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72
하승우 지음 / 책세상 / 200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 추상적인 개념의 구체적인 맥락 이해하기

몇일 전에 읽었던 <한국 자유주의의 기원>에서, 저자인 이나미씨는 자유주의의 기원을 찾아 <독립신문>까지 거슬러 올라가요.
하승우씨 역시도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에서, 똘레랑스의 기원을 찾아 저 멀리 그리스 아테네까지 거슬러 올라가죠.

하나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오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일은 몹시 고된 일이지만,
그는 독자를 배려해 이렇게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 추상 개념에는 그 개념이 만들어진, 또는 그것이 두드러졌던 특수하고 구체적인 맥락이 담겨 있는데, 시간이 흘러 그 맥락이 사라지면서 개념은 벽에 걸린 박제로 변하기도 한다. 특히, 그런 추상 개념이 정의나 질서, 도덕과 관련된 윤리적인 개념이라면 이는 위험스러운 일이다. 구체적인 삶과 분리된 윤리적인 개념은 인간의 삶을 억압하고 때로는 피를 부르기도 하기 때문이다. (중략) 윤리적인 개념에 속하는 똘레랑스 역시 이런 위험을 안고있다. 따라서, 그 위험을 피하려면 똘레랑스라는 개념이 등장한 구체적인 맥락을 잘 살펴야 한다. "

저 역시, 전에 책마을에 독서후기를 올리면서, '똘레랑스'를 '관용'으로 풀이했다가 비판을 받은 적이 있어요. 저 역시, 홍세화씨의 책을 보면서 알게 된 '똘레랑스' 라는 개념을 쉬이 차용하는 우를 범한 셈인데, 이번에 읽은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는 그때의 비판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답니다.


# 관용과 똘레랑스

제가 실수했던, 관용과 똘레랑스의 차이에서 부터 얘기를 시작해볼께요.
관용은 똘레랑스 보다 미국의 탈러런스(tolerance)에 가깝다고 해요. 미국의 탈러런스는 1649년 아메리카에 정착한 청교도들이 발표한 '탈러런스 조례' 에서 처음 나타난 것인데요, 그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 미국에서 탈러런스는 차이를 드러내고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는 것을 가리킨다. (중략) 탈러런스는 갈등하는 이익을 조절하는 '도구'이지 공공 선이나 정의를 위해 사회를 다시 짜는 '원리'가 아니다. (중략) 똘레랑스는 갈등하는 이익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위해 서로 연대하는 것이다. "

관용과 똘레랑스는 갈등을 바라보는 관점이 사뭇 다른 것 같아요.

관용은 서로의 이익을 적당한 선에서 조절함으로써, 갈등에 대해 부정적이거나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반면,
똘레랑스는 서로의 입장차이를 명확히 하는 이성적인 토론을 중시하니 만큼, 갈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할 수 있을겁니다.

그러고보면, 우리는 '좋은게 좋은 것' 이라며, 갈등에 대해 참 인색하지는 않은지요.
매번 조정되고 봉합되는 갈등이란, 어느새 안에서 곪고있을지도 모르잖아요.


# 똘레랑스의 역설

'똘레랑스의 역설' 이라는 말도 있어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토론을 강조하는 똘레랑스지만,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앵똘레랑스에게 마저 똘레랑스 할 경우엔, 똘레랑스의 취지 자체가 무색해짐을 뜻합니다.

'앵똘레랑스엔 앵똘레랑스로' 라는 똘레랑스의 기치는, 이러한 역설을 피하기 위해서 나온 것입니다.

똘레랑스도 앵똘레랑스 할 수 있다는 것은, 똘레랑스가 가능하기 위한 전제조건을 뜻합니다.
전제조건이란, 다름아닌 두 주체간의 권력이 평등해야 한다는 것이죠. 평등하지 않은 두 주체간의 똘레랑스란, 결국 권력의 우위를 점하고 있는 쪽의 손을 들어주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겁니다.

'앵똘레랑스엔 앵똘레랑스로' 역시도, 타협이나 관용과는 다른, 똘레랑스의 적극적 의미를 나타내는 것 같아요.


# 차별하는 똘레랑스

아무리 똘레랑스의 개념이나 기준을 명확히 한들, 현실에서 똘레랑스를 두고 일어나는 설전을 막을 수는 없을겁니다.
어차피 똘레랑스란, 인간의 완전함을 부정하는 개념이니 만큼, 그것이 어떤 보편적인 기준이 되기는 힘들겠죠. 하나의 태도 내지는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을 듯 합니다.

그런 점에서, 그가 '똘레랑스와 접붙이기' 에 기꺼이 한 단락을 할애한 것은 꽤나 적절해보입니다.
그는 이 장에서, 홍세화씨의 실험 - 그는 입국제한이 풀린 후 한국에서 활동하면서, 한겨레 신문에 토론코너를 진행하고 있어요. - 에 대해 평하기도 하고, 시민간의 접촉을 보장하는 공간, 자율성과 연대감을 기르는 자치운동, 무엇보다도 똘레랑스의 역설을 비껴갈 수 있는 불평등의 조건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어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노력들이겠지만, 저 역시 후자에 좀 더 힘을 실어주고 싶어요.
불평등이란 똘레랑스가 가지는 약점이기도 하고, 동시에 똘레랑스를 실현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되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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