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에서는 시를 이렇게 정의한다. ‘시는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로 표현한 글’이라고. 나는 이 케케묵은 사전적인 정의를 대폭 수정하거나 폐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의 내용을 이룬다는 ‘인간의 사상과 감정’이라는 용어는 지나치게 포괄적이고 애매하다. 이 말을 ‘사람의 생각과 느낌’으로 순화시켜 읽어도 마찬가지다. 또한 시 아닌 다른 문학 장르에서는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다루지 않는가, 하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함축과 운율’이 시의 형식적 특성을 드러내는 용어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우리 시는 운율적 결속력이 대단히 미미해서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운율을 따지는 게 난처할 때가 많다. 한 편의 시가 인간의 사상적 체계에 관여하고 거기에 기여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사상을 해설하거나 추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감정을 드러내고 쏟아 붓는 일은 시작법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이다. 슬프다거나, 기쁘다거나, 당신이 보고 싶다거나, 풍경이 아름답다거나 하는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우리는 ‘고백’이나 ‘넋두리’ 혹은 ‘하소연’이라고 부른다. 그런 것들이 시의 일부분이 될 수는 있어도 시의 모든 것은 아니다.
자신에게 감정을 고백하고 싶으면 일기에 쓰면 된다. 특정한 상대에게 감정을 고백하고 싶으면 편지에 쓰면 그만이다.

시는 감정의 배설물이 아니라 감정의 정화조다. 속에서 터져 나오려는 감정을 억누르고 여과시키는 일이 바로 시인의 몫이다. “시란 개인적인 욕망에서 이루어지는 욕망의 발산 형식이 아니라 개인적인 ‘나’의 욕망을 억제하고, ‘나’의 욕망 가운데 가치 있는 어떤 경험을 선택하고 객관화하는 작업을 통해서 남과 다른 세계를 유형화해 보여주는 의도적 행위이다.”(오규원, <현대시작법>, 문학과지성사)

“내가 내 감정을 말하지 않아도 사물이 대신 이야기해 준다”고 눈에 번쩍 뜨이는 말을 해준 이는 연암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감정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물이 하는 이야기를 받아 적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시인의 받아 적기는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감정을 언어화하는 이 과정을 ‘묘사’라고 한다. 그러니까 묘사란 감정을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언어로 그려내는 것이다.

두 말 할 것도 없이 묘사는 관찰에서 시작된다. 관찰하기 위해서는 허리를 낮추거나 무릎을 구부릴 줄 알아야 한다.
혹시 들길을 걷다가 당신은 달개비 꽃잎 속에 코끼리가 한 마리 들어앉아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묘사는 시쓰기의 출발이면서, 또한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세상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자가 아니라, 세상을 세밀하게 그리는 자이기 때문이다.

서정시에서 흔히 자아가 대상에 스며드는 것을 ‘동화’ 혹은 ‘감정이입’이라고 하고, 거꾸로 어떤 대상한테 자아를 맡기고 비춰보는 것을 ‘의탁’ ‘투사’ 혹은 ‘투영’이라고 한다. 애처롭고 딱한 감정(惜)을 단순히 토로하는 게 아니라 꽃잎이 낡은 지붕을 덮는 객관화된 풍경과 동일시하는 이 기법은 묘사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묘사는 무엇보다 구체적 형상화에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시에서 구체성은 감동의 원천이고, 삶의 생생한 근거이기 때문이다.

시로써 말할 수 있는 게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묘사 한 줄 없이 자기 뱃속에 든 것을 줄줄이 쏟아 놓기만 하는 시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얼마나 말을 하고 싶었으면 시라는 형식을 빌려 일방적인 고백을 할까 싶기도 하지만, 시의 옷을 입고 이리저리 시달리는 그 언어는 또 얼마나 몸이 아플 것인가. 말을 하고 싶어도 참을 줄 알고, 노래를 시켜도 한 번쯤은 뒤로 뺄 줄 아는 자가 시인일진대, 어두운 노래방에서 혼자만 마이크를 잡고 있는 시인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한겨레, 안도현 시인·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임의로 발췌 편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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