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 트로이카 - 1930년대 경성 거리를 누비던 그들이 되살아온다
안재성 지음 / 사회평론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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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로 복원된 조선시대 사회주의운동

요즘엔 꼭 소설책 한권은 곁에 두려고 합니다.
두꺼운 책들을 읽다보면 자칫 지루해지기도 하고, 사실적이고 분석적인 책들과는 사뭇 다른 멋을 지니고있는 것이 소설이잖아요.

제가 좋아하는 소설은 대부분 역사소설이나 대하소설인데,
소설을 읽으며 머리 속에 마음껏 그림을 그리는 일이 굉장히 재밌습니다.

이번에 단양에 다녀오는 길에도 소설책 한권을 읽었습니다.
저자인, 안재성씨의 이력은 말 그대로 386. 60년대 생에, 80년대에 대학에 입학했으나 광주민주화운동을 하면서 제적을 당했고, 이후에 노동운동에 투신했지만, 동구권 몰락과 함께 과거를 청산해버린.

요즘엔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가끔 글을 쓴다는 안재성씨의 책 <경성트로이카>는 1930년대 일제치하에서의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삶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청산해버린 과거의 사회주의운동을 우연한 계기로 다시 접하게됩니다. 경성트로이카의 유일한 생존자인 이효정 할머니를 만나게 된 것이죠.

구도와 내용 면에서는 손석춘씨가 쓴 <아름다운 집>과 굉장히 비슷합니다. <아름다운 집>이 혁명가 이진선의 일기를 바탕으로 한다면 <경성트로이카>는 이효정 할머니의 회고와 저자가 공부했던 김경일 교수의 <이재유 연구>를 바탕으로 하고 있을 뿐, 내용에 있어서는 조선시대 사회주의자들의 일대기를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어요.
(김경일 교수가 연구한 '이재유' 라는 사람은 <경성트로이카>의 주인공 격이기도 한데, 당시 경성지방 - 오늘날의 서울 - 노동운동 및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었던 혁명가입니다.)

# "허무한 일이요"

책을 읽으며, 내내 조정래 선생의 <태백산맥>이 떠올랐습니다. 대부분 일독하셨겠지만, <태백산맥>은 일제 말기의 빨치산 투쟁을 그리고 있죠.

시대적 맥락에 따른다면, <태백산맥>은 <경성트로이카>의 후반부에 붙일 수 있을겁니다. <경성트로이카>에서 경성을 비롯한 조선, 만주, 중국 곳곳을 넘나들며 일본의 지배에 맞서 싸웠던 사회주의자들은, 그들이 꿈에 그리던 해방된 조선에서 일본군이 아닌 한국정부와 북한정부에 의해 스러지게됩니다.

"일정 때 우리가 놈들의 힘을 빼앗으려고 싸우는 동안 당신들은 자신들의 힘을 키웠소. 우리가 학업과 생업을 포기하고 공장과 감옥을 떠도는 동안 당신들은 국가를 운영할 기술을 배우고 사람 고용할 돈을 모았소. 일제가 물러나고 보니 우리 같은 사람은 쓸모가 없고 당신 같은 사람들이 이 나라를 지배하는구려. 참 허무한 일이요. 허무한 일이요"

마지막으로 체포된 혁명가 김삼룡이 자신을 심문하는 경찰관에게 던진 말입니다.
과거 자신의 운동을 스스로 청산해버리고 홀홀히 농사꾼으로 살아가는 안재성씨가 굳이 조선시대 사회주의 운동을 복원한 소설을 써낸 이유가, 김삼룡의 한마디에 담겨있습니다.

일제시대의 사회주의는, 민족주의와 더불어 일본의 지배에 맞서 싸우는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합니다.
이 두 세력은 일본제국주의라는 적을 상대로 하나로 뭉치게되는데, 그것이 바로 '신간회'입니다. 그런데, 신간회는 광주학생운동 - 직접적인 계기는, 일본인 학생이 조선 여고생을 희롱하면서 생김 - 을 기점으로 다시 나뉘게됩니다.
항일시위는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이 두 세력의 본질적인 차이를 드러내게 하는데, 먼 장래를 위해 당장의 싸움을 자제하고 힘을 기르자는 주장과, 당면한 싸움을 전면화해야한다는 주장이 다시금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을 가르게됩니다.

물론, <경성트로이카>는 당시 사회주의자들의 활약상을 주로 그리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공장으로 들어가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파업이라는 무기를 통해서 항일시위를 벌였으며, 일년이 멀다하고 일본군에 의해 체포와 고문을 당해야했던 조선시대 사회주의자들.
책중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체포'일 정도로, 이들은 헌신적으로 싸웠고, 그만큼의 견제와 억압을 받은 것이죠.

# 스러진 천덕꾸러기들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활동을 계속하던 이들이 해방을 맞은 것은 1945년 8월 15일.
이들은 꿈에 그리던 합법적인 공간에서, 공개적으로 '조선인민공화국'과 '조선공산당'을 수립하게 됩니다. 오늘날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일제 치하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사회주의자들은 대중적인 신뢰를 받고 있었고, 조선공산당은 불과 몇 달 만에 수만명의 당원을 확보할 정도로 세가 불어나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좌초되는 것은 그 해 12월의 신탁통치.
미국과 소련은 모스크바 삼상회의를 통해서 신탁통치를 결정하게 되는데, 조선공산당은 이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반대하고도 찬성으로 입장을 선회, 곧 급추락하게 됩니다.
유일한 견제세력이던 사회주의 세력의 추락은, 미군정과 친일파, 우익들의 활동 영역을 넓혀주었고, 그토록 해방을 기다렸던 사회주의자들은 해방된지 일년 만에 다시 불법화됩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회주의자들은 다시 일제시대처럼 지하활동을 시작하거나, 월북하게되죠.

하지만, 박헌영을 비롯해 이천여명에 가까운 남로당 출신 월북 사회주의자들은, 소련 공산당을 비롯해 북한 공산당에 의해 견제를 받았으며, 한국전쟁을 거치며 대부분 숙청되는 운명에 처합니다.
남쪽에 남아서 지하활동을 하던 이들, 즉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빨치산들의 운명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북한정부와 남한정부가 벌이는 휴전협상 아래, 그(녀)들은 천덕꾸러기 처럼 소탕의 대상이 되고 만 것입니다.

# 이질감

이질감입니다. 본문 내내 등장하는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의 처절하고 헌신적인 투쟁과, 그(녀)들이 바라마지 않았던 해방 이후의 허무한 몰락의 과정은 이질적입니다.

물론, 이질감은 몸뚱이의 죽음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월북한 남한 사회주의자들은 가장 기본적인 자유조차 보장하지 않는 북의 현실에 너나 할 것 없이 고개를 돌렸고, 고개를 돌리지 않은 자는 현실을 왜곡했습니다. 몸뚱이의 죽음보다 더욱 처절한 것은, 정신의 죽음이었죠.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의 반공주의의 늪에 깊숙히 빠져들었던 남한사회에서 이 이질감은 논의될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은, 과거의 상흔을 잊은 채 깊이 가라앉았어요.

하지만, 한번 깊이 가라앉아버린 이질감은, 반공주의가 어느정도 사라진 후에도 다시 떠오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국가들의 몰락을 지켜보며 무릎을 꿇었을 저자 안재성씨 역시, 이 이질감을 극복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는 겁을 내는 어린아이처럼, 보고싶은 과거만을 회상하고 복원할 뿐입니다. 그래서, 그가 복원한 사회주의는 두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 이질감의 원인, 코민테른

두개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는 우리에게 아무 것도 가르켜주지 못할 것입니다.
안재성씨와 이효정 할머니가 아무리 애를 써서 과거를 복원한다 한들, 복원된 사회주의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 의의는 허공에 흩어질 테니까요.

사회주의의 얼굴을 찾아야 합니다.

극중 일면에서 단초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극중 국제선과 국내선과의 갈등이 그것입니다.

주인공 이재유가 결성한 '경성트로이카' 조직과 같이 경성지역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하던 사회주의자 권영태 그룹. 이 두 그룹은 경성지역 사회주의운동을 위해 통합하려고 하나 갈등하게 되죠. 권영태 그룹은 코민테른(제3인터내셔널 - 세계 공산당의 연합조직 - 의 별칭)의 지시를 받는 국제선 조직이었고, 이재유 그룹인 '경성트로이카'는 자생적인 국내선 조직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많은 사회주의자들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에 유학갔다가 돌아온 후 신문사나 잡지사에 취직하는 등의 비슷한 경력을 쌓고 있었다. 현장의 대중 조직 건설 보다는 국제선과 연결되어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려 한다는 점에서도 같았다. 이재유는 이들 지식인 출신 사회주의자들을 신용하지 않았다. 그는 조선공산당이 노동자와 농민 출신 중심으로 재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국제선과 국내선이 얼마나 현장에 기반을 가지고 있느냐를 떠나서,
소련 공산당을 위시로 한 스탈린의 코민테른이라는 조직이 얼마나 지령적이고 일방적인 지도체계를 유지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코민테른의 경직성은 <태백산맥>에서도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이 당시 남한 뿐 아니라 북한의 사회주의 운동에서 코민테른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죠.

사회주의 운동 자체가 코민테른으로 등치되는 그 순간, 사회주의는 정신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조선공산당이 반탁에서 찬탁으로 입장을 급선회 한 것 역시 코민테른의 지시였는데, 민중의 요구보다 코민테른의 지시를 지령적으로 수용했던 박헌영 선생은 되려 북한에서 미국의 간첩으로 몰려 숙청을 당하게 됩니다. 이미 코민테른은, 세계의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어 갈 조직이 아니라,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여타 연합국과 한반도 나눠먹기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 온전한 얼굴, 그리고 살아있는 운동

코민테른의 발자취에 대해서는 따로 공부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주의 운동 뿐만 아니라 모든 운동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것이죠.
사회주의 국가를 모델화 시켜 소련이나 북한으로 규정하고, 사회주의 운동을 코민테른 운동과 등치시키는 순간, 그 운동은 죽게되고 정체하게 될 것입니다.

동구권이 몰락하고 많은 운동권들이 운동을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그(녀)들중 누구도 동구권의 권력구조, 산업구조, 소련공산당과 코민테른의 오류에 대해서 돌아볼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그(녀)들의 운동이 죽어있고 굳어있는 무엇이었다는 것은 아닐까요. 동구권이 몰락했다 한들 한국의 상황은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는데, 무엇이 그(녀)들을 떠나게 만든 것입니까.
그(녀)들에게, 저자인 안재성씨에게 운동이란 무엇이었을까요.

실제, 유럽에서는 1930년대, 즉 레닌이 죽고 스탈린이 본격적으로 집권을 하던 즈음부터, 소련이라는 사회주의 국가의 정체성에 대해서 문제제기 하였고,
동구권 몰락 이후에도, 적어도 사회주의 운동의 '주체'들은 큰 타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사회주의 이념이 권력을 잡기 전인 일제시대에 자기희생적인 삶을 살다 죽어 간 혁명가들의 생애를 복구하는 일은 의미가 있지만, 사회주의자들의 긍정적인 모습만을 부각시킴으로써 그 이념이 가진 근원적인 문제를 가려 버리는, 내 스스로 원치 않는 역할을 떠맡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 저자 서문에서

극구 서문에서 자신은 사회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가며 조심스러움을 내비치는 안재성씨,
그가 이효정 할머니와 복원해낸 조선시대 사회주의 운동의 얼굴은 단지 반쪽이 아닙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 조선시대 사회주의 운동의 온전한 얼굴일 뿐입니다.

애써 반쪽을 만들고저 하는 저자의 서문과, 책 말미의 처참한 죽음들이 이질감을 주는건 그 때문일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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