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기행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9
김승옥 지음 / 민음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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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알려진 소설이라, 풍월이라도 도움을 주겠거니 생각 했었다. 하지만, 극중 ‘윤희중‘에게 ‘무진‘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지, 쉽게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사랑 없는 결혼과 정략적 출세로 나타나는 서울에서의 삶과 대비해 ’잃어버린 순수‘를 상징하는 것으로 짐작했지만, 막상 무진에서 그의 행보는 그와 조금 달랐다. 거리낌 없이 놀음판에 끼어들고, 순수를 상징하는 후배 ’박‘에게 일정정도 거리를 두고 대하며, 그가 흠모하는 ’하인숙‘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연민 이상의 느낌을 발견하기 힘들었다. (물론, 앞서 나열한 윤희중의 행보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것들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순수와 선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무진에서 그의 시선이 머무르는 곳이나, 회상으로 드러나는 무진에서의 생활은 설익은 추측을 더욱 강하게 뒷받침하였다. 그의 시선은 무진의 초여름을 이기지 못하고 미쳐버린 술집여자며, 적막한 거리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교미하는 개들에 머무른다. 동기생 ‘조’로 대변되는 무진의 주민들은 허영과 출세욕을 내비치고, 서로를 속물이라 생각하면서도 표리부동 한다. 또한, 징집을 피해 골방에 숨어 지내야 했고, 지인들에게 절박한 편지를 쓰며 무진을 벗어나고자 했던 윤희중의 무진. 그의 무진은 결코 순수하지만은 않았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나는 윤희중의 부끄러움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무진을 떠나며 하인숙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였던 것이다. 하인숙에게 약속했던 서울은 바로 몇 일 전 그가 떠나온 곳이었다. 더구나, 하인숙은 골방에 틀어박혀 외로움을 토로하는 윤희중이고, 무진을 벗어나 서울을 동경하는 윤희중이었다. 그저 ‘하인숙’, 그저 ‘윤희중’. 사람의 이름 석 자를 제외하고 그의 부끄러움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를 나는 찾지 못했다.

결국, 나는 이것을 ‘연민‘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부끄러움을 느꼈던 이유는 ’세상의 속물들‘을 매질하는 어떤 숭고한 ’가치’에 반해서가 아니라, 그저 ‘나’에 대한 연민, 더러운 세상 속에서 더럽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에 대한 연민이었던 것이다. 이제야 나는, 김훈 선생님의 소설평에 등장하는 수많은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집에 가는 길에 선생님의 신작 <공무도하>를 사야겠다.

“그 여자의 <목포의 눈물>은 이미 유행가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나비부인>중의 아리아는 더욱 아니었다. 그것은 이전에는 없었던 어떤 새로운 양식의 노래였다. (중략) 그 양식에는 머리를 풀어헤친 광녀의 냉소가 스며있었고 무엇보다도 시체가 썩어가는듯한 무진의 그 냄새가 스며있었다.” (<무진기행>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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