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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철한 머리 따뜻한 마음 - 經濟騎士道를 생각하며
변형윤 지음 / 한국학술정보 / 2002년 3월
평점 :
# 뉴스를 보다가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TV를 켜는 일입니다. 잠을 깨는데는 제법 효과가 있죠. 그런데, 부대 일과에 충실히 따르다보면, 내무실 TV가 가장 오래도록 고정되어 있는건 음악채널이지만, 제일 마지막에 고정되는건 TV뉴스일 수 밖에 없는지라. TV 켜기도 힘든 아침잠에 채널을 뉴스에 고정시키는건 어쩔 수가 없더군요.
그건 그렇다치고, 평소엔 잘 안보는 TV뉴스지만 가끔씩은 아침잠이 확 달아나게 하는 뉴스들이 있기도 합니다. 누구에게나 관심을 끌법한 사건 사고들도 그렇거니와, 각자의 취향에 따라 주섬주섬 옷을 입다말고 시선 한번 끌게하는 기사는 따로 있죠.
언제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국회의원들이 하는 포럼에 경제학의 두 원로가 참석해서 열띤 토론을 벌였다는 기사가 그랬습니다. 전 국무총리였던 남덕우님과 서울대 명예교수인 변형윤님 두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작자의 솜씨인지 모르겠지만, 이 두분의 논쟁에 붙인 제목이 가관입니다. 역시 정확한 제목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 경제가 성장 위주로 가야하느냐 분배 위주로 가야하느냐에 대한 것이었죠.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두 원로 경제학자의 출신 학교인 서강대와 서울대 경제학 교수진을 일컫는 서강학파와 학현학파 - ‘학현‘ 은 변교수님의 호입니다. - 라며 무협지 한편을 써내려갑니다.
“ 성장을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경제정의를 실현하고 소득분배를 개선하면서도 4~5%의 성장이 가능하다. ” 라는 주인공의 대사 따위 아랑곳 없이, 멋지게 편집된 두 학파의 계보까지 나온 이 대립구도는 대체 무엇인지.
# 후기에 앞서
뭐 그 아침의 불쾌함이 어떠했느냐를 떠나서, - 사실 그렇게 따지자면, 하루이틀 불쾌한 것으로는 모자르죠. - 저는 후에 변교수님의 책을 한권 구입하게 됩니다. 『경제와 휴머니즘』이라고, 지금 명예교수로 있는 변교수님께서 은퇴 전에 갈무리 형식으로 내신 책인데, 80년대 초에서 90년대 초반까지 주요 주간지에 기고한 칼럼들을 모은 것입니다.
사실, 분배 위주 경제학이란 대체 무엇이냐는 심각한 고민보다는, 한국 경제사를 꼽으면서 우리나라 경제학자의 글도 한번 읽어보자는, 일종의 기분내기에 불과했습니다.
칼럼을 갈무리한 글이니 만큼, 미시와 거시, 국내경제와 국제경제를 넘나들 뿐 아니라, 듣도보도 못한 경제학자들의 언급이나 경구, 심지어 저 유명한 남미의 종속이론까지도 등장할 만큼 다양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어찌 읽느냐. 흐름을 꿰는데 초점을 두어 최대한 속독하면서, 용어나 맥락이 난해한 부분은 따로이 메모를 두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번 후기도 두차례에 나누어서 써야할 듯 합니다. 첫 번째 후기는, 변교수님과 ‘분배 위주의 경제학‘ 이라는 애매모호한 제목의 이론에 대해서. 두 번째 후기는, 주의집중을 요하다 못해 두 번세번의 정독이 필요했던 칼럼들에 대한 난잡한 메모가 되겠습니다.
# 시작 - 기형 경제
지난 경제사에 대한 변교수님의 분석은 「한국자본주의의 나아갈 길」과 「제3세계의 등장과 경제적 배경」에 잘 나와 있습니다. 제목들은 거창한데 신문 칼럼이니 만큼, 중고등학생 정도면 충분히 소화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여튼, 후자의 경우 세계적인 시각에서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국가들의 발전상을 돌아보고 있는 글입니다. 줄기적인 논쟁이 되어온 여타의 개발경제학 이론들과 종속이론들도 여기서 잠깐 맛을 보입니다.
그런데, 이 칼럼에서 서술하고 있듯이, 한국을 포함한 제3세계 국가들이 경제발전을 시작하게 된 시기 자체가 굉장히 신파적입니다. - 변교수님께서 직접 이렇게 말씀하신건 아닙니다. - 근대를 피식민지로서 보냈고, 2차 세계대전의 끝과 함께 정말 허허벌판에서 경제발전이란걸 시작해야 했으니까요.
돈도 없고 기술도 없고 배는 고프고 사람들만 득실거리는 허허벌판이라는 공통의 조건 속에서, 이 나라들을 구별짓는 것은 땅을 팔거나 사람을 파는 것(노동력) 뿐이었을겁니다.
이들에게 “너희는 너무 대외의존적인 경제발전을 했어.” 라니.
땅을 파도 아무 것도 없는 한국이야 응당 사람을 팔 수 밖에. 그런데, 일 할 사람만 있다고 뭐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대외의존적이고 자립적을 따질 때가 아니었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데, 계획이라는게 어디 있었겠습니까.
뭐 사연이야 어찌되었든, 60년을 거쳐 70년대를 경과해 80년에 이르는 한국의 경제개발전략이란, 자본, 식량, 석유, 기타 자원 뿐만 아니라, 소재, 부품, 기술 등의 수입의존도가 높았던 그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변교수님의 첫 번째 문제의식이 있습니다. ‘헝그리 정신은 이제 그만. 그러다 애 죽겠다.’
이 대목에서 「경제경험을 살리자」도 묘한 조화를 이룹니다. - 언급한 칼럼은 기형적 발전이 가져온 우여곡절에 대해서 쓴 것인데, 74년과 80년의 오일쇼크와 86년 3저호황의 상이했던 효과를 언급합니다. - 이제껏 기형적으로 성장해온 한국경제들을 균형있는 성장모델로 변화시키자는 것이죠.
이를테면, 자본에서는 외자와 내자의 비율, 식량에서는 농업, 공업에서는 소재 부품산업의 육성, 경제구조에서는 중소기업의 육성, 등이 될 수 있는데, 이는 여타의 칼럼에 고르게 녹아들어있기도 합니다.
# 분배와 성장? - 문법상의 오류
우리나라에 분배 위주의 경제학, 그것도 모자라 ‘학현학파‘ 라는 학파에 자신의 호까지 빌려준 이 원로 경제학자는, 분배에 대한 자신의 강조가 성장에 반대되는 것이 아님을 역설합니다. 이는 「노사분규 푸는 길 있다」「경제정의를 실현하는 길」에 자세히 나와있습니다.
사실, 위에서 언급한 칼럼들을 더 잘 이해하려면, 「조급과 편시안은 금물」, 「증권시장이 걱정이다」, 「마셜의 경제기사도」의 칼럼을 함께 읽으면 좋습니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을 올곧게 이해하기 위해서, 스미스가 글래스고우 대학에서 철학강의를 하던 시절 집필한 초창기 원고인 『도덕감정론』을 읽으면 좋듯이.)
사족일 수 있겠지만, 이 원로 경제학자가 평생 경제학을 공부하며 늘 가슴 한켠에 담고 살았다던 마셜의 ‘경제기사도‘ 란, 일종의 경제윤리인데요.
역시 경제학자였던 알프레드 마셜이, - 2차 세계대전 후에 서독에 대한 엄청난 규모의 경제원조를 하게되는 ‘마셜플랜’ 으로 익히 알려져있죠. - , 쓴 책 어디에 쓰여있는 경구일겁니다.
다시 말해, 늘 경제윤리를 잊지 않고자 했던 이 경제학자에게,
‘성장’ 이란 일종의 목적지였지 길은 아니었던겁니다. 목적지에 이르는 길은 다양해야 했고, 그에게 길을 선택하게 하는 기준은 ‘경제윤리‘ 였던 셈이죠.
그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 이보게 젊은이, 약속시간도 정해지지 않은 길을 무에 그리 서두르나. 좀 늦더라도 저쪽 길로 가세. 저편이 경치도 더 좋다네. ”
아마 맞은 편에 있던 젊은이는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죠.
“ 망할 할아범. 대체 가자는거야 말자는거야. ”
이 젊은이 아주 오만불손합니다.
어르신을 할아범이라 불러서가 아니라, 어르신이 한 말씀은 쏙 빼놓고 제 멋대로 생각하기 때문이죠.
‘성장이냐 분배냐‘ 를 논하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목적지면 목적지고 방법이면 방법이지, 길의 목적지와 방법을 두고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과 같습니다. 성장이라는 경제의 목적지는, 투자와 분배의 선순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니까요.
이 젊은이, 제가 가는 길만 목적지에 도달하는 길인양 어르신을 무시하고 있네요.
한국엔 이런 오만불손한 젊은이들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 최악의 결말 - 어르신도 젊은이를 따라가는 것
사실, ‘오만불손한’ 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 만으로도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돌을 맞을 법 하지만,
저는 ‘너그러운’ 어르신에게 마저도 불만이 있습니다. 아니, 저 역시 오만불손하게도, 제가 『경제와 휴머니즘』을 통해 만난 것은 ‘너그러운 어르신’ 쪽이니까요.
젊은이와 어르신에게는 각각의 수식어가 붙는데. 은이가 ‘오만불손한’ 젊은이이고, 어르신이 ‘너그러운’ 어르신인 데는 같은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목적지입니다. 두 사람은 같은 목적지를 향해 가기 때문입니다. 성장 위주, 아니 정확하게 투자 위주의 경제발전론이나 분배 위주의 경제발전론이나 ‘경제성장‘ 이라는 같은 목적지를 향해가는겁니다.
빨리 도착하고 싶은 젊은이는 오만불손해졌고, 천천히 가고싶은 어르신은 너그러운졌을 뿐,
두 사람은 같은 길을 향해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 여행의 목적에 따라 선택의 폭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여행이라면야, 젊은이가 어르신을 따라가던지 어르신이 젊은이를 따라가던지 하겠지만,
당장 내일 끝나는 오일장에 당도하려는 것이라면, 선택의 폭은 좁아지겠죠. 젊은이가 어르신을 떼어놓고 혼자 가던지, 아니면 어르신이 젊은이를 따라가던지.
제가 볼 때, 젊은이와 어르신의 여행은 그리 귀결될 것 같습니다.
얼마전 포럼에 참가해 발제를 한 두 원로 경제학자들에 대한 보도기사에 불만이 생긴 것도 그런 연유입니다.
결말이 대충 예상되는 드라마의 중간즈음을 보는 기분이랄까. 주위 사람들은 입에 침을 튀기며 드라마의 결말을 두고 논쟁을 벌이는데 말이죠.
# 시장과 정부 - 어르신의 너그러움이라도 배우라
마지막으로, 시장과 정부의 관계에 대한 변교수님의 언급을 참조하면서 매듭을 지을까 합니다.
성장과 분배를 대립시키는 많은 분들이 이 대목에서 오해를 하실 듯 한데, 분배 위주의 경제학 역시도 민간위주의 시장경제를 주창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투자 위주의 경제학보다 훨씬 세련되고 매끄러운 방법론이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 경제의 당면과제」에 잘 나와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프랑스에서 시행한 경제정책를 빌어 ‘지시적 혹은 유도적 계획’ 이라 지칭하면서, 공공부문에 속하는 프로젝트를 제외하고서는 각 사기업에게 생산활동에 대한 틀과 가이드라인을 주는 유연한 방식의 경제계획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드러움의 정도를 수치화 할 수 없는 이상 ‘유연하다‘ 는 표현이 와닿기는 힘드니만큼, 끝까지 읽어봐야 할 것 같아요.
" 지나친 정부의 개입은 독과점화, 정책금융의 과중, 금융대출 편중, 기업 재무구조 악화, 금융비리,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은 부작용을 야기시키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기업활동의 자율화 금융의 자율화 등이 새삼스러이 강조되고 있고, 또 신문지상에 오르내리고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중략)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그 동안의 지나친 정부의 개입으로 야기된 갖가지 부작용을 해소하는 방안으로서 민간주도형경제 내지 유도계획화를 내세워 기업활동의 자율화, 금융의 자율화를 추진하다고 해서 과연 그 부작용이 해소된다고 할 수 있을까?
자율화를 추진하기에 앞서 혹은 병행해서 자율화의 장애요인을 제거하기 위한 구조개선, 제도정비 등의 여건 내지 환경 조성, 기반조성을 서두르는 것이 한결 긴요한 일일 것이다. “
뭐 이랬든 저랬든 같은 내용이긴 하지만, 훨씬 매끄럽긴하죠.
오만불손한 젊은이여, 어르신의 너그러움이라도 좀 배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