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동양 = 야만’ 서구의 지배논리 분석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

비교문학자인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는 1978년 출간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에서 동양을 다룬 서구의 문학, 문화, 사상, 역사에 내재한 오리엔탈리즘, 곧 동양에 대한 왜곡된 관점을 비판하였다. 1935년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나 이집트의 영·미계열 학교와 하버드대 등 미국의 아이비리그에서 학위를 마친 그는 아랍 출신(동양)과 미국 학자(서양)로서의 내적 긴장을 소지한 이른바 경계인이었다. 그가 1967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이 났을 때 유럽과 미국의 언론이 아랍 사회를 반서구적·위협적 존재로 접근하는 방식에 주목하고 연구에 착수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오리엔탈리즘이란 본래 산스크리트어, 아랍어, 페르시아어 등 동양의 언어와 문학을 연구하는 ‘오리엔탈리스트’의 연구업적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오리엔탈리즘이 지난 2세기의 정치적 현실 속에서 형성되었음을 간파한 사이드는 동양을 다루기 위해 기획된 체제와 이슬람에 대한 편견, 동양과 서양 간의 이분법적 사고방식과 유색인과 여성에 대한 정복을 정당화하는 이념 등을 예리하게 비판하였다. 20세기 최고의 인문서로 평가되는 ‘오리엔탈리즘’은 30개가 넘는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 지성계에 새 물줄기를 열었고 지금도 여러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을 통해 유럽이 세계를 이해함에 있어, 친숙한 ‘우리 서양’과 낯선 ‘그들의 동양’으로 이분했다고 파악하였다. 가장 큰 대비는 ‘서구=문명’과 ‘동양=야만’이었다. 낙후한 동양인은 비합리적이고 타락한 어린애로,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어른인 서양인에 비해 열등하다고 간주되었다. 유럽은 근대 서구인의 동질적 시선으로 동양을 파노라마처럼 바라보고 열등한 타자(他者)로 정형화한 것이다. 서양을 가치의 중심에 두고 동양을 ‘불완전한 동양’으로 여긴, 동과 서라는 인위적 경계와 구분은 힘센 서양이 서양을 위해 서양과의 관계에 따라 동양을 규정하는 ‘정치적으로 옳지 않은’(politically incorrect) 사고방식의 소산이었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에서 몇 가지 주요한 사항을 주장하였다. 첫째, 오리엔탈리즘은 유럽의 정치적 목적, 즉 유럽의 비서구 세계에 대한 정복과 지배를 정당화했다는 것이다. “유럽 도서관에 있는 한 서가의 책이 인도와 아랍에 존재하는 모든 문학을 합친 것보다 더 훌륭하다”고 말하는 오만한 발언처럼 서양인은 동양 사회와 문화를 저평가하여 서구의 개입을 당연시하였다. 비합리적이거나 순진무구한 동양인은 이 잔인한 물질세계를 통치하거나 변화를 추진할 능력이 없고 따라서 아버지와 같은 서구의 도움으로만 진보와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여겼다.

둘째, 오리엔탈리즘은 서구가 자기 이미지를 구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동양을 부정적으로 인식하여 상대적으로 우월한 서구의 정체성을 확인하였다. 본디 정체성의 구성은 반대쪽 타자의 창출과 관련되는 법이기 때문에 서양이 우수하면 동양은 열등하고 동양이 후진적이고 비합리적이면 서양은 진보적이고 합리적이 되었다. 동양인이 나약한 여성과 미숙한 어린애라면 서구인은 그들을 돌보는 강한 가부장적 성인 남성이었다. 이는 백색 피부의 우수한 인종이 열등한 유색인을 가르쳐서 문명세계로 이끈다는 제국주의의 논리로 작동했다.

셋째,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을 거짓으로 기술하였다. ‘동양은 동양이고 서양은 서양이니, 그 둘은 영원히 만날 수 없네’라는 영국 시인 키플링의 시가 시사하듯 서구는 열등한 동양을 창조하여 본질적인 것으로, 영구불변의 것으로 박제하였다. 동양인은 본래 부정적이며 늘 그렇기 때문에 둘의 간격은 좁혀질 수 없었다. 수동적인 동양은 과학과 상업 분야 등 인류 진화의 주류에서도 고립된 변화의 무풍지대였다. 광대한 비서구세계를 단일한 ‘불변의 동양’으로 왜곡한 오리엔탈리즘은 영화, TV, 사진, 그림, 광고, 문학, 학술서적, 신문과 잡지 등을 매개로 반복적으로 재현되었다

‘오리엔탈리즘’에서 지적한 ‘발전한 서양과 낙후한 동양’이라는 식의 대비는 서구가 비서구 세계를 인식하는 고정불변의 공식이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이라크전(戰)에 대한 미국의 입장도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일견 이라크인을 판단력과 자기운명을 결정할 능력이 없는 어린애로 여기고, 영원히 어른이 못되는 ‘피터 팬’을 대신해 무지몽매한 지도자 후세인을 심판해주는 정의의 ‘샘 아저씨’를 자처한 셈이기 때문이다. 이라크의 테러와 무질서, 전근대성도 질서와 안정, 선진문명을 소지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정당화하는 상투적 표현이다. ‘미국이 미숙한 이라크인을 훈육하여 성숙한 어른으로 만든다’는 명제는 ‘우수한 인종인 서구인이 미개한 동양인을 지배하여 문명세계로 인도한다’는 19세기 서구 제국주의의 논리와 흡사하다. 오늘날의 대제국 미국이 가르쳐서 ‘어른’으로 키우려는 나라들이 아프가니스탄, 이란, 라이베리아, 북한 등 모두 비서구 국가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제국주의를 지지한 동양에 대한 서구의 차별적 인식, 곧 오리엔탈리즘의 유산이자 계속이다. 여기에 도전한 이가 에드워드 사이드이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을 쓴 목적이 서구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억압 받는 아랍과 제3세계를 방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오리엔탈리즘을 비판한 이 책의 출간 이후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비판과 비서구 문화의 상대적 진리에 주목하는 다양한 연구와 활동이 이어졌다. 특히 오리엔탈리즘이 제국주의의 정당화에 이용되었다고 밝힌 사이드의 통찰은 포스트콜로니얼(탈식민주의) 연구의 이론적 기반을 이루었다. ‘오리엔탈리즘’은 비서구인의 연구 활동, 하층민의 경험을 담은 역사서술, 페미니스트와 다른 마이너리티(소수자)의 담론에도 반영되었다.

식민지가 모두 사라진 오늘날에도 지구상의 절반을 ‘저주받은 자들’로 여기는 서구의 편견은 잔존한다. 무슬림은 여전히 잔인한 테러리스트로 인식되고, 인도는 늘 역동성이 부족한 신비한 나라이며, 일본은 가라테와 동일시된다. 사실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비판은 많지만 그것을 전복할 방법은 마땅치 않다. 사이드의 말처럼 되돌릴 수 없는 경계를 만들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어떤 사회가 다른 사회보다 우수하다고 믿는 건 누가 누구보다 행복하다는 주장처럼 어리석다. 글로벌화와 사람들의 교류와 이동이 활발해진 오늘날, 서양의 지배적 위치를 탈중심화하고 비서구 세계를 응시하며 오리엔탈리즘을 경계할 필요성은 그래서 한층 유효하다.

“…오리엔탈리즘은 유럽인의 경험 속에 자리하는 동양의 특별한 위치에 근거한, 동양과 타협하는 한 방식이다. 동양은 유럽에 인접할 뿐 아니라 유럽의 가장 크고 풍요하며 오래된 식민지였던 곳이고 유럽 문명과 언어의 근원이자 그 문화적 경쟁자이며, 유럽의 가장 짙고 가장 빈번히 재발하는 타자(他者)의 이미지들 중 하나이다. 나아가 동양은 유럽이 그 대조적 이미지, 사상, 성격, 경험으로 스스로를 정의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본문 중에서)

이옥순 연세대 연구교수·인도근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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