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가디언>은 2005년 베를리너판으로 전환하면서 사람 얘기와 인터뷰 기사 등을 크게 늘렸다. 심지어 죽은 사람의 인생을 정리해주는 부음기사를 매일 두 면에 걸쳐 싣는 모험을 했다. 얼마나 끌고 나갈까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국내외 인물을 가리지 않고 <워낭소리>의 노부부처럼 평범한 사람의 인생도 의미를 부각시키면 되는 일이었다.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이었던 이종욱씨를 비롯한 한국인도 여럿 부음기사로 다뤄졌다.

우리나라와 판이한 점은 죽은 사람의 공적은 물론이고 과오까지 가차없이 드러낸다는 사실이다. <가디언> 부음기사의 객관성은 정평이 나 있어 ‘관 뚜껑을 <가디언>이 닫는다’는 얘기까지 있다. 누구나 죽음을 앞둔 처지이고 보면, <가디언>이 부음기사를 쓸 만한 공인이라면 살아생전에 언행을 경건하게 하지 않을 수 없을 터이다. 죽은 이에 대해 좋게만 보도하는 우리 언론과 매우 다른 모습이다. 두 대통령 서거 당시 <한겨레> 보도 태도에도 ‘역사적 기록’이라는 차원에서 치우침은 없었는지 뒤돌아볼 일이다.

우리나라 신문에서 사람 소식을 전하는 면은 부음란을 빼고는 모두 경사스런 소식으로 채워진다. 연말에는 거의 미담기사와 희소식 일색이다. 어려운 환경에서 명문대에 입학한 학생의 얘기나 출세를 해 ‘자랑스런 동문’으로 선정된 이를 비롯한 각종 수상자들이 ‘사람’면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그룹마다 대규모 임원 승진 인사가 발표되는 시기도 이때다.

합격자 뒤에는 사교육을 받지 못해 쓰라림을 맛본 불합격자가 더 많고, 승진 인사 뒤에는 평생을 바친 직장을 떠나야 하는 해고의 비애가 서려 있지만, 거기에 주목하는 언론은 거의 없다. 대기업은 사기업인 동시에 우리 사회의 자산이 된 지 오래건만 재벌 총수의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능력 불문하고 초고속 승진을 해도 그저 ‘추인’하는 게 오늘의 한국 언론이다. 젊은 2, 3세 승계로 이어지면서 선대의 공신들은 한창 경륜을 펼칠 나이에 밀려나는 이들도 많다. 나이를 잣대로 능력과 의욕을 폄하하는 풍토는 나이든 사람들을 더 무능하고 의존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이른바 ‘사회쇠약증후군’을 만연하게 한다.

(한겨레, 이봉수 「‘잘나가는’ 신문에는 ‘사람 이야기’가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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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 2010-01-07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이 개를 물어야' 보도해주는 것이 언론의 생리라고, 너무 체념했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