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믿음에 대한 몇 가지 철학적 반성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22
이태하 지음 / 책세상 / 200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 종교인과 비종교인, 그 갈등의 실마리를 찾아

책을 지은 이태하 교수는 철학을 하시는 분입니다. 서경대에서 강의를 하고 계시다는군요.
<종교적 믿음에 대한 몇 가지 철학적 반성> 이라는 제목에 섞인 '반성'이라는 단어가 암시하지만, 이 교수 께서는 종교인과 비종교인 사이의 갈등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이 책을 집필했다고 해요.

제작년이었나요, 오랜 기독교 신자이셨던 아버지께서 돌연 교파를 옮기는 일이 있었습니다.
아시겠지만, 현재 우리 나라에는 크게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순복음교회, 성공회 등등 여러 교파가 있고, 또 그 교파 내에서도 다양한 교단으로 쪼개져 있죠. 거대 교파인 장로교에서 생소한 대한예수교침례회로 적을 옮기신 것입니다.

집안에 갈등이 굉장히 많았고, 그 갈등을 풀어가는 중에 저는 대한예수교침례회의 수련회까지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 평행선

고등학교 이후로, 그러니까 소위 머리가 큰 이후로, 저와 '신앙'은 줄곧 평행선을 이뤄왔습니다. 응당 아버지를 쉬이 이해하기 힘들었죠.
수련회는 그 평행선의 접점을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실, 교파를 옮긴 이후에 신앙'생활'이 달라진 아버지가 제게 실마리를 제시한 덕도 있었구요.
이 교수 역시도 평행선에 주목합니다.

각각의 평행선을 '종교'와 '과학'이라고 이름 붙여도 될런지요.
실제, 개신교인들이 제공하는 불신감이란, 대략 그(녀)들의 '배타성'에 기인하다고들 해요.

하지만, '개신교인들의 배타성이 문제다' 라고 쉬이 결론 내리기엔 다소 미심쩍은 부분이 있습니다.

이는 분명, 배타하는 주체와 배타당하는 객체 사이의 불균등한 세력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으니까요.
개신교인들은 분명 한국사회에서도 엄청난 세력을 이루고 있는 배타하는 주체인 셈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배타당하는 객체일겁니다.

세력관계를 차치하고 본다면, 배타당하는 객체 역시도 배타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사실, 배타성이란, 토론이나 설득의 과정 없이 이루어지는 물리적인 행동이 빚는 폭력성을 뜻하는 것일 테니까요.

그 점에서 이 교수의 이 책, 분명 읽어볼 가치가 있을겁니다.

# '상보성'을 아시나요?

이 교수의 전공인 '종교철학'은, 메타학문입니다. 학문을 연구하는 학문이에요.
종교철학의 연구대상인 학문이란, 다름 아닌 신학이구요.

따라서, 아쉽게도, 이 책의 결론이 명쾌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 즈음은 적지 않이 예상할 수 있습니다.
계속 평행선의 비유를 들자면, 종교철학은 평행선의 접점을 찾기 보다는, 평행선의 거리를 좁힐 따름입니다. 종교철학자는, 종교의 전제조건이 되는 세계관, 즉 신학의 일관성 내지는 정합성만을 검토할 테니까요.

그는 과학과 종교의 '상보성'을 얘기합니다.
만약, 과학과 종교라는 평행선을 만나게 하려고 했다면 '상호보완성'이라고 하겠지만, 만나지 않는 평행선이니 '상보성'이 옳은 표현일겁니다.

상보성은 접점 보다는, 두 평행선이 향하는 방향에 더욱 주목합니다.
각각의 평행선은 각각의 역할을 하며, 같은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이죠. 같은 방향이란, 다름 아닌 '삶의 문제의식' 이구요.

교수는 자살사건을 예로 들었으나, 전 연애담을 예로 들께요.

갑동이와 병순이가 서로 헤어졌다면,
'삶의 문제의식'은, 두 사람의 슬픈 마음이요,
'과학의 역할'은, 두 사람의 행적을 좇는 것이고,
'종교의 역할'은, 행적의 바탕이 된 이유를 밝히는 것입니다.

병순이와의 헤어짐이 너무 슬프다며 찾아온 갑동이에게,
절친한 친구인 을동이는, 그간 있었던 '사실'을 들음과 동시에, '사실'에 내재된 두 사람의 속내를 곰곰히 생각해 볼테니까요.
삶의 문제의식을 해결하는데에는, 사실 만으로는 몹시 부족하다는겁니다.

# 주연은 내어줄지언정

오늘날의 철학은 과학에게 꽤나 자리를 내어주었습니다.
철학계의 동향은 전연 모르니, 철학자 탁석산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나라에서 철학자가 현실 문제에 의견을 제시하는 사례는 생명 공학과 관련한 윤리 문제가 거의 다가 아닌가' 라고 할 수 있을런지요.

그의 논평처럼, 철학은 과학에 주연을 내어줄지언정, 연극판 밖으로 쫓겨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밤하늘의 수많은 십자가들이 이를 보여준다면 섣부른 판단일런지요.

그렇다면, 문제는 오히려, 평행선의 접점을 만들고 심지어 하나로 만드려 하는 억지 노력에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접점에 서있는 두 평행선의 이름은 '철학적인 과학'과 '과학적인 철학'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 상보적 노력의 밖에는

이쯤되면, 수련회를 다녀온 후의 복잡한 감정의 실타래가 조금 풀리는 듯 합니다.

대한예수교침례회의 비판 자체는 충분히 긍정적인 것이었습니다.  - 물론, 이곳 역시도 '오대양사건'으로 대표되는 많은 말썽(?)을 일으켰고, 많은 의혹이 있지만 - 그것은 기존 개신교 우파 내지는 다수파를 이루는 교파들의 옳지 못한 행적들에 대한 비판에 근거하는데, 재정 마련을 위한 수단이 되어버린 금전거출이라든지, 세력 확장을 위한 무리한 사업 집행들을 도마에 올립니다.

하지만, 그(녀)들의 통쾌한 비판의 이면에는, 바로 '과학적인 철학' 이 있습니다.

그(녀)들은 창조과학회(http://www.kacr.or.kr)라는 학회의 부흥을 기반으로, 성경의 기적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요,
이는 과학과 철학의 상보성에 어긋나는 셈이에요.

창조과학회의 과학적 논거에 대해서는 과학자들이 판단할 일이겠지만,
그(녀)들의 이런 노력이란, 과학의 힘을 빌어 철학을 설득하려는 '과학적인 철학'에 주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죠.

물론,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과학적인 철학이든 그냥 철학이든,
그(녀)들의 이런 노력이 인간의 실존적인 물음에 대해서 자꾸 현실 도피적으로 흐르게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던, 마르크스의 명제는 이곳에 자리하는 것이 아닐런지요.

그(녀)들은 아슬아슬한 자동차 경주의 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어요.
자신의 실력으로 관객에게 속도감을 선사하지 못하고, 경쟁 선수를 위압하려 지나치게 옆에 붙었다가 불의의 사고로 치닫는 안타까운 장면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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