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조선)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
양자역학이 나오기까지의 고민과 토론 보여줘

20세기 초 인류 지성사에 큰 획을 긋는 물리학의 대혁명이 일어났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의 출현이었다. 상대성이론은 시간과 공간에 관한 개념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획기적인 이론이었고, 양자역학은 원자, 전자 등 미시세계의 신비를 밝힌 것으로 오늘날의 반도체, 컴퓨터 등 IT기술의 밑바탕을 마련한 기념비적 위업이었다. 상대성 이론은 아인슈타인 한 사람의 깊은 사고에 바탕하여 이루어진 개인작품인 반면에 양자역학은 아인슈타인을 비롯하여 보어, 파울리, 하이젠베르크, 슈뢰딩거 등 수많은 과학자들이 참여하여 이룩해 낸 공동작업의 소산이었다.

‘부분과 전체(Der Teil und Das Ganze)’는 이 연구의 핵심인물이었던 하이젠베르크가 양자역학이란 학문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이들 대석학과 나누었던 대화를 중심으로 문제점의 해결을 위한 고민, 발견의 상황과 그 후 학문의 전개과정을 정리한 회상록이다. 이 책은 딱딱한 물리학의 뒤에 숨어있는 인간의 열정과 고뇌, 열띤 토론, 그리고 예술과 철학, 여행과 친교, 정치적 혼란과 전쟁, 대과학자가 부딪혀야 할 시련과 고뇌가 실감나게 잘 묘사되어 있다. 물리학은 ‘기계적인 공식의 집합’이 아니라 숨쉬는 인간의 사회와 문화의 일부임을 느끼게 할 수 있는 과학저술 중 대표적 명저로 자리잡고 있다.

베르너 칼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는 1901년 남부 독일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뮌헨 대학의 비잔틴문학 교수였다. 그는 1925년에 젊은 대학생으로서 양자역학의 기본 방정식을 만들어냈으며, 이어 ‘불확정성의 원리’를 발견함으로써 세계를 놀라게 한 대단한 천재였다. 1927년에 불과 26세의 나이로 라이프치히 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며, 1932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1958년엔 뮌헨의 막스플랑크 연구소장을 맡았고, 1976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과학자로서 탁월했을 뿐 아니라, 일반인을 위한 대중강연과 책의 저술에도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피아니스트로서도 상당한 경지에 올랐다.

원자는 핵과 전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마치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듯이 ‘전자가 핵의 주위를 궤도를 따라 돌고 있다’는 것이 하이젠베르크가 원자의 연구에 들어섰을 때의 과학적 물질관이었다. 이러한 개념으로는 원자의 성질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물리학자들은 안개 속에서 헤매는 상황이었다. ‘부분과 전체’의 제5장 ‘아인슈타인과 나눈 대화’에는 당시 연구자들의 노력과 하이젠베르크가 양자역학의 방정식을 찾아내는 과정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원자물리학도 이와 비슷했다. 1924년에서 1925년에 이르는 겨울학기에는 앞날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안개가 짙었다. 1924년 7월 이후 코펜하겐에서 강사로 있던 나는 1925년 여름학기에 다시 수소원자의 스펙트럼선의 강도에 대한 공식을 세우기 위한 연구에 들어갔다. 이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이 시도로부터 나는 ‘원자 안에서는 절대로 전자의 궤도를 문제 삼아서는 안되며 친구 오토가 발렌호로 가는 자전거여행 도중에 아인슈타인의 견해를 대변해서 주장하였던 그 철학대로, ‘관찰할 수 있는 양만을 원자의 결정요소로 간주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에너지의 표를 계산을 통해서 표현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최초의 1항으로서 에너지의 법칙이 확증되었을 때 나는 일종의 흥분상태에 빠져서 다음 계산이 자꾸만 틀리곤 하였다. 그 계산의 최종 결과가 나온 것은 새벽 3시가 가까워서였고, 그래서 나는 수학적으로 아무런 모순이 없는 완전한 양자역학이 성립되었다는 사실을 더 이상 의심할 수가 없었다. 흥분의 도가니에 빠진 나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본문 중에서 발췌 인용) 

소광섭 서울대학교 물리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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