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주체성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6
탁석산 지음 / 책세상 / 200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 소매상 탁씨와의 유쾌한 만남

철학자 탁석산씨를 처음 만난 것은 <철학 읽어주는 남자>에서 였습니다.
그와의 만남은 굉장히 신선했어요. 그는 <경제학 카페>에서의 유시민씨와 비슷하게도, 소매상 역할을 자처했죠.

철학이든 경제학이든, 결국은 삶의 필요에 의해서 생겨난 것일진데,
전문적인 연구를 업으로 하는 철학'자', 경제학'자' 와 갑동이, 을순이와의 거리는 너무 멀었어요.

철학자, 경제학자들은 도매상이었어요.
갑동이, 을순이의 생활필수품을 판매하긴 하지만, 도매상에게는 장바구니 들고온 갑동이, 을순이가 여간 곤란한게 아니었거든요.

탁석산씨는 철학의 소매상을 자처합니다.
하지만, 흔히 하는 오해처럼, 이를 두고 '쉬운 철학'이라고 말하기는 힘들거에요. 철학은 전문적인 연구를 필요로 하는 하나의 '학문'이니까요.
철학의 소매상 탁석산은, 갑동이 을순이의 소비심리를 자처하는, 속된 말로 '장사꾼' 이라기 보다는, 도매상과 소비자의 서로 다른 유통구조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는, 엄연한 '소매상' 을 자처했습니다.

탁석산씨의 <한국의 정체성>, <한국의 주체성> 연재는, 여전히 - 사실, <철학 읽어주는 남자> 보다 더 일찍 쓰여졌습니다만 - 소매적인 유통구조가 돋보입니다.
그의 철학에는, 이름 모를 철학자 대신 갑동이 을순이가 등장하고, 표현 또한 부드럽고 자상해요.

" 어떻게 살 것인가 ", " 어떻게 살아야 잘 살았다고 소문이 날 것인가 " 를 고민하는 을순이 갑동이는, 그를 통해 자신의 일상적인 고민이 철학자들의 정체성, 주체성 논쟁과 다를바가 없다는 것을 알게될거에요.
그리고, 일상적인 고민이 하루하루 깊이를 더해갈 수록, 뭇 철학자들과의 만남도 가까워집니다.

# 이번에도 유감없는 소매상적 솜씨, 주인과 손님의 예시

한국인의 주체성을 문제 삼은 탁석산씨의 소매상적 솜씨는 이번에도 유감없이 빛을 발합니다. 그는, '주체적인 삶이란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 이라고 하며, 주인과 손님의 예를 들어요.

꽤나 근사한 친구집에서 최신형 전자기기를 가지고 마음껏 노는 '손님'과, 허름한 집에서 김치찌개에 밥말아먹는 '주인'.
하지만, 손님은 내심 눈치를 봐야하고, 주인의 마음은 마냥 안락합니다.

친구집이 꼭 근사하라는 법 없고, 우리집이 꼭 허름하라는 법은 없겠지만,
주체적인 삶이란, 물질적인 풍요에 우선해, 자기 의지와 필요에 따라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하고싶은지 한번 제대로 물어보지도 못한 채, 소위 잘 나가는 일만을 찾아 전전긍긍한다면,
친구집에서 내심 불편해하며 최신형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 손님의 마음은 아닐런지요.

주인과 손님의 예시는 계속됩니다.

우리는 마냥 주인노릇만 할 수는 없어요. 살다보면, 집은 동대문인데 저 멀리 신촌에서 밤 늦게까지 술자리가 있을 수도 있고, 친구녀석이 산 새 음악CD를 함께 듣고싶을 때도 있으니까요. 주인노릇 할 수 있는 우리집이 최고이지만, 친구를 집에 초대하기도 하고, 친구집에서 신세를 지기도 하는 것이 사람사이일꺼에요.

결국 우리는, 주인으로서의, 손님으로서의 예의에 모두 익숙해져야 합니다.
주인되는 삶이라 해서, 고립을 자처하며 주인이기만을 고집하는 것은 아닐테니까요. 우리는 열린 인간관계 속에서 혹은 열린 국제관계 속에서 자기 의지와 필요에 따라 행동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혹 이번에는, 집에 초대한 친구가 마치 제집인양 행동한다고 해요.
손님으로서의 암묵적인 규칙이 깨어졌어요.

주인이라면 이 손님을 제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친구에게 '제재'가 어울리지 않는다면, 좀 더 공식적인 인간관계나 국제관계를 떠올려보셔요.)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무가내인 손님이 있다면, 물리적인 방법도 사용할 수 있을거구요.

주인으로서.

# 철학과 경제의 만남

이처럼, 탁석산씨는 개인 혹은 국가의 주체성을 얘기하며 주인과 손님의 예시를 십분 활용하고 있는데요,
자신의 의지와 필요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 일정한 규정과 예의, 그리고 이것이 깨어졌을 때 강제할 수 있는 물리력.
이것들은 주체적인 삶의 조건들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제목이 <한국의 주체성>이니 만큼, 그가 국제관계에 이 조건을 적용하고 있다는 것 즈음은 눈치 채셨을텐데,
그는 각각의 조건에 맞추어, 한글전용, 국가기반시설의 보호, 공기업 민영화의 반대, 환경 이데올로기 비판, 등의 제안을 펼칩니다.

대부분은 첫번째 조건 - 국가가 정책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 - 에 맞추어져 있어요.
(세번째 조건과 관련해서는 핵무장을 제안하기도 했는데, 민감한 사안이니 만큼 넘어갈께요.)

한글전용을 제외하면, 나머지 제안은 경제적 주권과 연관이 있습니다.
환경 이데올로기 역시도, 결국은 비용의 문제 - 친환경적인 생산공정에 필요한 추가적인 비용 - 로 돌아오니까요.

그는 철학자로서 주체성의 문제를 고민했지만,
고민의 결과물은 경제적 주권으로 귀결됨을 알 수 있습니다.

# 그런데, 불편한 만남

이제 철학과 경제가 만났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엔 이 만남이 조금 불편해보여요.
철학의 사고는 자유롭게 이루어지지만, 경제는 말그대로 하나의 제도에요.

시험이라는 '제도' 아래에서는,
응시자의 능력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아무리 다양한 방식이 도입된다 하더라도, 기출문제나 기출경향과 같은 '제도에의 이해'가 시험의 성적에 큰 영향을 미쳐요. 그 틀에서 벗어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죠.
경제라는 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철학의 자유로운 사고와 경제의 규정된 제도와의 결합이란,
철학이 제도에 맞추어 왜곡되던지, 아니면 경제가 왜곡되던지, 둘 중 하나의 왜곡을 거치게되요.

논리정연하고 명쾌한 탁석산씨의 철학은,
후자에 속합니다. 그래서, 불편하구요.

# 독을 깨고 달아나는 제리(Jerry), 쫓는 톰(Tom)

경제문제는 경제적 관점에서 접근을 해야해요. 응당 경제주체를 기준으로 접근을 해야죠.
그런데, 탁석산씨는 '한국의 주체성'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주권'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해요.

주권이란 '국가'를 기준으로 하는데,
'국가'는 엄연히 말하자면 경제주체와는 거리가 있어요.

우리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운대로 3대 경제주체가 '국가-기업-가계' 라면,
탁석산씨가 얘기하는 '주권' 역시도 경제주체인 국가의 주체성을 얘기하는 것이겠지만,
솔직히 국가의 역할이란 기업과 가계 사이의 중계자 역할이거든요.

더군다나, 오늘은 무역과 서비스교역, 금융거래까지 자유화 되어서,
국가가 기업에 미칠 수 있는 '규제' 자체란 이전보다 더욱 작아졌으니까요.

국가와 기업의 관계는, 만화영화 <톰과 제리>에서 처럼 고양이와 쥐의 관계와 같아요.
언뜻 보기엔 고양이는 쥐 보다 월등히 힘이 센 것 같지만, 원래부터 쥐를 먹이로 하는 고양이가 쥐 없이 하루도 연명할 수 없는데다,
이제는 '독안에 든 쥐'가 국가라는 '독'을 깨어버렸으니, 고양이로서는 더욱 수세에 몰릴 수 밖에요.

그런데, 탁석산씨는 이미 독을 잃어버린 국가를 두고 경제문제를 논하고 있거든요.
날이 갈 수록 선명해지고 있는, 기업-개인 이라는 경제구도가 그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걸까요?

" 보고서대로 우리의 공기업들이 모두 외국 기업에 팔렸다고 해보자. 이제 공기업에 '주인'이 생긴 것이다. 한국전력을 매각했으므로 전기 사용료는 미국기업에 내야 하고, 미국인 사장이 우리의 전력 공급을 좌지우지한다. 요금도 미국인 사장이 판단하여 정할 것이다. 만약 요금이 지금보다 대폭 인상된다 하더라도 우리 정부는 시정하라고 지시하지 못할 것이다. 사기업에 대한 간섭은 자본주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통신은 어떠한가? 미국인들이 우리의 통신회사를 거의 인수한다면 한국의 정보 보안을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까? 또 철도가 민영화되어 외국인이 주인이 되었다고 하자. 임금 협상이 결렬되어 외국인 주인이 직장 폐쇄를 단행해도 정부는 간섭할 권한이 없다. "

탁석산씨의 주장은 분명 그가 비판하고있는 시장만능주의자들에 비해 진일보 한 것이지만,
그가 손에 쥐고 있는 '국가'라는 기준은 사실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아요.

미국인 사장 대신, 한국인 사장을 대입해보면 결론이 나오게되죠.
즉, '국가'라는 카드를, 아무리 바꿔도 같거나 비슷한 결론이 나와요.

국가가 변수역할을 못하고 있다는거죠.
'경제'라는 법칙에서 국가가 변수역할을 못하고 있다는거에요.

미국인 사장의 경제법칙과 한국인 사장의 경제법칙은 다르지 않으니까요.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지만, 낙제도 행복하지는 않다.

'한국경제'라는 시험지를 앞에 두고 학생들이 앉아있어요.

고액 과외를 통해서 기출문제와 기출경향을 빠삭하게 알고있는 학생은 시장만능씨에요.
물론, 시장만능씨는 높은 점수를 받겠지만, 그렇다고 그의 삶이 주체적이거나 행복하진 않아요.

우리의 탁석산씨는 어디즈음 앉아있을까요?
그는 마음에 드는 문제만 푸는 학생과 같아요.

물론, 컨닝을 하거나, 아는 문제만 푸는 학생들 보다 훨씬 나았지만,
그 역시 점수에 있어서는 여타 학생들과 다를바가 없어요.

그는 학생들의 참신한 사고와는 거리가 먼 채점 기준에 목을 매진 않았지만,
그 역시 시험장에 앉아있는 학생이니까요.

결국, 우리 불행한 학생들을 구출할 수 있는건 새로운 교육일 수 밖에 없듯이,
경제적 주권으로부터 나오는 주체적인 삶이란, 국가가 아닌 실제적인 경제주체 사이에서 고민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