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영호 옮김 / 민음사 / 199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0.

<노동의 종말>이라는 책을 보고 있습니다.
이전 북클럽에서 독서후기를 읽고 충동구매한 경우죠. 허허 ^^;

'노동의 종말' 이라는 문제의식이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종말' 이라고 하니까 좀 무서운데, 익숙한 표현으로는 '20대 80의 사회' 가 있겠죠.

20대 80의 사회라는 것은,
빈부격차를 표현하기도 하지만,
20의 사람만으로도 100을 먹여살릴 수 있다는 표현이기도 하죠.
80의 사람이 해야할 일은? 기계가 대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술' 이라는 것에 대해서 가지는 이미지는 굉장히 좋은 편입니다만,
이것이 또 하나의 편견이고 선입견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1.

전 '기술' 하면, 핸드폰 광고가 먼저 떠오르는데요.
정말 매일 같이 새로운 핸드폰들이 출시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우린 그 광고들을 보면서,
'와 세상 좋아졌다.' 라는 생각과,
'아 갖고싶다.' 라는 생각을 하게되겠죠.

'와 세상 좋아졌다.' 라는 생각이,
바로 우리가 '기술' 에 대해 가진 좋은 이미지입니다.

그 핸드폰을 샀을 때,
우리가 누리게 될 놀라운 기능과 그만큼의 편의가,
우리를 설레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새로운 기술이 우리에게 편의를 제공하지 못한다면?
아마 기술을 싫어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
식상한 예로 공장에 도입된 자동생산시스템 덕분에,
10명이 하던 일을 5명이 할 수 있게 되었다면?

아마 그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 기술을 싫어하지 않을까요?

아시겠지만,
흔히 핵폭탄을 예로 들어 설명하는, 좋은 기술과 나쁜 기술에 대한 얘기가 아닙니다.
더 많은 편리와 효율을 제공하는 좋은 기술인 산업 기술에 대한 얘기입니다.

분명, 좋은 기술임에도 불구하고,
좋아하고 싫어함이 나뉜다는 것.
우리가 가진 기술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재고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2.

좋은 기술이냐 나쁜 기술이냐를 판가름 하는 기준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기술 자체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것입니다.

다만, 그 기술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좋은 기술이냐 나쁜 기술이냐를 판가름 하는 것입니다.

더 많은 편리와 효율을 제공하는 좋은 기술의 하나로 이미지화되어 있는 산업 기술도 마찬가지입니다.
산업 기술 자체는 좋은 것임에도,
이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그 가치판단을 달라질 수 있는겁니다.

3.

산업화되어가는 농촌 마을(가칭 책마을)을 예로 들어볼까요.

요즘 농촌은 예전처럼 이땅은 박씨네땅, 저땅은 윤씨네땅, 이런 식이 아닙니다.
마을 사람들은 변하지 않았지만, 땅주인은 변했죠.
마을의 몇몇 사람(촌장)이 대부분의 땅을 소유하고 있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 땅에서 일당을 받으며 생계를 꾸립니다.

손으로 하던 추수를 기계로 한다고 생각해봅시다.
여러 사람이 몇시간에 걸려서 해야하는 추수를 기계로 하면 금방 끝나겠죠?

이 성범표 자동추수기를 박씨네땅, 윤씨네땅에 들여오면,
매일 저녁 평상에 앉아 쉬고있는 박씨와 윤씨를 볼 수 있겠지만,
이 성범표 자동추수기를 박씨와 윤씨가 일하는 농장 주인에게 판다면,
아마 매일 저녁 일자리를 구하러 읍내에 다녀오는 박씨와 윤씨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4.

성범표 자동추수기는 고장도 잘 안나고 정말 좋은 기계임에도 불구하고,
박씨와 윤씨를 웃게도 하고 울게도 하니.. 조금은 아이러니하네요.

그렇습니다.
산업 기술 자체는 좋은 것임에도,
이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그 가치판단을 달라질 수 있는겁니다.

산업 기술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문제는,
곧 산업 기술을 도입하는 이유와 주체의 문제입니다.

누가, 왜 기술을 도입하느냐는 것입니다.
'왜'는 '누구'의 이해관계에 불과하니까,
누가 기술을 도입하느냐가 중요해집니다.

박씨와 윤씨가 도입하느냐,
아니면, 농장 주인이 도입하느냐.

박씨와 윤씨가 도입하면, 산업기술은 일을 줄이겠지만,
농장 주인이 도입하면, 산업기술은 일자리를 줄이는겁니다.

기술 자체는 중립적이되,
자본주의적 생산방식 아래에서의 기술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은 셈입니다.

5.

이런 역설적인 현실은,
그대로 역사의 한 장면으로 남게됩니다.

산업혁명 초기 영국에서는 러다이트 운동(기계파괴운동)이라는 것이 있었거든요.
100명분의 일을 거뜬히 해내면서 자신의 일자리를 쫓아버린 기계를 미워해버린 영국사람들을 보면서,
웃어넘길지도 모르겠지만.

역사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바로 오늘 오래전 영국과 같이 효율적인 생산과 더 많은 이윤을 위한 새로운 기술들은 계속 도입되고,
오래전 기계를 파괴했던 영국의 노동자들과 같이,
오늘날 한국의 노동자들은 신기술 도입 시 노동조합과 사전 협의를 하라며 신문 한구석을 장식하기도 합니다.
기업의 경영권을 침해하고, 신기술의 도입을 방해한다는 누명이 씌워진 채로.

씁슬한 현실입니다.

6.

제러미 리프킨은,
그의 저서 <노동의 종말>의 2/3 이상을 미국의 근대사를 예시로 들어,
기술의 발달과 그에 따른 일자리의 감소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실제, 경제학을 전공한다는 경제학자들 또한,
기술의 발달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시장과 고용의 창출을 부각시키고 있지만,

이는 기술 발달의 단면을 나타내는 것일 뿐,
실제, 새로운 기술의 도입이 새로이 고용하는 사람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을 쫓아낸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경제는 기업의 힘만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기업이 만든 상품을 구매하고 기업에 이윤을 만들어주는 사람은, 크게 보아 그 기업에 고용된 노동자이기 때문입니다.

효율을 기치로 한 서로간의 경쟁으로 너도나도 인력감축에만 열을 올려,
전 산업에 걸쳐 실업자와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양산하는 지금의 추세는,
상품의 구매자를 재료로 상품을 만드는, 즉 스스로의 존재기반을 무너뜨리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윤과 시장, 시장과 경쟁이 없는 자본주의를 상상할 수도 없는 노릇.

우리는 이런 예측 가능한 비극 속에서,
오늘도 일자리를 찾아 헤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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