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의 꿈
배일도 지음 / 위즈덤아카데미 / 2004년 1월
평점 :
품절


1.
덩치가 크고 힘이 센 도둑이, 지하철에서 퇴근길 시민의 지갑을 여럿 훔쳤다.

이 때 누군가가 " 내 지갑! " 하고 외쳤고,
도둑은 열린 문을 박차고 황급히 달아나기 시작했다.

순간 자신의 지갑도 없어진 것을 깨달은 서너명의 피해자들이 도둑을 뒤쫓는다.

한참을 쫓아 따라잡은 도둑은 품에서 흉기를 꺼낸다.
그리고, 1:4 의 싸움이 벌어진다.

흉기를 가진 도둑이지만, 서너명의 협공을 당할 수가 없었고 땅에 쓰러진다.
지갑을 도둑맞은 피해자들은 도둑을 제압하기 위해 몰매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광경을 목격한 또 다른 시민이 나타나 싸움을 말린다.
비겁하게 4명이서 1명을 몰매하느냐는 것이다.
평소, 모든 싸움은 잘잘못 가릴 필요 없이 쌍방 모두의 과실이라고 생각해오던 이 사람은, 서로를 화해시키려 애를 쓴다.

2.
'21세기 새로운 문명 전환 시대의 생존법을 찾는 한 노동운동가의 자전적 에세이'라 선전된,
배일도씨의 <공존의 꿈>은 나에게 이런 그림으로 다가온다.

이 선배 노동운동가가 시종일관 주장하는 '공존의 철학'이란,
결국, 유럽 사회민주주의의 재판에 불과한 '민주적 시장주의'라는 도구를 가지고,
두 계급을 화해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비록, 신변잡기적인 에세이라지만,
그가 10년 가까이 고민했다는 노동운동의 미래는 몇줄에 불과하다.

정말 몇줄.
계급투쟁(그는 '대립구도'라고 표현했다.)은 비과학적이며, 현실적 대안이 사회복지제도에 기반한 '민주적 시장주의'라고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을 뿐이다.
나머지 글의 대부분을 근거없는 '공존의 철학'이 뒤덮고 있다.

3.
물질적 근거가 제시되지 않은, 그저 공존의 가치가 가진 우월성만 나타내는 것이 공존의 철학이라면,
그것은 감정적 화해와 다를 바가 없다.

계급투쟁과 감정적 화해.
그런데, 이 둘은 서로 다른 영역의 언어인 것이다.

유물론이니 관념론을 구분하는 현학적인 태도로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감정적 화해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그것이 단지 관념적 언어라고 낙인을 찍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존의 철학'은 그가 진보라 규정한 '실천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관념적 계몽은 계급투쟁의 물질적 기반에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할 것이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선배 노동운동가의 자전적 에세이를 읽는 것은 좋은 경험이 되었다.
더욱이 그가, 오늘날 노동운동의 전진을 가로막는 '관료'의 한 사람으로 상징되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가 공존의 철학을 세웠다는 10년은,
남한 노동운동이 후퇴한 10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쉽다.
그가 공존의 철학을 실천하는 행위는,
계급투쟁과 갈등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