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겨레)
흔한 것, 또는 흔했던 것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법. 일찌기 한옥의 아름다움과 유한함에 눈떠 그것을 사진으로 옮겼던 백안 김대벽. 그의 사진에서는 기와의 올록볼록 명암, 날아갈 듯한 처마선 등 한옥의 특징이 고스란하다. 더 들여다보면 보이지 않았던 게 드러난다. 벽에 걸리고 기대놓은 자잘구레한 살림살이들. 그가 기록하고자 한 것은 한옥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이었는지 모른다.
“그의 사진은 모든 디테일이 살아 있다. 종묘를 작업하면서 그의 사진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기록자로서는 자유로울 수 있었다.” 사진작가 배병우씨의 말이다. “그는 맑지만 옅은 구름낀 날씨를 좋아했다. 그 광선에서는 건물의 모든 부분이 세세하게 살아나기 때문이다. 실내도 이때만은 모든 부분이 선명한 사진을 얻을 수 있는 까닭이다.”
조수 노릇을 겸했던 장남 김일석씨는 아버지에 대해 “자연광과 삼각대의 중요성을 늘 강조했으며, 피사체에 담긴 주인의 숨결을 가장 잘 드러내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2006년 9월 이른여덟에 타계한 김대벽 추모 사진전 ‘한옥의 향기’가 한옥문화원(02-741-7441) 주관으로 21일부터 3월 5일까지 종로구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다. 이 자리에는 살림집 31점, 궁궐 20점 등 51점의 사진이 전시된다.
이 사진들은 그가 두고 떠난 방대한 사진자료 가운데 거죽에서 추려낸 일부분. 그가 한옥 사진 전문가여서가 아니라 비교적 후기에 한옥에 몰두한 탓에 쌓인 자료를 흐트러뜨리지 않고도 가려낼 수 있었기 때문에 정해진 주제다. 그의 전문분야는 한국의 문화재였다.
문화재와의 인연은 1959년 옛 황실재산사무총국(문화재청 전신)에 들어가면서부터. 4·19 혁명 직후 어수선한 가운데 새벽부터 궁을 순회하며 사진을 찍었다. 학원사 사진부장, 삼화인쇄 전속 사진가를 거쳐 1970년대 중반 프리랜서가 됐다.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 국립중앙박물관과 계약을 맺어 전국을 누비며 문화재를 촬영했다. 동시에 ‘한국인이란 무엇인가’라는 큰 주제로 우리 문화에 녹아든 한국인의 심성을 탐색했다. 웃음과 해학, 멋의 문화, 자연주의 등 외형적인 데서 내면에 스민 정신과 의식으로 옮아갔다. 그의 발길은 전국에 흩어진 바위, 사찰, 민가, 종가, 서원, 고궁에 이르고 1990년대부터는 국외로 뻗쳐 중국, 일본, 티벳, 위구르, 네팔, 인도 등에서 우리 문화의 맥을 찾았다. 저서만도 50여권.
따로 조수나 스튜디오를 두지 않고 집에서 작업을 한 탓에 그가 머물렀던 서울 집은 보물창고다. 그의 작업 결과가 묻히는 것이 안타까워 그를 그리는 이들이 기념사업회를 꾸려 끌어낸 것이 이번 전시회다. 집안 가득한 자료들의 위치와 출처를 꿰는 이는 그의 아내와 아들뿐. 그들은 언젠가 김대벽의 작품세계 전모를 내보일 진짜 회고전이 열리기를 고대한다.
“사진은 어떻게 찍느냐보다 무엇을 찍느냐가 더 어렵다.” “피사체는 흔히 찍히는 대상을 말하지만 그 속에 포함된 느낌이 더 중요하다.” 아들이 전하는 김대벽의 입버릇이었다.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