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자유주의의 기원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53
이나미 지음 / 책세상 / 200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 어른들은 문희준을 보고 웃지 않는다.

미국의 지성이라 불리우는 노엄 촘스키 교수의 잘 알려지지 않은 경력은, 그가 꽤나 업적있는 언어학자라는 사실입니다.
전에 어느 책에서, 노엄 촘스키 교수의 집필 내지는 활동과 그의 경력인 언어학자와의 필연성을 평한 것을 봤는데, 논리적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상당히 흥미로웠던 기억이 납니다.

구조주의나 언어학자들이 이룬 성과에 대해서 잘은 모릅니다만,
'언어'나 '개념'이 우리의 사고를 제약하고, 우리의 대화를 가로막는 것 즈음은 수긍할 만 합니다.

가수 문희준씨에 얽힌 일화들을 모르는 어른들은,
'무뇌중' 이나 '뷁' 이란 이상스런 단어에 낄낄거리며 웃기는 커녕, 고개를 갸우뚱 할겁니다.

그에 얽힌 '일화'들이란,
다름아닌, '언어나 개념의 사회적 맥락' 이라고 폼나게 말 할 수도 있겠죠.

# 자유주의를 보고 웃지 않는다?

한국 자유주의의 기원을 개화시기의 <독립신문>으로 보는 이나미씨는,
방대한 양이었을 당시 발행부들을 들추어보며 자유주의의 개념을 찾아갑니다.

그녀의 책을 읽는 독자는, 고개를 갸우뚱 하는 어른과도 같습니다.
갸우뚱 했다기에 뭐 좀 재밌는 표현이겠거니 했는데, 알고보니 늘상 사용하는 '자유' 라는 단어.
아니, '자유' 도 논쟁의 대상이란 말인가요? 우리는 이미 갸우뚱 하는 군인입니다.

그녀가 책의 말미에 한토막 소개하는 몇해전 자유주의 논쟁을 둘러보면,
'갸우뚱 할 만 하다' 는 것을 알게됩니다. 이 논쟁에는 꽤나 알려진 선수들이 등장합니다. 소설가 복거일씨, 공병호연구소 공병호 소장,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시사평론가 유시민씨, 한국일보와 어디 신문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는 칼럼니스트 고종석씨와 진중권씨.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떠나, 소위 선수들인데. 그들이 모여 하필이면 '자유주의'에 대해서 논하다니, 갸우뚱 할 만 한가요?

더 재밌는 사실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로 박정희 대통령을 무대 위로 끌어올린 자칭 자유주의자 복거일씨는, "민주주의의 위협을 줄이는 것이 자유주의자의 몫이다" 라 했고, 공병호 소장은 "대중민주주의 아래에서 폭력의 뿌리는 유권자 대중이다" 라고 했으며, 진중권씨는 이 두사람과 고종석씨를 비교해 가짜 자유주의자와 진짜 자유주의자를 얘기했답니다.

아 자유민주주의자들은 어찌 하란 말인가.

# 민주주의는 옵션이다?

뭐 이미 뱉은 말이니, 복거일씨와 공병호 소장은 자유민주주의자임에 앞서, 자유주의자 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들에게 민주주의란,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일종의 옵션(option) 과도 같아요. '민주적인 자유'는 없을 수 있어도, '자유' 만큼은 없어서는 안되는거죠.

감히 민주주의가 옵션이라니.
놀라는 분들은 십중팔구(十中八九) '자유'와 '민주' 모두가 보편타당한 가치라고 생각하는, 소위 '자유민주주의자' 일겁니다.

자 여기까지 따라온 분들 중,
되돌아가려는 분이 있다면, "민주주의가 어떻게 옵션일 수 있어?" 라고 반문 내지는 비판할 것이요,
그들의 얘기를 끝까지 경청할 분들은, 필연적으로 "그럼, 너희가 말하는 '자유'는 뭔데?" 를 질문하게 될겁니다.

전자는, 후자처럼 새삼스래 자유의 개념을 묻지는 않겠지만,
이미 그는 개념을 전제하고 있는겁니다. '자유'란 '민주'와 공존 가능한 보편적인 가치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 <독립신문>에 대한 상이한 평가

따라서, 전자와 후자의 논쟁은,
'자유'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을겁니다.

<한국 자유주의의 기원>의 저자 이나미씨는,
그 질문의 답을 개화시기 <독립신문>에 던지고 있습니다.

그녀는 <독립신문>이 역사에서 덜 중요하게 평가받는 것을 비판하며,
<독립신문>이야 말로, 한국에서 유교 이후에 자유주의를 처음 도입한 언론매체라고 합니다.

인용하자면, 한국에서 개화사상이 시작된 것은, 박규수가 신미양요를 겪고 1872년에 중국을 다녀온 뒤에 김옥균 등을 지도하면서 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서재필과 윤치호가 갑신정변 이후 미국으로 망명하였다가 귀국해서 발행하기 시작한 것이 <독립신문>입니다.
사회 교과서에 익히 출제되었을 법한 내용이군요. 허허

<독립신문>은 최초의 민간신문이자, 최초의 한글신문이고, 국문역사상 최초의 띄어쓰기가 시도된,
여튼 '최초' 신문이고, 대중적인 영향력 또한 막강했습니다. 최대 3천부까지 발행되었는데, 당시 신문을 돌려가며 읽었던 것 까지 고려하면 충분히 대중적이라고 할 수 있겠죠.

흥미로운 사실은,
<독립신문>에 대한 학계의 평가가 서로 모순된다는 점입니다.

이들의 개화운동이 민주주의와 자주독립을 주장함으로써 민중 계몽과 한국 사회의 발전을 가져왔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이들은 사실 친일적, 반민중적, 반민족적이었다는 부정적인 평가입니다.

이나미씨는, 서로 대립적인 견해의 판 자체를 깹니다. 기준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거에요.
<독립신문>의 사상을 민족주의 내지는 민주주의와 관련해서 판단하면 분명 모순적인 요소가 존재한다는겁니다. 하지만, 자유주의 관련해서 판단하면, 독립신문의 모순적 요소 - 즉, 민족과 백성을 위하는 내용과 외세 의존적이고 민중 불신적인 내용의 공존 - 를 설명할 수 있다는겁니다.

이나미씨는 저 위 단락에서 말씀드린 바에 따라 구분하자면, 후자이군요.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의 원칙에 따르자면, 수용되기도 하고 배제되기도 한다는 겁니다.

" <독립신문>에서 가장 강조하는 사상은 자주독립과 문명개화 사상으로, 그것의 주요 개념은 자유권, 독립권, 교육, 개화, 진보, 법의 중요성, 군주에 대한 충성, 애국 등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그 내용을 보면 이익을 추구하고 재산권을 갖는 개인의 자유, 경제적 활동의 중요성 등 근대 자유주의의 내용들이 주를 이룬다. 교육과 법, 진보, 개화 등은 이러한 자유와 독립을 확보하기 위한 방법으로 제시되었다. "

# 자유주의를 말해보자.

'자유주의'는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만큼, 그 의미도 너무 다양해졌습니다.
이제 '자유'만으로는 자유주의를 설명할 수 없게 되었죠. 누구의,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지 않으면 동상이몽(同床異夢) 하며 얼굴 붉히기 십상입니다.

사실, 이제껏 제 깜냥으로는, 해방 이후의 반공정국까지가 되짚어간 한국 자유주의사상의 끝자락이었습니다.
한국의 자유주의는, 해방 이후의 북한 사회에 대한 반정립적 성격이 강했고, 그 기준에 서있던 것은 바로 재산권, 경제적 자유주의였습니다. "개인의 재산권을 인정하느냐" 는 물음이 곧, 자유주의자이냐 아니냐를 결정했죠. 북한은 -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법적으로는 - 개인의 재산권을 부정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이제 <한국 자유주의의 기원>에 따르면,
자유주의의 기원은 해방 이전까지 거슬러올라가 <독립신문>에 이르게 되는데, 그녀가 <독립신문>의 자유주의 사상에서 주목한 것 역시 경제적 자유주의에요.

# 무턱대고 자유주의?

경제적 자유주의는 재산권을, 정치적 자유주의는 집회의 자유, 결사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뜻하는데,
무턱대고 '자유주의'라 했을 때는, 이 모든 것을 아우르게 되죠.

재산권이라는 경제적 자유주의는, 경제적 강자에게 필요해요.
경제적 약자는, 말 그대로 행사할 재산권이 미약하니, 특별히 자신의 재산권에 대한 보호를 주창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집회의 자유니 결사의 자유니 하는 정치적 자유주의는, 정치적 약자에게 필요하죠.
정치적 약자는, 여럿의 약자가 모여서(결사) 요구(집회)할 수 있는 보호를 필요로 하니까요.

결국, 에둘러 '자유주의'라 했을 때는, 경제적 강자와 정치적 약자가 함께 할 자리가 마련되는 셈입니다.

상식적으로, '동맹'이란, 공통의 이해관계를 기본으로 할테니,
경제적 강자와 정치적 약자의 '자유주의' 동맹이 실로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분명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경제적 강자가 정치적 자유를 필요로 해야하고, 정치적 약자가 경제적 자유를 필요로 해야하죠. 누가 손해보는 장사 하려고 하나요.

그런데, 제가 보기엔 둘 다 썩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이 집회 결사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도, 데모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재산권을 주장하는 것도, 도무지 어색하거든요.

이 '자유주의' 동맹엔 뭔가 문제가 있습니다.

# 에둘러 자유주의

누가 보기에도 부자연스러운 그들은, 당연하게도 '자유주의' 동맹을 맺은 적이 없어요.
다만, 누군가 한쪽이 에둘러 '자유주의'를 말 할 뿐이죠.

'자유주의' 동맹을 표방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정치적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정치적 약자 보다는, 경제적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경제적 강자로 보여집니다.

경제적 강자가 가짜 동맹을 표방하는 이유 역시도 상식적입니다. 동맹상대 혹은 동맹상대에 동조하는 세력을 아우르기 위해서죠.
'자유주의' 동맹 아래 정치적 약자들의 동조 - 그것이 심정적이든 직접적이든 - 를 얻어내고자 함일겁니다.

'정치적 약자'는 누구일까요?
우리 모두가 정치적 약자입니다. 적어도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사회에서는 원칙적으로 '정치적 강자'가 있을 수 없으니까요.

# 나름의 비용

동맹과정이 일방적이었던 쌍방적이었든,
여하튼 동맹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제 역할을 훌륭하게 해냅니다. 경제적 자유주의는 탄탄대로를 달립니다.

그런데, 에둘러 표방한 동맹일지라도, 동맹은 동맹인 법.
경제적 강자들도 나름의 비용은 치뤄야했습니다.

경제적 자유가 주된 목적이라 하더라도, 동맹을 깨지 않으려면, 적당히 정치적 자유주의도 이루어야 했으니까요.
못된 말로, 가끔 정치적 자유에게도 먹이를 줘야했겠죠.

저는 이 시점이 87년 6월항쟁이라고 생각해요.
87년 6월항쟁은 4ㆍ19와 함께 정치적 자유에 있어 상징적인 날이니까요.

6월항쟁의 가시적인 성과는 대통령직선제였죠.
그런데, 이 동맹의 성격을 이해하신 분이라면, 정치적 자유도 '대통령직선제'라는 당시로서는 꽤나 대단한 성과를 얻었는데, 경제적 자유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으리라 충분히 짐작하실 수 있을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80년대 후반은 한국의 경제규모가 눈부시게 성장하던 특징적인 시기에요.
전에 후기를 올렸던 <한국재벌연구>에서 읽은거지만, 한국의 기업들에 '입법'이라는 제재가 가해진 것은 80년 중후반 들어서에요.
물론, 그 이전시기에는 기업의 해외진출로를 모색하는 것과 더불어 지원이 극에 달했었죠. 전성기라고나 할까요. 한국의 유수 기업들이 최고의 성장기를 구가한 것도 바로 이 시기입니다.

# 같지만 다른 두 사람

이나미씨가 먼지 묻은 <독립신문>까지 뒤적여가며 하고싶었던 얘기는 바로,
이 부자연스러운 동맹이었을겁니다.

처음에 잠깐 끌어썼던 지식인들의 논쟁으로 돌아가볼께요.
이 지식인들의 논쟁은 99년 한겨레21 특집기사로 다루어진 것이죠.

복거일씨와 공병호소장 모두 소문난 논객들인데, 두사람의 공통점은 경제적 자유주의의 관점을 견지한다는 것입니다.
집필분야만 조금씩 다르죠. 복거일씨가 좀 더 폭넓게 쓰는 편이고, 공병호소장은 경제 경영분야에 치중하는 편입니다.

진중권씨가 '진정한 자유주의'를 논한 것은 공병호소장이 아니라 복거일씨에 대해서에요.
진씨는 공병호소장이 쓴 <10년 후 한국>을 저평가하면서, 그의 논리는 '시장주의'가 아닌 '시장만능주의'라고 한 적은 있지만, '자유주의' 자체에 대해서 언급하지는 않았었거든요.

그가 유독 복거일씨 앞에서만 자유주의를 논하는 것을 보면,
그 역시 이나미씨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자유주의에 주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진씨가 유달리 '진정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면서까지 자유주의를 고집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이나미씨와는 사뭇 다른 태도이죠.
더구나, 이나미씨 역시, 책의 말미에 이 논쟁을 살짝 소개하며 진중권씨가 아닌 복거일씨의 손을 들어주고 있구요.

진씨가 말하는 '진정한' 이라는 기준은, 경제적 자유주의와 정치적 자유주의가 얼마나 적절하게 조화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시각으로 바라봤을 때는, '경제적 자유주의 아래 정치적 자유주의는 억압될 수 있다' 라는 공병호씨는 이 균형을 깬 것이고, 진정한 자유주의자의 자격을 잃은 셈이 됩니다.

하지만, 이나미씨는 경제적 자유주의와 정치적 자유주의의 동맹 자체가 온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둘의 균형을 뜻하는 진씨의 '자유주의의 진정성'이라는 기준은 성립하지 못하는겁니다. 그녀는 복거일씨야 말로 자유주의자'다운' 자유주의자라며 손을 번쩍 들어줍니다. 재밌군요.

통속적인 관점에서 좌파논객으로 묶일 이나미씨와 진중권씨.
하지만, 제가 보기엔 이 두사람은 문제설정 자체를 달리 하고있을 뿐 아니라, 그 입장에도 현격한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 독립선언이냐 균형유지냐

기존의 자유주의는 신자유주의로 그 명칭을 변경했어요.
신자유주의가 버젓히 20:80의 사회로 자신을 홍보하는 것을 보면, 경제적 자유주의가 자유주의 동맹 내에서 노골적으로 큰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게 합니다.
물론 이것은, 동시에 정치적 자유주의의 입지가 여지없이 줄어들 것을 예고하기도 하구요.

독립선언이냐, 동맹내 자리다툼을 통한 균형유지냐.

여러분은 같지만 다른 이 두 사람의 입장을 어떻게 바라보세요?

# 더 읽어야 할 책 - <자유론>, <사회계약론>

암흑으로 비유되는 중세에서 벗어나게 한 근대 자유주의 사상들.
아무렇지 않게 그 진보성에 경탄해왔던 사람이라면,

<독립신문>은 물론, 밀의 <자유론>과 루소의 <사회계약론> 을 '자유주의의 기원' 이라는 관점에서 읽어보는 것도 흥미로울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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