방이 너무 왜소할 경우는 불충분한 우유 공급으로 인하여 분쟁이 일어난다.” 는 것입니다.
1905년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짜르가 통치하던 봉건 러시아는 굉장히 낙후한 국가였습니다. 산업혁명을 이룩한 서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은 광범위하게 이루어지지 못했고 노동자 보다는 농민이 월등히 많았죠. 1917년에 혁명을 일으켜 직접 정부를 장악했지만, 이미 낙후되어 있던 생산력에 대한 파급효과에는 한계가 분명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혁명 직후 치러야했던 국내외의 전쟁들로 산업은 더욱 피폐해졌습니다.
따라서, 트로츠키는 이렇듯 생산력이 낙후한 소비에트 공화국을 두고,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이행기 체제’ 라 규정하였고, 소비에트 공화국이 사회주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혁명을 통해 수립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유지하면서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나은 생산력에 도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계획 생산과 더불어, 상품 가격 공급과 수요의 법칙이 함께 존재하는 이행기 체제이지만, 전자는 지향되고, 후자는 지양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이것에 실패한다면, 다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자리를 내어줄 것이죠.
실제, 소비에트 공화국은 내전 기간 국유화, 노동의무제, 곡물징발제, 식량배분제, 등의 ‘전시공산주의‘ 정책을 실시했지만, 내전이 종식된 1921년에는 신경제정책(NEP)을 통해 자유농을 인정하고, 농산물 판매를 허용하며, 사기업을 부분적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이행기 체제란, 실로 모순적이고 혼란스러운 것이었죠.
“소련이 생산과 분배의 안정을 확보한 사회주의의 첫 단계에 결코 도달하지 못했다는 중요한 사실 때문에 소련의 발전과정은 순조롭게 진행되기 보다는 모순에 가득찬 것일 수 밖에 없다.“
# 생산력, 냉정하게 바라봐야 할 혁명의 객관적 요소
제가 장장 두어달에 걸쳐 읽었던 3권짜리 <러시아혁명사>의 대단원에는, 혁명 직후에 열렸던 전러시아소비에트대회가 묘사되고 있는데, 이 대회에서는 각 분야에 대한 결의문이 채택됩니다.
이 중에서 주목해볼만 한 것이 바로 ‘토지문제’에 대한 결의문인데요, 소비에트 정부는 토지문제에 관한한 사적소유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회주의 사회가 지향하는 토지정책이란, 토지를 사적으로 소유하지 않고 공동으로 생산하는 것이지만, 소비에트 정부는 이를 강제적으로 집행하는 방식을 반대했던 것입니다.
소비에트 정부는 몇 개의 집단농장을 설립해 집단생산 방식의 우월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농민들을 설득하려고 했죠.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집단생산이 가능하도록 농기계를 비롯해서 충분한 생산력이 확보되어야 했던 것이구요.
하지만, 비록 일시적이라 하더라도, 1921년 이후 시행했던 신경제정책은 시장주의의 요소를 반영하고 있었고, 시장경제는 필연적으로 부의 불평등을 조장하게 됩니다. 농촌에서는 부농(쿨락)이 탄생하게 되고, 농민계층의 분화가 일어납니다. 이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테러를 통해 권력을 찬탈한 경우가 아닌 이상, 정부의 성격이란 국민들의 성향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작은 예로, 대규모 공단이 밀집해있는 울산이나 창원과 같은 도시에서, 노동자 출신 국회의원이나 지역단체장이 당선되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이는 러시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공업화가 뒤처지면서 집단농장 계획이 지연되자 일시적으로 허용했던 시장주의의 결과로 농촌의 분화가 고착화되고, 이는 곧 정부에까지 영향을 미치게됩니다.
트로츠키는 스탈린을 개인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스탈린이라는 소부르주아 관료집단의 집권배경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자 노력했고, 이행기 체제의 모순적 성격에 덧붙여 내전으로 인한 적군의 사기저하, 세계혁명 - 주로 1923년 독일혁명 - 의 패배, 좌익반대파에 대한 직접적인 테러, 레닌의 병환과 사망, 등을 결론내립니다.
“집단화의 진정한 가능성은 농촌의 위기의 깊이나 정부의 행정적 열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존재하는 생산자원에 따라 주로 결정된다. 즉, 대규모 농업에 필요한 기계를 제공해주는 공업의 능력에 달린 문제이다.“
# 껍데기 사회주의
스탈린은 1922년에 공산당 서기로 집권하면서, 경제 5개년계획과 농업에 대한 강제집산화를 실시합니다. 강제정책에 의해 몇년 사이에 거의 100%의 농장이 집산화되었고 스탈린 정부가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했지만, 실상은 집산화의 진정한 목적인 생산력의 발달은 이루지 못한 껍데기 집산화에 불과했고, 응당 농민들은 집단농장에서 보다 개인의 텃밭에서 더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스탈린은 토지정책 외에도, 1936년에 스탈린 헌법을 제정할 때 까지 가족, 군대, 여성, 정치, 예술, 교육, 등 여러 분야의 정책들을 집행하였는데, 이 정책들의 일관된 특징은 ‘목적과 수단이 혼동된 껍데기 정책’ 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여성들을 가사에서 해방시킨다며 병원, 탁아소, 유치원, 학교, 공공식당, 공공세탁소, 보건소, 등을 확장했지만 공산당 관료들이나 스타하노프 운동원들만이 특권적으로 이용했고, 낙태를 금지했으며, 군대에 계급제도와 장군직위를 부활시켰으며, 사회주의가 이미 완성되었다면 정당 설립의 자유를 억압하고, 온갖 검열제도로 예술표현의 자유를 차단하였습니다.
그는 소비에트 공화국이 처해있는 이행기 체제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자연스럽게 사멸해가야 할 것들을 정책적 강제로 없애려 하였고, 이는 노동자 대중을 대상화시키고 강제를 집행해야할 관료기구를 비대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대중의 자발성이 최대한으로 발현되어야만 도달할 수 있는 사회주의로부터, 그는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던겁니다. 이미 사회주의를 이루었다는 공허한 선언만이 나돌았습니다.
체제화된 인자들로 재구성된 볼세비키당은 1933년 모스크바 재판으로 불리우는 피의 숙청, 스페인과 프랑스에서의 인민전선 전술, 1939년 파시스트 히틀러와의 불가침 조약, 그리고 마침내 ‘일국 사회주의론’을 주창하기에 이릅니다.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트로츠키는 소비에트 공화국에 개혁의 가능성은 사라졌다고 판단했습니다.
다시 한번 정치혁명을 통해 관료체제를 대체하지 못한다면, 자본주의로 복귀할 수 밖에 없다고 그는 얘기하고 있습니다.
# ‘퇴보한 노동자국가론‘ 과 ’국가자본주의론‘
많은 사람들의 오해와는 달리 혁명이란, 소수의 폭력으로 권력을 찬탈하는 것이 아닙니다. 혁명의 목적은 권력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주체를 바꾸는데에 있습니다. 그 주체가 없는 소수만의 폭력으로 이룩한 권력찬탈은 혁명도 아닐뿐더러, 지속되지도 못할테니까요. 사회주의자는 테러리즘에 반대합니다.
트로츠키의 <배반당한 혁명>은, 단지 소비에트 공화국의 체제를 분석하고 스탈린 관료체제를 비판하는 것을 넘어서, 사회주의 혁명 일반의 원칙과 법칙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사회주의자는 몇몇 지식인들이 그러하듯 공상적으로 개발된 사회모델을 끼워맞추려 애쓰지 않습니다. 사회주의자는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가져올 체제의 위기와 대중의 고통을 확신하기 때문에, 단지 이것을 예비하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실패도 성공도 미리 예측할 수 없는 것이겠죠.
초반에 말씀드렸던 것 처럼, 트로츠키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도 있습니다. 트로츠키는 소비에트 공화국을 이행기 체제에서 자본주의로 후퇴하고 있는 노동자국가로 바라보았지만, 이들은 스탈린 집권 이후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노동자국가와는 거리가 먼 국가자본주의로 바라봅니다.
이런 관점의 차이는,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이 러시아를 침공할 때 실천적인 차이를 드러냅니다.
실제, 트로츠키는 멕시코에서 암살당하기 직전에 코민테른을 대체할 제4인터내셔널을 창립하는데, 그의 사후에 정통 트로츠키주의를 자칭하는 사람들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을 방어해야 한다는 입장을 펼치기도 했어요.
저는 과연 이것이 제대로 된 트로츠키주의인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트로츠키는 소비에트 공화국과 여타 자본주의 국가를 동일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소비에트 공화국의 노동자들이 정치혁명을 이루어내지 못하면 완전한 자본주의로 퇴보할 것이라고 분석했으니까요.
그가 이러한 분석을 발표한 것은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10년전의 일입니다. 더구나, 북한에는 노동자들 스스로 세운 권력이 존재하지도 않았구요.
저는 앞으로 이 부분을 좀 더 파고들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