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은행제도론
이방식 / 법문사 / 199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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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보다 재밌는 속편, 경제

음모론으로 익히 알려져있는 <그림자 정부>(이리유카바 최) 는,
정치편과 경제편 두편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정치편은,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역사의 사건에 대해, 그림자 정부의 개입을 오버랩(overlap)하며,
'그림자 정부'라고 속칭되는 조직에 대해서, 기원과 조직형태, 활동방식, 인물의 면면을 알리고 있습니다.

경제편은 속편치고는 내용의 깊이가 더 있죠.
체계가 없어 다소 산만한 듯한 인상을 주는 정치편과는 달리, 구체적이고 일관됩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경제편은 영국의 모건가(家) - 후일, 미국 월스트리트의 J.P.모건 - 에서 시작합니다.
그림자 정부와 동격으로 놓일만한 이 신흥집단이 노리는 것은 '화폐의 발행권'.

읽은지가 꽤 되어 기억이 희미합니다만,
영-프 전쟁과 독립전쟁, 남북전쟁, 프랑스혁명, 러시아혁명과 같은 굵직한 역사에서부터 오늘날의 금융위기까지,
화폐의 발행권를 사이에 두고 두 세력 - 공공세력과 그림자 정부 - 간의 힘겨루기로 일관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 세련된 음모론

음모론 치고는 좀 세련되었었나요.

어쨌든, 저는 이리유카바 최의 음모론 덕분에 경제사와 화폐제도, 중앙은행에 대해서 좀 더 관심을 갖게 되었고,
역사 몇권과 경제사 몇권, 환율과 화폐제도와 관련해서 몇권의 책을 더 보게됩니다.

여차여차하여 이제 중앙은행에 대해서는 처음 보는 셈입니다만,
글쓴이 - 김O주 한국경제신문사 정치부 부장 - 의 서문과 목차를 보니, 깔끔한 중편논문입니다.

글쓴이는 한국의 중앙은행제도의 허와 실을 조명하기 위해서 각국의 중앙은행제도와 운영를 조사한 모양인데,
'중앙은행의 권력구조'에 대해서도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 중앙은행은 공공기관일까?

다시 음모론으로 돌아가서요,
<그림자 정부> 경제편에서 이리유카바 최가 던지는 첫 질문이 바로,
'중앙은행은 공공기관인가, 사기업인가' 입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중앙은행을 공공기관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일갈합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한국의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은 공공기금을 출자해서 만든 공공기관이 아닙니다.
특정의 주주와 소유지분이 엄연히 존재하는 사기업이죠.

<중앙은행>은 세계 최초의 은행인 릭스은행(스페인, 1668)을 시작으로, 각국의 은행사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각국 고유의 역사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오늘날의 각국 중앙은행은 사기업에서 시작했고, 오늘날도 사기업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맞습니다.

이는 물론 상식에서 어긋나는 일이기도 하죠.
한 국가의 공식화폐를 발행하고, 외환을 관리하며, 통화신용정책을 수립 집행하고, 일반은행의 은행으로서 對은행 대출업무, 심지어 은행업무의 감독까지를 하고있는 기관이 대체 사기업이라니.

분명 사기업이 맞습니다.
최초의 중앙은행으로 알려져있는 영국의 잉글랜드은행을 보면,
1694년 민간출자로 설립되었고, 발권업무와 예금은행의 기능을 가지게 된 것은 18세기 초. 그것도 국왕의 특허를 받아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것도 잉글랜드 은행권만이 영국의 공인화폐가 된 것은 1833년, 그러니까 은행의 기능을 갖추고도 100년이 지난 후에 가능했던겁니다.

물론, 말씀드렸다시피, 이는 국가마다 약간의 차이를 무시했을 경우입니다.
프랑스처럼, 정부와 민간이 공동출자 - 물론, 정부는 일부였지만 - 한 경우도 있었고, 일본처럼 그 탄생부터 국가에 의해 이루어진 경우도 있었습니다.
(1909년에 설립된 한국최초의 중앙은행인 舊한국은행의 역사는 일본과 굉장히 흡사합니다.)

하지만, 대체적인 흐름 면에서 대략 일치하며,
설립초기만 해도 여타 은행과 다를바 없이 제각각의 화폐를 찍어내는 기관에 불구했지만,
공식화폐를 발행하는 발권은행의 지위와 함께 점차 책임과 의무를 함께 지며 국가의 힘에 강하게 붙들렸다고 하는 것이 가장 그럴싸한 표현이겠습니다.

책임과 의무.
우리는 의무 - 발권의 막강한 권한과 맞바꾼 - 에 좀 더 초점을 두도록 하죠. 정부와 중앙은행간의 묘한 연관관계는 여기서부터 시작하니까요.

# 공통화폐의 필요성 하나 - 상업 나고 금융 나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금융업의 필요야 상업이나 무역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화폐'라는 것 자체가 교환의 용이성이라는 기능에 초점을 맞춘 것이니까요.

여기서 영국 잉글랜드 은행의 역사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잉글랜드 은행이 18세기 초에 발권업무를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식화폐가 되기까지 100여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는 것은,
한세기도록 어떤 은행이든 발권을 할 수 있었다는거니까요.

쉽게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우리화폐, 국민화폐, 조흥화폐, 기타 등등.
황당한건 둘째 치고라도, 오늘과 같은 질서잡힌 교역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상상할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금융 나고 상업 난 것이 아닙니다.
상업 나고 금융 났죠. 100여년의 시간동안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발달한 교역의 규모가 규정된 공통화폐의 필요성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 공통화폐의 필요성 둘 - 명백한 거래

이제부터는 제 추측이지만, 공통화폐의 탄생배경은 비단 그것, 그러니까 교역의 규모를 감당하기 위해서 만은 아니었을겁니다.
은행은 '자본'이 있는데 시장을 독점할 '권한'이 없었고, 정부는 '권한'은 있었지만 '자본'이 없었던거죠.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하는 묘한 결합이 공인화폐의 탄생배경이 됩니다.

그리고, 화폐라는 상품의 시장을 독점할 권한(공인화폐발행권)를 주는 대신 은행의 자본을 요구하게 됩니다.
이렇게 은행으로부터 국가로 들어가는 자본. 이것이 오늘날 각국 중앙은행의 국고금 관리업무일 것입니다.

한국은행의 경우, 세금과 같은 국가수입을 국고금으로 보관하는 것 이외에도, 정부의 자금이 부족할 경우 국회에서 미리 정한 한도 내에서 국가에 대출을 해주기도 하니까요. 이른바 국채발행이죠.

여기서 당장 돈이 필요한 것은 정부입니다. 더구나, 근대적인 개발이 한창이던 시절은 말할 나위 없겠죠.
한국은행의 금고를 가운데 놓고 보면, 지출의 압력은 정부가 가지고 있는겁니다.

# 전장의 이름은 '통화신용정책'

지출의 압력이 정부라면, 은행은 인플레이션의 압력을 받습니다.
정부가 필요로하는 만큼의 화폐를 발행하게되면, 실물가치보다 화폐량이 많아져 화폐가치가 떨어지게되니까요. 인플레이션입니다.

화폐 역시도 상품인 것을, 인플레이션은 화폐가치의 하락, 상품가격의 하락을 뜻하죠.
은행으로서는 좌시할 수 없는 현상인 것입니다.

결국, 인플레이션과 정부지출의 압력.
이 힘겨루기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중앙은행의 업무를 또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이른바, '화폐가치(물가)의 안정' 입니다. '통화신용정책'이라고도 할 수 있을겁니다.

통화신용정책이란, 한마디로 통화량을 알맞은 수준으로 조절하는 것입니다.
통화량이 경제규모에 비하여 지나치게 많으면 경기가 과열되고 물가는 상승, 온갖 투기가 일어나게 되고,
반대로 통화량이 지나치게 적으면 경기는 침체하고 실업이 발생하니까요.

중앙은행의 통화신용정책으로 익히 알려져있는 세가지는,
바로 대출정책(재할인정책), 공개시장조작 및 지급준비율정책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기회가 있을 때 자세히 얘기하기로 하죠.

# 전장 중의 전장, 정책기관 금융통화위원회

이제 본격적으로 힘겨루기의 면모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힘겨루기의 한복판에 통화신용정책이 있는데, 이 정책을 결정하는 실제 기구를 보겠습니다.

우선, 정부 팀(Team)은 한 국가의 재정정책을 결정하는 주무부서인 재무부가 대표입니다.
은행 측이야 말할 것도 없이 중앙은행일 것이구요.

그럼, 재무부장관과 중앙은행총재와의 싸움으로 비화되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어느 국가든 재무부서와 중앙은행 사이에는 정책기관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금융통화위원회(이하 금통위)'가 그 역할을 하고있구요.

살피고 살펴 들어간 전장의 한복판에 금통위가 있는 것입니다.
대략 대여섯명 정도가 되는 금통위의 위원을 누가 할 것이냐. 그리고, 의장은 누가 할 것이냐.

# 금통위 둘러보기

다시 한국의 경우를 살펴보죠.
제가 본 <중앙은행>은 워낙 오래된 책 - 88년 판본 - 인데, 그간 관련법제들이 많이 변경되었더군요.

현재 금통위는 한국은행 총재 및 부총재, 국민경제 각 분야를 대표하는 5인 등 총 7인의 위원으로 구성되고 있습니다.
의장을 겸임하게 되는 한국은행 총재는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이 임명하고, 부총재는 총재의 추천에 의해 대통령이 임명.
다른 5인의 위원은 각 추천기관의 추천을 받아 대통령이 임명하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이렇듯, 금통위 위원을 결정하는데 있어 정부(대통령)의 권한이 어느정도는 막강한 셈이죠.
물론, 결론은 금통위가 내는거니까, 위원이 누구이냐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금통위 내의 의사결정과정일겁니다.

즉, 선임상의 문제 뿐만 아니라,
구성원은 몇명으로 하며, 의결권 부여의 문제, 재의 요구권(금통위의 결정에 대한 번복 가능성) 여부, 등등이 함께 교려되어야 한다는겁니다.
실례로, 한국처럼 대통령이 최종임명권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미국ㆍ독일ㆍ필리핀ㆍ오스트리아 정도이고, 노르웨이ㆍ스웨덴ㆍ핀란드와 같은 나라들은 의회가 임명권을 갖고있기도 합니다.

# Joker, 중앙은행의 독립성

'중앙은행의 독립성'이란 여기서 던져지는 일종의 뿅카드(Jocker)입니다.
정부의 지출압력 앞에서 화폐가치의 안정성을 고수할 수 있다는 것이 중앙은행 독립성의 대의가 되는겁니다.

금통위에 대해서 대통령이나 행정부의 임명권한이 클수록,
한 나라의 금융정책이 소수에 의해 좌지우지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죠.

하지만, 여기서 그어지는 행정부-입법부 라는 대립구도를 보면 아시겠지만,
이는 행정부를 장악한 집권당을 견제하는 야당의 단골메뉴가 될 가능성이 지극히 농후한 것이구요.

이제 이 대립구도까지 찾아왔다면,
다시 처음 - 중앙은행의 탄생 - 에 제기한 자본과 권한의 묘한 관계로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권한이란 행정부에 있는 것이고,
자본이란 행정부에도, 입법부에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니까요.
한국의 정치구도를 보시면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겁니다.

저도 한국의 경제사 몇권을 끝으로 여정을 일단락지을까 생각중이구요.

# 보태어 - 흥미진진한 미국 중앙은행의 역사

전쟁에서 고지에 깃발을 꼽는 것이 승리를 상징한다면,
사실, 금융전쟁에서 나부끼는 깃발은, 다름아닌 '공식화폐의 발행권'일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중앙은행의 역사 중에서 뺏고 뺏기는 깃발 싸움이 가장 치열했던 곳이 다름아닌 미국이라는겁니다.

미국의 금융제도에서 한국의 금통위와 같은 정책기관의 역할을 하는 곳은,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이하 연준)'가 될겁니다.
경제기사를 들춰보시는 분들은 잘 아실겁니다. 연준의 회의결과, 연준 의장의 한마디 한마디에 얼마나 많은 세계의 눈과 귀가 쏠려있는지를.

그 의장자리에 앨런 그린스펀이라는 거물이 있습니다. '경제대통령'이라고도 하죠.

그런데, 연준은 한국의 금통위와는 상당히 다릅니다.
대부분 국가의 중앙은행 설립역사는 공통화폐의 필요성을 정부가 제기하는 형태에서 시작했지만,
미국은 그럴 필요도 없이 충분히 상업이 발달되어 있었던겁니다. 이미 은행업 자체가 자리를 잡고 있었죠.
참고로, 연준이라는 중앙은행의 역사는 1913년에야 시작된 것이구요.

성행한 은행업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주립은행입니다.
미국은 독립전쟁을 전후로 해서 주에 흩어진 주립은행을 통일시키기 위한 국법은행을 설립하려고 노력하지만,
국법은행의 공식화폐 발행권이란 1791년에 미합중국 제일은행(First Bank of th United States)이 쥐었다가 20년 기한을 채우고 돌려주고, 1816년에는 미합중국 제이은행(Second Bank of th United States)이 쥐었다가 1836년 다시 해체되는 등, 뺏고 뺏기는 싸움이 계속됩니다.

다른 국가의 경우 자본과 권력이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었지만,
미국의 경우 자본이 권력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주(州)에서의 권한이 막강했던겁니다. 국립은행은 은행의 형색만 갖춘 보릿자루가 되어버린겁니다.

아무튼 이 흥미진진한 역사는,
주립은행의 위세가 20세기초의 금융공항을 계기로 가라앉으며 연방준비법을 끝으로 마감하게 된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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