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자는 어떨 때 남자를 떠나는가. 그 남자와 내가 꼭 닮은 영혼이라는 실감에 진저리 날 때는 아닐까.

- 화려한 폐허를 딛고 가까스로 버티던 여자는 결단을 내린다. 헌신적인 그 남자를 버리고, 맞선 본 상대와 결혼식을 올려버린 거다. 학교를 졸업하면 상급학교로 진학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여자는 술회한다. 별안간 닥친 헤어짐 앞에서 남자는 울고 여자도 따라 운다. 이별은 슬픈 것이니까. ‘나의 눈물에 거짓은 없었다. 그러나 졸업식 날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도 학교에 그냥 남아 있고 싶어 우는 건 아니다.’

- 정지용, 한하운의 시를 읊고 독일 가곡 <보리수>를 들려주는 남자와 보내는 시간은, 현실의 것이 아니기에 더욱 아슬아슬한 도취의 순간이다. 여자는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대칭점처럼 꼭 닮은 사람, 상처 없이 해사하던 서로의 맨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 지상에 남은 마지막 사람인 그 남자와 함께 ‘생활’을 꾸려갈 자신이. 여자를 진정 불안케하는 남자는 바람둥이나 난봉꾼이 아니라, 허공에 반 발짝 떠 있는 ‘흔들리는 영혼’이다.

- 오십년 뒤, 여자는 옛날 그 남자네 집을 찾아간다. 그렇지만 다시 청춘으로 돌아간대도 여자는 여전히 불안한 남자로부터 도망칠 것이다. 씁쓸한 후회 뒤에 뒷맛처럼 남는 달곰한 추억의 여운. 떠나온 첫사랑의 남자란 여자에게 그런 존재다.

(정이현 한겨레 칼럼「그 남자 집에서의 회한」중에서, 일부 발췌 순서 임의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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