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나(soulgarden@hanmir.com)

한창 여름이 될라 치던 5월 중순께 소문이 흉흉했던 CB Mass가 전격 해체되고 최자 개코 체제의 다이나믹 듀오가 데뷔앨범을 냈다. 다이나믹 듀오의 1집 [Taxi Driver]는 브라운 아이드 소울의 도움으로 한결 입체적이고 세련된 어반이 되어 나타났기에, 앨범은 대박이 났고 그들은 성공적으로 데뷔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뒤를 이은 7월, 2003년 힙합씬에서 최고의 기대를 모았던 에픽 하이가 소포모어 앨범을 들고 나왔다. 게다가 별로 거칠어 보이지 않는 그들의 앨범이 네 곡을 제외한 모든 곡에서 심의의 제지를 받았고, 이러저러한 정황들은 다이나믹 듀오에 이어 에픽하이에 이르기까지 무브먼트 크루 에 대한 관심을 지속시켰다. 그리고 어느새 달려와 버린 8월, 무브먼트의 숨은 고수 바비김이 실로 오랜만에 솔로 앨범을 냈다. 이렇게 반가움과 더불어 질적으로도 포만감을 줬던 무브먼크 크루가 여름 내내 몰아치던 2004년, 정작 나온다던 드렁큰 타이거의 앨범은 예약 판매라는 딱지를 붙이고 꽤 오랜 동안을 대기하고 있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무브먼트의 깃발 드렁큰 타이거는 사실, 에픽 하이가 나오기도 전부터 5집에 관한 모든 준비를 마친 채 출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드렁큰 타이거는 DJ Shine이 거의 빠진 상태에서 앨범을 만들었고, 이런 와중에 기존과는 또 다른 변신을 꾀하기까지 하였다. 안그래도 무브먼트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이 유난히 집중되어 있는 요즘이 아니던가? 이 곳의 수장인 드렁큰 타이거는 (DJ Shine이 빠진 자리에) 패밀리를 대동하여, 이미 무브먼트라는 집단에 시선을 모으고 있는 팬들에게 새로운 분위기로 포효를 시작하였다. 한국말이 서툴긴 했지만 드렁큰 타이거의 랩실력은 데뷔할 때부터 유명했다. 그리고 무브먼트라는 일가를 이루면서 패밀리 안 밖으로 Tiger JK가 갖는 입지는 매우 견고했다. 그러던 그들이 어느덧 5집을 발표 했고, 한국판 갱스터 랩으로 카리스마를 풀풀 풍기던 그들은 매우 새삼스럽게도 한결 부드러워진 자태를 취하고 있었다.

인트로 스킷 없이 다짜고짜 시작되는 첫 곡의 제목은 '긴급상황'이다. '지금은 긴급상황/ 하던걸 중지해 지금 당장'이라는 다급한 훅을 먼저 날리는 이 곡은 비트 또한 매우 다급하다. 비트가 익숙한 듯 들리지만, '팀버랜드 견고하게 베끼기'가 어반(Urban) 음반에 있어 '고급스러움'의 잣대가 되고 있는 요즘의 시류와는 그다지 연관 있어 보이지 않는다. 트로트 멜로디를 전면에 깔아 놓은 '편의점'은 중간 중간 '투둑'하고 들어가는 드럼 프로그래밍이 마치 젓가락 장단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이 곡은 새벽에 편의점을 찾았다 그 곳의 아르바이트 여(女)를 한 눈에 사랑하게 된 (언뜻 듣기에) 별 볼일 없어 보이는 남자의 애심가(愛心歌)로, 심각한 상황을 코믹하게 만들어 삼류 분위기를 내는 것이 DJ DOC의 '허리케인 박'과 정서가 닮아 있다. 훅 부분에서 울먹이는 소리로 앵앵 거리는 것과 애절하기 짝이 없는 바이올린 소리는 '허리케인 박'에서 우스운 멜로디와 창법을 써 나름대로 심각한 멜로를 삼류로 만들었던 것처럼, 심각을 가장한 삼류 멜로를 우스워 지도록 만드는 결정적인 소스로 작용하였다.

파티 넘버의 '이 놈의 Shake It'은 바이올린과 기타, 베이스를 실제로 사용하여 각자 다른 높이에서 움직이는 현의 파장들을 서로 엇갈리도록 엮어 촘촘하고 특이한 그물을 만들었는데, 그에 반해 멜로디와 가사는 매우 단순하다. 귀에 확 꽂히는 멜로디, 끝에 가서 터트리는 야마, 그리고 가슴을 후비는 가사까지 사람들의 마음을 저미는 음악의 세가지 요소를 요구하는 매니저의 말에 그들은 전인권 컨셉의 오천원 송 '가수 지망생'으로 보답한다. 고작 오천원 인생의 절규가 그 세가지를 다 충족해 버리고 마니, 노래가 우스워서 내 인생이 우스워서 실소가 절로 나온다. 레게처럼 엇박으로 훵키하게 절며 가는 'Liquor Shot(술병의 숟가락)'은 이 모든 연주의 중심에 기타가 있으며 쉴 새 없이 빠른 그루브를 그린다. 연주는 단순하지만 타이거 JK의 멜로디 랩은 매우 다이나믹 하며 중간에 잠시 흐르는 스크래치나 탐바레스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난타, 그리고 어느 순간 삽입되는 아주 부드럽고 쌉쌀한 앤(Ann)의 보컬이 매우 정신 없이 어우러져, (짧지 않은 런닝 타임을 가졌음에도) 언제 끝나는 지도 모르게 흥겹다가 일순간 종료되어 버린다.

고집스러운 무브먼트 크루의 피처링이 다양한 가사를 엮은 '고집쟁이'는 곡의 진행에 있어서는 다른 곡들에 비해 조금 평이하지만, 클럽 공연에서 재미있는 연출이 가능하도록 짜여진 훅이 인상적이다. 'Once Upon A Time'은 이민 1.5세대인 타이거 JK의 힘들었던 어린시절 타향살이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지럽게 널려 있었던 미국에서의 게토 생활과 이를 떨쳐버리고 래퍼가 되기까지의 아픔이 있는 개인사를 자서전처럼 읊어나간다. 그리고 또 하나의 클럽 공연 절정 분위기용 노래인 '백만 인의 콘서트(노래방 Rap)'는 '고집쟁이'보다 훨씬 헐렁한 그루브를 그리며 놀새떼들의 한량기를 자극한다.

드렁큰 타이거가 가지고 있던 기존의 카리스마는 여전하지만 이번 앨범은 이전의 작품들과 확연하게 차이 진다. 랩도 랩이지만 사운드 메이킹에 보다 많은 치성을 들였으며 직설적이고 가오를 중시했던 랩 가사도 '비꼬는 투'로 다소 선회하는 모습을 보였다. 원래 가지고 있던 삐죽 삐죽하고 날카로운 원형은 보다 풍부하고 다양한 소리들로 가시와 가시 사이를 메웠는데, 가시와 가시 사이의 공간을 땜질한 그 물질들은 드렁큰 타이거라는 물질 본연의 것에서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해, 다른 물질에서 추출하여 붙인 것이 아니라 양 갈래로 갈려진 생채기사이에서 새살이 돋아 생채기를 없애듯 자신들이 가진 원재료가 불거져 나온 것이다. 그러면서도 불거져 나온 그것은 기존의 자신들이 보여주지 않았던 (자신들로선) 새로운 것들이어서, 멀찌감치 떨어져 봤을 땐 색깔이 동일하지 않아 얼룩 덜룩해 보인다. 특히 앨범 상단에 자리 잡은 트랙들은 사운드에 대한 아이디어나 짜임만으로도, 타이거 JK가 쌓아둔 내공이 많은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이번 앨범은 보다 대중적인 포즈를 취하면서도 그 대중성을 음악성이라는 내공으로 일구었기에 단순히 '랩 잘하는 형님'을 선을 넘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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