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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hoice - 자유무역과 보호주의, 도전할 것인가 도망칠 것인가
러셀 로버츠 지음, 유종열 옮김 / 생각의나무 / 2003년 7월
평점 :
절판
#1
<경제학 카페> 의 저자 유시민씨는 '경제학은 반직관적 학문'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반직관적'이라 함은, 직관적으로 옮고 그름을 판단하기 힘들다는 것을 뜻합니다.
유시민씨는 '자유무역의 수해자와 피해자'라는 대목에서 이 얘기를 꺼내는데,
결국, 자유무역은 잃는 것 보다 얻는 것이 많다는 결론을 내릴 유씨는,
아마도 자유무역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리가 심히 직관적인 나머지 그릇된 판단을 내리고있다는 얘기를 하고싶었던거겠죠.
직관적인 판단.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이익에 해가 될 때, '이건 안돼'라고 직관적인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사실, 어떤 사안이든 그렇습니다.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는 것 보다는 '나에게 이익이 되느냐 해가 되느냐'를 따지기가 훨씬 쉽죠.
'옳으냐 그르냐'에는 하나 이상의 입장을 따져봐야 하는 양적 어려움도 있지만, 여러 이해관계들 사이에서 기준을 세워야하는 질적 어려움도 있죠.
하지만, '나에게 이익이 되느냐 해가 되느냐'는 양적 어려움도, 질적 어려움도 없는 것입니다.
#2.
그럼, 유시민씨의 얘기대로,
자유무역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직관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다 함은,
곧 자유무역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나에게 이익이 되느냐 해가 되느냐'로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느냐 해가 되느냐'로 자유무역이라는 국가적 사안을 판단하다니.. 라고 하면서, 몇몇 분들은 눈살을 찌푸릴지 모르겠지만,
사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는 정당한 권리 아닐까요. 모든 경제활동이라는게 기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욕심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니까요.
자칭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얼치기 경제학도' 유시민씨 역시도 이 생각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그는 바둑의 귀퉁이집과 본집을 예로 들면서, 자유무역에 대한 반대는 이들에게 귀통이 한집을(당장의 이익) 내주기 싫어 본집을(장기적인 이익) 내어주는 것과 같다고 말하며 이 대목을 마무리 짓습니다.
#3.
하지만, 유시민씨의 견해는 자유무역에 대한 반대논리의 일부분을(그것이 주류이긴 하지만) 다룬 것 뿐입니다.
그가 자유무역에 대한 독자들의 판단을 왜곡할 여지를 가지고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유무역이란 반직관적으로도 반대할 수 있는 사안이며,
'자유무역이 나에게 이익이 되느냐 그렇지 않으냐'가 '자유무역이 옳으냐 그르냐'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반대논리도 있다는 것입니다.
을순이가 갑동이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을순이가 갑동이를 싫어한다고 할 수는 없는거니까요.
을순이는 단지, 갑동이의 이러이러한 점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입장들을 접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긴 하나,
무엇보다도 자유무역을 둘러싼 논점/쟁점들을 정리해나가는 것 또한 하나의 접근법이 될 것입니다.
러셀 로버츠의 는,
유시민씨와 같이 도전하는 자유무역이 도망치는 보호주의를 설득하는 내용입니다만,
소설의 형식으로, 자유무역과 관련한 논점들을 풍부하게 펼쳐보였다는 데에서 나름의 의의가 있습니다.
#4.
'생각의 나무' 출판사에서는 연이어 두편의 경제소설을 내어놓았습니다.
한편은 『국부론』의 저자 아담 스미스에 대해서, 한편은 『정치경제학 및 과세의 원리』의 저자 데이비드 리카르도에 대한 것입니다. 제목은 각각, <아담 스미스 구하기> 와 입니다.
두편 모두, 19세기의 고전경제학파 경제학자들의 환영이 등장한다는 공통점이 있죠.
<아담 스미스 구하기> 에서는 스미스의 영혼이 정비공 해럴드 팀스에게 투영되고, 에서는 리카르도가 하늘나라의 허락을 받아 직접 20세기 중반의 미국으로 내려옵니다.
의 리카르도가 현실세계로 내려온 이유는 텔레비전 공장을 운영하는 사업가 에드를 설득하기 위해서인데요,
에드는 자국(미국)의 텔레비전 시장 개방에 반대하는 찬조연설을 준비하고 있었죠.
리카르도와 에드의 대화는 전편에 걸쳐 이루어지고,
기네스 펠트로우가 주연한 <슬라이딩 도어즈> 처럼, 에드가 지지하는 그 법안이 통과된 1990년대 미국과 그렇지 않은 경우 1990년대 미국을 뛰어넘으며 서술됩니다.
그런데, 실제 이 두사람의 대화는 설득에 더 가깝습니다.
당연하겠지만, 이 우화의 기획이라는게 실제 데이비드 리카르도의 사상을 잘 이해하는 것일테니까요.
#5.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아담 스미스와 같은 시대를 풍미했던 데이비드 리카르도는 두가지로 우리에게 알려져있습니다.
상품의 가격은 그에 투입된 노동시간에 비례한다는 '노동가치설'이 그 하나이고,
1814년 영국의 농산물 보호법이었던 곡물법("영국에 들어오는 농산물에 세금을 먹이겠다!") 논쟁에 맞추어 쓰여진 대표적인 저작. 『정치경제학 및 과세의 원리』로 시작된 자유무역/보호무역 논쟁이 그것입니다.
뒤에서 말씀드리겠지만,
그가 주장한 '비교우위설'은 오늘날까지도 자유무역을 옹호하는 많은 경제학자들에게 인용되고 있구요.
그렇다면, 에드는?
에드는 당장 미국 텔레비전 시장의 개방으로 자신의 텔레비전 공장과 소속 노동자들의 밥벌이를 걱정하고 있던 차였죠.
앞서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는 것 보다는 '나에게 이익이 되느냐 해가 되느냐'를 따지기가 훨씬 쉽다고 말씀드렸는데,
에드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텔레비전 시장 개방이 자신의 공장과 소속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기 때문에 옳지 않다고 판단하게됩니다.
경제학자 명함을 달고있는 리카르도의 경우 '비교우위설'이라는 이론을 통해서,
자유무역이라는 것이 직관적인 피해의식과는 달리, 무역을 하는 양국 모두에게 이로운 일이라는 것을 반직관적으로 증명해내구요.
#6.
<아담 스미스 구하기>에 이어 까지,
[생각의 나무] 출판사의 연이은 저작들에 대해 호평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자의 생각에 공감하느냐 그렇지 않으냐를 떠나서,
'19세기 경제학자들과 21세기 사람들과의 만남'이라는 인위적인 설정 자체가,
경제학이 우리 삶과 즐거운 접점을 시도하는 것일 테니까요.
아주아주 긍정적인 시도입니다.
#보탬1.
쓰다보니 서론에서 시작해 서론으로 끝나버렸네요. 다음엔 본론을 올릴께요. ^^;
#보탬2.
오늘날 맹위를 떨치고있는 경제학은 신자유주의 경제학이라는 말씀을 드렸었죠.
얼마 전 <10년 후 한국>을 낸 공병호 소장을 비롯해서 유수의 경제학자들이 인용하는 <자본주의와 자유>가, 바로 신자유주의가 이론적으로 생산된 시카고 학파 밀턴 프리드먼의 저작입니다.
신자유주의 관련해서는 밀턴 프리드먼과 F.A.하이예크의 <노예의 길>을 꼭 읽어보셔야 해요.
여튼, '新자유주의'에서 '新'을 빼면 '자유주의'인데,
20세기 말에 새롭게 시작하려는 '舊자유주의'가 바로 [생각의 나무] 출판사의 고전경제학 시리즈들입니다.
묘한 맥락이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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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이란 학문 자체가 짠하고 세상에 나오게 한 사람들을 고전경제학파라고 합니다.
유명한 사람으로는 『국부론』의 아담 스미스, 『정치경제학 및 과세의 원리』의 데이비드 리카르도 등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모르고있는, 고전경제학파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 중에 하나가 바로 '중상주의'입니다.
고전경제학이란 '중상주의'에 대한 반정립으로 나왔거든요.
"중상주의는 우리를 풍요롭게 하는게 아니야!" 하면서 나왔습니다.
중상주의가 지배적인 시절에는 무역이라는 것 자체에 대해 억압적이었죠.
예를 들어, 영국이 프랑스에서 쌀 10가마를 사고 금을 한덩이 주면, 금이 유출된다 하여 싫어했습니다.
'자국이 보유한 금'이 바로 부의 척도였죠.
무역을 못하게 하니, 무역하는 사람들이 가장 불만이 많았겠죠.
오늘날 세계무역기구(WTO, World Trade Organization)가 각국의 관세를 없애고, 자유로운 무역을 하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고전경제학파는 '무역'을 아주 좋아합니다.
무역이란, 내꺼 팔고 니꺼 사는건데요. 이게 대충 분업이죠.
고전경제학파 경제학자들의 이론을 보면,
'분업'에 대한 강조가 꼭 있습니다. 아담 스미스는 분업 일반에 대해서, 데이비드 리카르도는 국가간 분업인 자유무역의 이로움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저는 자유무역에 초점을 두고 말씀드릴께요.
# 서울과 부산 對 칠레와 한국
한-칠레 FTA 협정이나, 쌀시장 개방, 등등 자유무역과 관련한 진통들을 옅보면서,
자유무역이란 것에 대해서 한번쯤 고민해보신 분들이라면.
국가 내 자유무역과, 국가간 자유무역의 차이점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세요.
서울 사람이 부산에 물건 파는건 아무렇지 않은데, 칠레 사람이 한국에 농산물 파는건 왜 문제가 될까.
위에서 말씀드린 중상주의가 지배적이었던 시절에는,
서울 사람이 부산에 물건 파는 것에도 세금이 붙고 그랬다고 합니다. 그래서, 서울 상인들은 집단적으로 반발해서 프랑스 혁명같은 부르주아 혁명을 일으켰죠.
그래서, 국가 내 자유무역이 성립이 되었습니다.
서울을 서울 나름대로, 부산은 부산 나름대로 생산의 이점들이 있겠죠.
그 이점을 활용하는 것이 바로 분업이고 무역입니다.
사람 많은 서울에서는 공장 지어 물건 만들고, 바다와 가까운 부산에서는 물고기 잡습니다.
그리고, 공산품이 필요한 부산 사람들과 생선 요리를 좋아하는 서울 사람들이 서로 교환을 합니다.
이렇게 분업에 의한 특색화가 진행되면서,
우리는 어디는 무슨 도시, 어디는 무슨 도시 하는 명칭들에도 익숙해지게 됩니다.
국가 간 무역도 본질적으로 마찬가지 아닐까요.
도시 뿐만 아니라 국가 전체적인 생산의 이점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이점을 살려서 자유무역을 하는 것은 참 바람직한 일이겠죠.
하루 24시간 우리가 소비하는 것들을 모두 직접 생산한다는거,
쉽게 상상하실 수 없을겁니다.
현실적인 얘기로,
한국의 경우 자동차, 무선통신, 반도체, 조선과 같은 주력산업이 있고,
이 주력산업을 하기 위해서는 중동의 석유나 해외 자원들이 꼭 필요하죠.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우리는 세계적인 분업체제에 한발을 담그고 있는 것입니다.
# 우회적으로 부유해지는 방법
제가 위 단락에서 말씀드린 '효율적인 생산을 위한 분업'.
이것을 수치적으로 정식화 한 것이 데이비드 리카르도의 '비교우위론'입니다.
영국에서 반도체보다 자동차를 더 잘 만들고,
프랑스에서 자동차보다 반도체를 더 잘 만든다면,
한 국가 내에서 비교우위가 있는 영국의 '자동차'와 프랑스의 '반도체'를 교환하는 것은 양국에게 이롭다는 것이죠.
『The Choice』에서 1960년대 미국으로 내려온 하늘나라의 리카르도는 '비교우위론'이라는 딱딱한 명칭 대신,
'우회적으로 부유해지는 방법'이라고 표현하죠.
영국에서도 직접 반도체를 만드는 것 보다,
자동차를 프랑스에 판 돈으로 프랑스에서 반도체를 사다 쓰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것입니다.
# 자원의 효율적 배분
왜 효율적인고 하니, 바로 '자원의 효율적 배분'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자원이란, 꼭 석탄/석유와 같은 지하자원 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생산에 필요한 여러 요소들을 모두 포함하죠.
국가마다 특성이 있으니만큼,
우격다짐으로 한 국가가 반도체, 자동차, 모두 만들기 보다는,
반도체 만들기 좋은 국가(프랑스)는 반도체만 만들고, 자동차 만들기 좋은 국가(영국)는 자동차만 만들자는 겁니다.
어차피 각국의 주력산업,
우리나라의 반도체, 자동차, 조선, 무선통신, 등등은 자국의 제품들이 경쟁한 결과로 선택된,
자국의 생산입지에서 가장 유리한 제품들일테니까요.
# 괴리에 있어서 현명한 판단을
개인적인 오만인지 모르겠지만,
전 여기까지를 부정할 사람은 별로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자유무역을 두고 현실에서는 티격태격입니다.
현실의 자유무역화란 실제 굉장히 폭력적인 과정이죠.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려는 국가와 그 국가의 수출품에 매기는 보복관세와 같은 국가 간 갈등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취약한 산업들의 경우 엄청난 반발이 있기도 하죠.
이론과 실제.
이 괴리에 있어서 우리는 현명한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세계화가 대세이니 모든 산업의 경쟁력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침튀기는 사람들이나,
자유무역에 반대하는 모든 갈등들이 당장 자기 이익에만 집착한 '직관적 판단'이라 매도하는 사람들이나,
자국의 산업을 몰락시키는 세계화는 나쁜 것이라고 말 그대로 '직관적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이나,
그다지 현명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 다양한 스펙트럼
사람들은 흔히 명쾌하게 말할 것을 주문합니다.
"그래서, 니가 하고싶은 말이 뭐야?"
전 "윽박지르지 마세요." 라고 말하고 싶군요.
이 좋은 자유무역을 두고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져 있다 하더라도,
실제 찬성하는 측이든, 반대하는 측이든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습니다. 찬성하는 이유, 반대하는 이유는 제각각입니다.
요즘 TV에서 하는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를 보면,
극중 소지섭은 실로 다양한 행동을 하지만, 그 이유는 자신을 버린 어머니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잖아요.
소지섭군이 서지영양에게 접근한다고 해서, '소지섭이 서지영을 좋아하는구나' 라고 감탄하는 사람이 있다면?
'TV 좀 봐라.' 그러겠죠.
# 스펙트럼 나눠 보기
'사랑'이란 것은 마냥 좋은 것이지만,
현실에서의 사랑이 보여주는 모습이란 천차만별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누가 어떤 마음으로 사랑하느냐의 차이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유무역 역시도 마냥 좋은 것이지만,
누가 어떤 이유로 추진하느냐에 따라 현실에서 드러나는 모습은 달라지는 것입니다.
지금 자유무역을 추진하는 주체가,
리카르도가 강변한 자유무역의 진정한 장점인 '자원의 효율적 분배'니 '우회적으로 부유해지는 방법'을 위해서 추진하고있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 선택, 합의 對 압박, 생존
아시겠지만, 자유무역을 추진하는 힘이란 '자원의 효율적 분배'에 대한 공정한 합의가 아닙니다.
'자원의 효율적 분배'를 대의로 밀어붙여지고 있죠.
제가 이렇게 뭉뜽그려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오늘날 세계화의 화두가 되고있는 국제무역기구들 때문입니다.
세계화 하자면서도, 실제로는 크게 NAFTA, EU, ASEAN, APEC, ASEM, 등으로 쪼개어져있죠.
이중 결속력이 강한 것은 NAFTA와 EU뿐. (결속력이 약한 ASEAN에 대한 NAFTA와 EU의 구애의 결과가 바로 APEC과 ASEM입니다.)
이렇게 자국의 이해를 중심으로 시장을 넓히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세계화가 '자원의 효율적 분배'를 위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근거가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결속력이 약한 - 즉, 자국의 이해를 반영할 시장이 좁은 - ASEAN 이나 중국, 일본, 러시아와 같은 국가들에게 세계화란,
선택이나 합의가 아니라 압박이고 생존의 논리가 되는 것입니다.
압박에 의해 이루어진 '자원의 분배'가 '효율적'이라는 수식어를 달 수 있을지는 정해져있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갑동에서 빵장사를 하던 갑이 을동에서 신발장사를 하던 을에게,
" 빵을 만들기엔 갑동이 더 낫군. 내가 보니 을동에서는 신발 만들기가 더 좋구.
을, 자네 갑동에다 신발 팔게. 대신, 난 을동에 빵 팔게. " 라고 한다면?
갑동의 신발장사들과 을동의 빵장사들은 억울하지 않을까요?
사실, 갑은 자기 빵을 을동에서도 팔려고 할 뿐인데.
# 윽박지르기
얼마 전에, 공병호 소장의 <10년 후 한국>을 보니,
곧 몰락할 위기에 놓인 한국 농업인들을 보고 그동안 정부가 준 지원금으로 경쟁력 향상 안시키고 뭐했냐고 하시던데,
이다지도 윽박지르시다니.
이 분은 자유무역의 요체인 '자원의 효율적 배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걸까요.
정부가 준 지원금이면 한국 농업은 동등한 경쟁의 조건을 갖춘 것이고,
농업인들이 제정신만 차렸다면 모든 산업을 한국이 떠맡을 수 있다는 생각이신지?
갑이 을과 자유무역 체결하면서, 갑동 신발장사들에게 윽박지르기까지 한다면?
좀 그런데요?
하긴, 공병호 소장님.
자유무역이 무엇인지에 대한 얘기는 없고, '대세' '추세'만 강조하시더라구요.
# 자원의 이동성에 대해
자유무역에 따른, 전체적인 부의 증대, 그리고 일자리의 교환.
당장 국내 취약 산업의 일자리는 사라지더라도 주력 산업의 일자리가 늘어나니 손해보는 장사는 아닌데에다,
주력산업이 활기를 띄니 경제가 활력을 보일 것이라는 소기의 목적.
그런데, 못된 사랑이 파국으로 치닫는 것 처럼,
주체와 방법이 비틀어진 자유무역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데에도 어려움이 있음은 어쩌면 당연한 결론일런지요.
일단, 갑동의 을동에서 빵을 팔게된 갑이,
갑동에서만 빵을 만들라는 방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갑동의 신발장사 중 빵공장에라도 들어가려고 준비하고 있던 이들 허탈해집니다.
을동이면 또 몰라도, 농업 하려고 칠레 건너가기는 힘든 일 아니겠습니까.
'자원의 각기 다른 이동성' 문제입니다.
세계화와 관련한 필독서로 알려진 한스 페터 마르틴의 <세계화의 덫> 서문을 보면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세계화라는 것이 일반 사람들 - 월급쟁이들을 뜻하겠죠? - 에게 살갑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는, 이동성의 문제가 크다는 것입니다.
기업하는 사람들에 비해 취업하는 사람들은 이동성이 떨어진다는 것이죠.
즉,
갑동에 빵공장이 증축될거라는 보장은 없는겁니다.
대신, 갑동 사람들은 을동 사람들과 경쟁력 싸움을 해야겠죠.
기업이 하나둘 한국을 떠난다는 '산업공동화'니,
주력산업에 대한 '경쟁력 강화 주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갑동 사람들, 갑에게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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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자유무역에 대한 찬반논쟁의 논점은 어느정도 왜곡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The Choice』의 경우, 데이비드 리카르도의 ‘비교우위론‘을 쉽고 재미있는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을 목적으로 쓰여진 듯 한데, 비교우위론이란 아직까지도 자유무역 찬성론자에게 두고두고 인용되는 고전이론입니다.
제가 자유무역에 대해서 선뜻 찬성이니 반대를 논하지 않으면서도 굳이 『The Choice』를 들먹이는 이유는,
저자의 생각에는 동의하기 힘들지만, 어느정도 찬반논쟁상의 논점을 바로잡아 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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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우리는 한국 기업이 외국계 자본에 매입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흔히 반대론자들이 갖는 논점상의 왜곡입니다.
얼마 전에 소버린이라는 투자기관이 LG그룹의 경영권을 인수할 ‘뻔’한 일이 있어서 이슈가 되었던 그런거요.
기업의 인수합병이 어제오늘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이슈가 되었던 이유는, 주체가 외국계 투자기관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을겁니다.
흔히들, 외국계 투자기관은 핫머니(hot money)니 뭐니 해서 기업경영에는 관심이 없고, 자산 불리기에만 관심이 있다고 하는데,
외국계 자본은 그렇고, 한국계 자본은 그렇지 않다는 믿음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지.
굳이 역설할 필요없이 현실적인 예를 들어볼께요.
01년에 대우자동차가 GM에 매각된다고 말이 많았었는데, GM에 매각되어 GM대우가 된 이 자동차회사. 어떤가요?
버젓이 자동차 개발하고 생산하고, TV에 광고도 내고있습니다. 매각되면 무너진다던 부천경제 역시 그대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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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을 자본으로 보지않고, 자본의 국적을 따지기 때문에 자유무역의 진정한 논점이 왜곡됩니다.
그럼, FTA라는 국가간 협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상호간의 무역과 투자에서 자본의 국적을 빼버린다면?
시장의 확장만이 남게됩니다.
‘자원의 효율적 분배’도, ‘국가기반산업의 보호’도 결국은, 시장의 확장에 대한 찬성반대를 두고 그럴듯한 명분을 붙인 것 뿐입니다.
한번 속는 셈 치고, ‘시장의 확장‘을 논점으로 자유무역의 찬반논쟁을 살펴보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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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이 확장된다는 것의 의미.
그런데, 시장이란 재화나 서비스를 매매하는 공간에 불과하니만큼, 같은 확장이라도 매매의 주체마다 느끼는 바가 다릅니다.
A국가의 특정산업에서 업계순위를 A1, A2, A3가 각각 차지했고, B국가의 특정산업에서 업계순위를 B1, B2, B3가 각각 차지했다면,
통합된 A, B 양국의 특정산업시장에서 업계순위는 A1-B1-B2-(A2-B3-A3) 뭐 이런 식으로 되겠죠?
이렇게 되면, 소비자들에게는 선택의 폭은 넒어진 것을 제외하고는 큰 문제가 없어보입니다.
하지만, 생산자들은 다르죠. 상위 3개 업체만 살아남을 수 있는 업계특성상 과거 A2, B3, A3가 차지했던 시장은 A1, B1, B2에게 적당히 흡수될테니, 상위 3개 업체들 입장에서는 더 넓은 시장과 더 많은 이윤을 뜻합니다. 물론, 하위 3개 업체들은 아니겠죠.
#
이제 예상했던 반응을 기준으로 찬성반대로 편가르기를 해보죠.
[소비자와 A1, B1, B2] - [A2, B3, A3]
이렇게 나눌 수 있습니다. 전자는 찬성을 후자는 반대를 할 것이라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 간단한 편가르기에서 또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소비자 그룹이 제 예상과는 달리(훌쩍) 현실에서 그다지 목소리를 내지 않는 것도 특이할 만한 사항이구요. 생산자 그룹이 찬성과 반대로 나뉜 것이 인상적이에요.
찬성과 반대로 적당히 나뉜 생산자 그룹의 경우, 현실에서 나타나는 그대로입니다. 찬성 그룹은 반대 그룹의 ‘경쟁력 없음‘ 을 질타할 것이 뻔하죠.
그럼, 이 생산자 그룹에게 남는 선택이란, B국가에서 업계순위 2위를 하던 B2社와 같이 경쟁력 상승을 도모하야 업계 3위로 살아남는 방법 밖에는 없는겁니다.
오늘도 경쟁력 내일도 경쟁력. 다들 노력해도 승부는 상대순위겠지만.
한편, 소비자 그룹의 경우 현실에서 그다지 목소리를 내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소비자인 동시에 생산자이기도 하기 때문일겁니다. 소비자가 아마 위 6개 중 어느 한 곳에 소속되어 찬성이든 반대를 주장할 것입니다.
결국, 이론상의 편가르기가 아닌 현실의 편가르기는,
[A1, B1, B2] - [A2, B3, A3]
이렇게 되겠네요.
생산자의 이해관계가 소비자로서의 이해관계에 우선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의미심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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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자유무역에서 중요한 논점은 ‘시장의 확장’ 이고, 시장의 확장에서 중요한 것은 생산자의 이해관계라는 그림을 그려봤습니다.
생산자의 입장에서 시장의 확장이란, 더 많은 생산요소를 이용할 수 있는 기회임과 동시에 경쟁의 심화를 뜻합니다.
생산요소. 고등학교 때는 토지-자본-노동 이렇게 배웠는데, 이제 토지-자본-노동-지식 이렇게 된다더군요.
여튼 이런 생산요소들을 더 널리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선택의 폭이 넓어진거죠. 그리고, 넓어진 선택은 더 나은 조합을 만들어내기도 할 것입니다. 찬성론의 명분인 ‘자원의 효율적 분배’ 가 여기서 나오게됩니다.
하지만, 더 많은 생산요소를 이용할 수 있는 대가는 경쟁의 심화입니다.
그 결과에 따라, 상위 3개 회사는 추가적인 시장을 확보할 수 있고, 하위 3개 회사는 자신의 시장을 잃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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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엉터리 그림을 인내심과 더불어 지켜봐주신 분이라면,
자유무역 찬성론자들의 ‘자원의 효율적 분배’ 가 왜 명분에 불과한지를, 그리고 왜 소비자의 목소리보다 생산자의 목소리가 더 큰지를 알게되셨길 바랍니다.
‘자원의 효율적 분배’ 는 시장의 확장에 따른 단면만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찬성론자들이 ‘자원의 효율적 분배’ 만을 부각시킨다고 표현하는 것이 낫겠군요.
자원의 효율적 분배란,
나의 토지 대신에 타인의 토지를 사용할 수 있듯이, 나의 노동 대신에 타인의 노동을 사용할 수 있음을 뜻하고, 물론 동시에 타인의 노동 대신에 나의 노동을 사용할 수 있음을 뜻하고, 결국 그의 노동과 나의 노동이 생존의 경쟁을 해야함을 뜻하기도 합니다.
선택은 국적이 아닌 상대순위입니다.
그리고, 상품의 꽃(?)은 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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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90년대 초반까지 FTA에 반대하다가 뒤늦게 이에 합류했습니다. 한-칠레를 시작으로 미국, 일본, 싱가포르, 아세안에 이어 인도, 유럽까지 확장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한국이 회원국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다자간협정인 WTO에 머무르고 싶었던 것은, 아마도 B2社와 같은 어정쩡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일겁니다.
다자간협상이라는 방식은 모 아니면 도와 같은 방식이었는데, 이것이 난항을 겪으면서 FTA라는게 등장합니다. 협정을 맺은 상호국 사이에 WTO협정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특혜협정이 가능한 FTA.
땅따먹기 하듯이 EU는 물론, NAFTA(북미대륙FTA)니 AFTA(아세안지역FTA)가 잠식해오는데, 눈치만 보고있다가는 순식간에 따가 될수도 있는 상황이었죠.
뒤늦게 FTA를 추진하기 시작한 한국에서,
앞으로도 찬반논쟁은 계속될 수 밖에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