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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민주주의가 오고 있다 ㅣ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5
박동진 지음 / 책세상 / 200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 정보적 신화
익히 들어온 '정보화 사회' 선언.
우리가 살아갈 사회를, 새로이 부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환상을 심어주기에 적절한 것이었습니다.
기존 사회에 대한 실망과 갈등, 그리고 새 사회에 대한 갈망이 어우러져, 우리 사회의 변화에 대해서 미처 충분히 살펴보지 못한 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보화 사회'를 받아들였는지도 모릅니다.
<전자민주주의가 오고있다>의 저자 박동진 교수는, 이를 두고 '정보적 신화' 라 이르고 있습니다.
정치에서는 인터넷의 보급과 전자투표의 활성화를 두고 직접민주주의의 시대를,
일상생활에서도 유비쿼터스 컴퓨팅과 같은 가전기기의 네트워크화를 두고 생활의 편리함을,
전사회적으로 정보화 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데 여념이 없습니다.
그의 신화 부수기가 자못 기대되지 않습니까.
그가 주목하는 부분은 전자투표의 활성화를 두고 일컬어지는 직접민주주의, 혹은 전자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입니다.
전자투표를 통한 용이한 정치에의 참여가 민주주의를 - 기존의 대의제 민주주의를 - 활성화시킬 것이라는 주장, 심지어 참여의 활성화를 떠나서 대의제 민주주의를 극복한 직접민주주의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그는 이제 기술과 정치의 만남을 지켜봅니다.
# 정치와 경마
" 정치가 전문화되는 순간부터 데모스는 자신들의 모든 삶을 정치게임에 내맡기게 되며, 이때 민주주의는 사라진다. " (27쪽)
기술에 의해 자극받아야 할 만큼, 대의제 민주주의는 못난 것이었나 봅니다.
민주주의 본연의 형태인 직접민주주의를 두고, 통제 불가능한 대표에 의해서 수행되는 오늘날의 간접민주주의를 변호하는 논리는 효율성이었습니다.
고대 도시공동체와 비교할 수 없이 커져버린 국가규모에서 당시의 광장문화를 재현하기란 좀처럼 힘들다는 것이죠.
이 효율성의 논리란 여간 드센 것이 아니어서,
과거의 군사정권이나 체육관 선거와 같은 대통령 간선제는 폐지되었어도, 오늘날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아니, 이제 이 효율성의 논리는 누군가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닌, 스스로가 명명백백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정치의 주체가 되는 것이 민주주일텐데,
'정치인'이라는 직함이 보여주듯이, 정치는 전문가(?)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 되어버렸고,
민중은, 데모스(Demos)는, 마치 경마나 경륜을 하듯 자신의 삶을 정치게임에 내맡긴 채,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배팅을 제외하고는 그저 게임의 결과에 대해서만 왈가왈부할 따름입니다.
게임의 결과인 물질적 이득에만 관심이 있을 뿐인 이들이, 게임 자체를 즐길리 만무합니다.
# 게임의 성격
" 전자민주주의의 새로운 한 축은 체제 유지를 위한 절차적 측면의 보수적 논리로 기능해온 자유주의적인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
" 직접민주주의라는 이상화되고 신화화된 이념을 제출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본원적 의미를 복구하는 논술을 제기해야 하는 것이다. (중략) 다시 말해 권력은 데모스로부터 나온다는 수사가 아니라, 데모스가 권력을 수행하는 것을 상징하는 비관적 저항적 실천적 논술로 직접민주주의를 전망하는 전자민주주의를 요구해야 한다."
오늘날 정치게임 경마장은 한산하기 그지 없습니다.
'인생역전'이라는 게임의 결과에 기대가 되지 않는 바는 아니나, 가산을 탕진하는데 매우 적합하다는 혹평을 들으며 불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죠.
마사회 측에서는 새로운 기술을 도입해,
게임의 결과가 조작이나 우연이 아니라, 게이머의 철저한 분석에 따라 결정된다고 대대적인 홍보를 하였습니다.
다시 '인생역전'의 저울에 무게가 실리는 순간임에 틀림없습니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박동진 교수는 전자투표와 같은 기술의 발달이, 기존의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민중의 참여를 독려하는 역할에 그친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경마에서 승부를 결정짓는 수많은 조건들, 이를테면 말의 건강상태나 컨디션, 기수의 능력, 등등을 좀 더 세부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기술적 진보가 이루어졌다한들,
그것은 배팅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경마인 것입니다. 기술의 발전이 게임의 성격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이죠.
굳이 게임에 비유하자면,
'민주주의 정치'란, 자신이 게임의 주인공이 되어야하는 일종의 '아케이드 게임' 일텐데,
이미 오늘날 정치게임의 성격은 그것과 다르며, 전자투표라는 기술의 발달로 이 게임의 성격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박동진 교수는 직접민주주의 논쟁에 앞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를 질문하며 멀리 돌아갑니다.
그는 '자유민주주의'로 부터 시작합니다. 그것은 게임의 성격을 규명하는 중요한 과정이었습니다.
# 기술과 게임의 성격
" 하나의 새로운 정치적 절차를 제도화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투쟁이 필요하다. "
기술 자체는 중립적입니다.
그것은 게임의 성격과는 별개로 작용해요. 그것은 경마를 더욱 경마답게 할 수도 있고, 아케이드 게임을 좀 더 아케이드답게 할 수도 있으니까요.
따라서, 경마나 경륜에 비유할 만한 오늘날의 정치게임을 아케이드 적으로 만드는 것은,
기술을 통해서 이루어 지지 않을 것입니다. 기술은, 정치게임의 성격을 변화시킬 정치적인 투쟁에 이용될 성질의 것입니다.
기술 자체의 중립성이라는 맥락에서, 박동진 교수는 세가지 가설을 제시합니다.
기술이 어떻게 사용되는냐에 따라, 오늘날의 정보화 사회는 조지 오웰의 <1984년>에 그려진 바와 같이 소수의 권력층이 모든 정보를 독점하고 민중을 감시하는 '정보독재사회'가 될 수도 있고, 오늘날 일반적인 경향으로 드러나는 것 처럼, 대의제 민주주의에의 참여를 보완하는 것에 그치는 '정보민주주의 사회'가 될 수도 있고, 그가 지향하는 직접민주주의 사회로 나아갈 수도 있다고 말이죠.
그의 결론은 자못 실천적입니다.
" 비민주적인 전자감시 사회의 가능성을 입증하는 것보다는 민주적 전자감시의 허구성을 파헤치기 위한 저항적 논술이 더 민주적인 논술이 된다. "
기술의 발달에 대한 환상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실천적인 접근방식 - 정치적 투쟁 - 이 필요하다는 것인데요,
그것은 '정보매체의 민주화' 내지는 '협의민주주의'에 잘 배어있습니다.
# 협의민주주의가 말하는 민주주의의 정신
'정보매체의 민주화'에 대해서는, 적은 분량이나마 다소 비중있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과거 NEIS나 전자주민카드, 전자지문데이터베이스 논쟁과 같이, 분권화로 익히 선전되어온 네트워크가 실제로는 행정권력에 의한 개인정보의 초집중화를 가져오는데 대한 문제제기입니다.
하지만, 이는 유비쿼터스 컴퓨팅과 연계할 때 좀 더 풍성하게 얘기할 수 있으니, 홍성욱 교수의 <파놉티콘 - 정보사회 정보감옥> 독서후기에서 좀 더 다루도록 하고, '협의민주주의'에 대해서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 참여의 증대가 현대 정치 문제의 해결을 위한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정치적 진실은 시민 토론에서 나오는 것이지 아이디어의 경쟁에서 나오지 않는다. 민주적 참여의 주요 수단은 양이 아니라 질이다. " 라는 것이 제가 받아들인 협의민주주의의 정신입니다.
협의민주주의는 '어떻게 논쟁을 결론지을 것이냐'에 대한 대답을 제시하지 않고 있으니 만큼, 그 자체로는 완결된 논리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협의민주주의의 약점이라기 보다는, 간접ㆍ직접 민주주의에서 간과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중요한 성격을 지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유주의 세력들이 전자투표와 같은 기술적 발달을 두고 직접민주주의를 논할 수 있는 바탕에는,
참여의 증대를 통해서 직접민주주의에 도달할 수 있다는 오해가 바탕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직접민주주의까지 끼어들어, 민주주의의 자식들이 서로 정통성을 논쟁합니다.
하지만, 협의민주주의는 점잖게 타이릅니다. 간접이든 직접이든 너희들 중 누가 대를 이어받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정신, 구성원 각자가 정치의 독립적이고 평등한 주체가 되는 것, 이 중요한 것이 아니겠냐고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