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조선)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사랑의 원리를 분석하고 자본주의 비판

사랑은 삶에 있어 가장 매력적인 소재다. 주변에 광고, 영화, 드라마 등은 온통 사랑으로 넘쳐나지만 사람들은 좀처럼 여기에 질리는 법이 없다. 하지만 사랑만큼 기대는 큰데 성과는 늘 성에 차지 않는 것도 드물다. 그 놈의 사랑 때문에 불행을 달고 다니는 이들도 많고, 사랑에 대한 환상 탓에 주제 파악 못 하고 헤매는 사람들 역시 적지 않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사랑을 얻지 못하는 이유를 ‘작업 기술’의 부족에서 찾곤 한다. 그러나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의 저자인 에리히 프롬(Erich Fromm·1900~1980)은 보다 본질적으로 문제를 진단하고 처방을 내린다. 정신분석학자답게 그는 사랑의 작동원리부터 분석한다. 나아가 자본주의가 첨단으로 치닫던 20세기를 보낸 사회심리학자의 분석답게 프롬의 주장은 시대와 문명에 대한 비판과 맥이 닿아 있다.

우리는 왜 사랑에 빠지게 될까? 이유는 간단하다. 외롭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세상은 무섭고 버겁다. 고단한 인생 길에서 진정 나를 이해하고 함께 해줄 만한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사랑에 대한 절실한 갈망은 미숙한 사람들을 ‘사이비 사랑’으로 이끌곤 한다. 프롬은 마조히즘(masochism)과 사디즘(sadism)을 예로 든다. 마조히즘은 자기 스스로 기꺼이 다른 사람의 도구가 되어줌으로써 외로움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다. 적어도 자기가 숭배하는 인물에게 자신을 내던진 순간만큼은 그와 강렬한 일체감을 느끼지 않겠는가. 사디즘도 비슷하다. 사디즘은 자신의 힘 앞에서 공포에 질리는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의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태도다.

마조히즘과 사디즘은 기괴한 변태가 아니라 우리 생활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변질된 사랑의 형태다. “당(黨)이 결정하면 우리는 한다”라는 말처럼, 우리 주변에는 권위에 기대어 외로움에서 벗어나려는 마조히스트들이 많다. 사디즘도 그렇다. 학벌이나 돈으로 환심을 사려 하고, 미모로 환심을 사려 하는 사람도 사디스트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을 듯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사랑은 결코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지 못한다. 프롬은 진정한 사랑이란 “하나가 되면서도 둘로 남아 있는 상태여야 한다”고 말한다. 사랑은 자신의 영혼을 살찌우면서 동시에 상대도 성장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사랑으로 행복해지려면 먼저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부터 키우라”고 충고한다. 내가 필요해서 상대를 사랑하는 상태는 성숙하지 못한 정신의 응석일 뿐이다. 진정한 사랑을 하고 싶다면 ‘내가 사랑하기에 그대가 필요한 상태’에 이를 수 있도록 자신을 단련시켜야 한다.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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