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으로 꼽히는 나라들 가운데 성적표에 석차(등수)를 표기하는 나라는 일본밖에 없다. 우리나라 중고등학교 성적표에 표기되는 내신석차는 사실 일제강점기의 잔재인 것이다. 나머지 선진국들은 평점(A, B, C…) 또는 점수만 표기한다. 왜 그럴까?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석차는 이사(전학) 가면 바뀌게 되어 있다. 분당에 사는 학생이 대치동으로 이사하면 석차가 내려갈 것이고, 수원으로 이사하면 석차가 올라갈 것이다. 즉 내신석차는 객관적인 성취도를 보여주지 못한다. 게다가 내신석차는 학교에서 이뤄지는 교육의 질을 반영하지도 못한다. 예를 들어 학교교육의 질과 효율이 높아지든 낮아지든 어차피 똑같이 일등에서 꼴찌까지 매겨질 것이 아닌가?

둘째, 내신석차는 교사들의 수업을 획일화시킨다. 일본과 우리나라의 성적표에는 ‘학년 석차’가 매겨지는데, 이로 인해 황당한 일이 벌어진다. 갑 선생님이 1, 2반을 가르치고 을 선생님이 3, 4반을 가르친다면, 당연히 갑 선생님은 1, 2반만 평가하고 을 선생님은 3, 4반만 평가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학년 단위로 석차를 매겨야 하기 때문에, 1반에서 4반까지 똑같은 시험문제를 내야 하고, 똑같은 수행평가를 해야 하며, 성적에 반영되는 과제물은 똑같이 내줘야 한다. 결국 갑과 을 선생님은 ‘똑같이 가르치자’고 합의할 수밖에 없다! 교사 개개인의 노하우나 특성이 반영될 여지가 거의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붕어빵 교육’의 원인은 획일적인 대학입시나 교육과정의 경직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학년별 석차야말로 붕어빵 교육을 떠받치는 가장 기초적인 요인이다.

셋째, 내신석차는 동료들을 협력자가 아니라 경쟁자로 인식하도록 만든다. 최악의 상황은 이과반이 1개밖에 없는 여고들에서 나타나는데, 여기서 내신 1등급(석차백분율 4%)을 받을 수 있는 학생은 단 한 명뿐이다. 이런 환경에서 서술형·논술형 평가가 정착되기란 매우 어렵다. 석차에 민감해진 학생들이 ‘왜 쟤는 10등이고 나는 11등이냐’는 문제를 제기할 것이고, 교사는 결국 기계적인 채점기준을 제시할 수 있는 ‘무늬만 서술형’ 문제를 출제할 수밖에 없다. 특히 협동학습이나 프로젝트수업과 같은 진보적인 수업모델을 본격적으로 도입하기란 거의 불가능해진다. 개인별로 매겨지는 석차를 높이려면 동료를 제쳐야지, 동료를 도와줘선 안 될 일이다. 그러니 무슨 놈의 협동이고 프로젝트인가.

진보진영은 내신성적을 선호한다. ‘교육희망네트워크’에서 정리한 ‘10대 의제’를 보면, 수능과 일제고사를 폐지하자는 항목이 나온다. 이것은 석차에 기반한 내신성적이 얼마나 해로운지를 미처 헤아리지 못하는, 진보진영의 무신경을 보여주는 그야말로 ‘구습’일 뿐이다. 내신석차를 내버려두고 수능을 폐지하면, 고등학교는 일본 영화 <배틀 로얄>처럼 ‘남을 죽여야 내가 사는’ 살벌한 전쟁터가 될 것 아닌가? 참여정부의 내신위주 대입제도를 경험한 2008학번들에게 물어보라. 고1 1학기 중간고사를 보고 자살한 학생이 여럿 있었다.

대학에서 내신성적으로 학생을 선발하는 나라들이 있기는 하다. 스웨덴과 캐나다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 나라들은 학벌 문제가 우리나라보다 훨씬 미약하기 때문에 내신성적으로 선발해도 큰 무리가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나라들의 내신은 상대평가가 아니다. 게다가 스웨덴에서는 내신성적이 나쁜 학생들에게 별도의 대입 국가고시를 치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일종의 패자부활전인 것이다. 수능과 일제고사로 전국적으로 줄 세우는 것이 비인간적이라고? 학교별로 학생들을 가둬놓고 이들 사이에서 줄 세우는 것이 더 비인간적이다! (한겨레/ 이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