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겨레)

요즘 정치를 읽는 열쇳말은 뭐니뭐니해도 ‘프레임’이다. 그것은 간단히 말해 특정한 관점으로 정치의 ‘판’을 짜는 것이다. 프레임의 정치가 역사적으로 새로운 일도 아니다. 프레임의 힘을 보여주는 고전적인 사례인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를 보자. 시저가 살해된 뒤 브루투스는 시저의 권력욕을 고발하면서 ‘시저를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로마를 더 사랑했기 때문에’ 거사를 일으켰다는 연설을 한다. 군중도 그의 말에 수긍한다. 그러나 뒤를 이어 연단에 오른 앤터니는 브루투스가 명예를 아는 분이라고 입에 발린 칭찬을 하면서 시저의 위대한 점을 열거하기 시작한다. 시저는 충직하고 공정한 벗이었고, 수많은 포로를 잡아와 로마 경제를 살렸으며, 서민이 울 때 함께 울었고, 세 번이나 왕위를 제의받았어도 매번 거부했던 인물이 아닌가? 우리 모두 그를 사랑하지 않았던가? 앤터니는 시저가 죽게 된 핵심적 이유인 권력욕에 대해선 즉답을 피하면서 시저가 시민들의 좋은 친구였다는 주장만을 되풀이한 것이다. 앤터니의 감성적인 호소 앞에서 조금 전까지 시저의 권력욕을 욕하던 군중이 어느새 ‘반역자를 한 놈도 살려두지 말자’라고 합창하기에 이른다. 한쪽에선 부패권력 프레임을 말하는데, 다른 쪽에선 우의와 회상의 프레임을 들이댐으로써 사태를 역전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정치 프레임이 이처럼 강력하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선거 국면에서는 특히 그러하다. 그러나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결정적인 결함을 지닌다.
첫째, 프레임은 객관적인 사실과 주관적인 주장을 교묘하게 섞어서 특정한 방식으로 세상을 해석하도록 유도하는 인지적 장치다. 그러니 프레임이 현실정치에서 아무리 쓸모가 있다 하더라도 엄밀히 말해 진실과는 거리가 있다.

둘째, 정치 프레임은 피상적 현상과 근본적 이유를 구분하지 못하도록 사람들을 현혹하기 쉽다. 예컨대 이번 대선의 최대 이슈라고들 하는 ‘경제’는 겉으로 드러나는 표층 프레임에 불과하다. 정권을 바꿔보고 싶다는 막연한 변화지향 욕구가 더 깊은 차원의 심층 프레임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경제 프레임은 그러한 심정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셋째, 선거의 프레임이 단순명료할수록 현실의 복합성은 무시되기 쉽고 소외계층, 주변부, 소수자, 약자의 목소리는 가차없이 묻혀버린다. 프레임의 전쟁터만큼 우승열패의 원리가 신봉되는 곳도 없다. 이런 점에서 프레임은 흥미롭긴 하지만 대단히 위험한 게임의 논리라 할 수 있다.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무조건 열광하기에 앞서 비판적으로 보아야 할 대상인 것이다.

흔히 선거철이 되면 푸대접 받는 사회의제들이 있다. 인권, 환경, 세금과 같은 이슈가 그 대표적인 피해자다. 홍수와 같은 정치 프레임의 물결 뒤에서 불청객 취급을 받기 일쑤다. 이런 일은 다른 나라에서도 종종 일어난다. 하지만 특히 이번 한국 대선처럼 단 하나의 프레임이 다른 모든 의제를 압도해 버린 경우엔 그 폐해가 극심하다. 그러나 선거가 있든 없든, 그 결과가 어떻든 간에 인간의 기본권, 환경정의와 같은 이슈는 우리에게 극히 중요한 문제로 계속 남아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분신하는 노점상이 있고, 시한폭탄과 같은 전지구적 에너지·환경 문제가 재깍거리고 있음을 똑바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인간화된 사회를 염원하는 사람이라면 절대 잊지 말아야 할 문제영역은 바로 이런 것이어야 한다. 정치인들이 설정한 프레임 또는 역프레임에 대해 민주시민으로서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 시민들 나름의 대안적 가치를 분명히 견지하고 주창할 때에만 민주주의의 진정한 미래를 담보할 수 있다.

조효제/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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