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겨레, KISTI 과학칼럼 발췌)

〈별순검〉을 부활시킨 건 결국 팬들이었다. 팬들의 이어진 요구에 문화방송 계열의 엠비시드라마넷이 자체제작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1년 전부터 기획에 들어가 드디어 첫 작품을 내놓았다. 류승룡·박효주·온주완·안내상·김무열 등 출연배우는 이전과 달라졌지만, 연출자와 작가 등 제작진은 대부분 그대로다. 팬들 사이에선 배우 교체에 대한 아쉬움도 있었다. 그러나 이날 시사회는 그런 우려를 말끔히 씻어냈다.

시사회에서 공개된 1화는 기존의 〈별순검〉이 가졌던 매력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지금 봐도 무릎을 칠 법한 개화기 과학수사대의 체계적인 수사기법이 곳곳에서 빛난다. 또 시청자가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재미를 만끽하도록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극 전개는 빠르고 군더더기가 없다. 매 화마다 하나의 에피소드로 마무리짓는 형식 또한 무게와 부담을 줄인다.

그렇다고 드라마가 가볍기만 한 건 아니다. 〈별순검〉의 진짜 주인공은 수사대원들이 아니라 사건에 얽힌 민초들이다. 사건의 비밀과 함께 하나하나 드러나는 민초들의 드라마틱한 삶은 그 자체로 커다란 재미와 감동을 준다. 신분 해방을 외치며 길에서 담배 시위를 벌였던 백정들, 지금의 연예계처럼 계약금에 따라 기방을 옮겼다는 기생, 갑오개혁 이후 극심한 격변의 중심에 있었던 중인, 보부상 등 다양한 계층의 애환 섞인 얘기들이 에피소드마다 녹아들어 적잖은 무게감을 더한다.

반응이 좋으면 시즌 2, 시즌 3 등 시즌제로 이어갈 거라 한다. 문화방송 지상파에 정규편성하는 방안도 타진중이다. 일반적으로 지상파에 방송된 뒤 케이블방송을 타는 일반적인 드라마 공식을 〈별순검〉이 뒤집을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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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판 CSI - 영화 '혈의누'의 과학수사관 
 
고립된 외딴 섬 ‘동화도’에서 일어난 참혹한 연쇄살인사건,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선 조선시대 수사관 원규(차승원), 과연 그는 살인사건의 전모를 밝혀낼 수 있을까? 이는 영화 ‘혈의 누’의 예고편의 한 장면. 연쇄살인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과학적인 수사 모습은 현대 범죄 수사 못지않았다. 또한 외화 시리즈인 ‘CSI(Crime Scene Investigation)’가 인기를 끄는 것도 꼼꼼한 증거수집 및 추리 과정이 첨단 과학기술과 어우러진 덕분이다.

그렇다면 과연 옛날에 과학수사는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을까? 영화 ‘혈의누’에서도 잘 묘사되고 있는 것처럼 조선시대만 해도 상당히 과학적인 이론에 근거를 둔 수사 기법들이 활용되었으며 법의학서에도 나와 있었다.  

조선시대에 법의학서로 유용하게 읽힌 것은 ‘무원록(無寃綠)’이라는 책으로서 원래는 중국 원나라 때 왕여(王與)라는 사람이 지은 것인데, 15세기 초 세종이 우리 실정에 맞게 다듬고 주석을 달게 해서 새롭게 신주무원록(新註無寃綠)으로 고쳐서 냈다. 그리고 18세기 말에는 영조가 이를 또 보완하여 증수무원록(增修無寃錄)으로 내놓은 바 있다. 원제인 ‘무원록’이란 ‘원이 없도록 한다’, 즉 죽은 자의 억울한 원한을 풀어주도록 한다는 뜻이다.

당시의 검시 제도는 오늘날처럼 부검은 아니었다. 유교적 윤리의식 때문에 시신에 칼을 대어 해부하는 것은 금기시되었던 것이다. 그 대신 최소한 두 번, 또는 세 번까지도 각각 다른 사람이 검시를 반복하도록 해서 가능한 한 공정성을 기하도록 했다. 일반적인 검시 방법은 이랬다. 부검을 하지 않는 대신 시신의 상태나 주변 정황을 꼼꼼히 살핀다. 예를 들어 얼굴색도 진한 붉음, 검붉음, 누렇게 붉음, 시퍼렇게 붉음, 창백하게 붉음, 연하게 붉음 등 여러 가지 경우로 나누어 기록했는데, 만약 목이 졸려 죽은 자라면 정맥만 막히므로 피가 머리 쪽으로 몰려 얼굴색이 검붉게 된다. 이 경우 설령 목을 매달아 자살한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타살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정말로 목을 매달았다면 정맥과 동맥이 모두 막혀서 얼굴에 검붉은 울혈이 생기지는 않기 때문이다.

검시 기술이 색깔에 의존하고 있다 보니 범인들이 살해 흔적을 위장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가령 흉기로 구타해 살해한 뒤 푸르거나 붉은 색의 상처를 지우기 위해 범인들은 꼭두서니 풀을 식초에 담갔다가 상처에 발라 상흔을 제거했다. 이에 대해 조선의 법의학서적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흔이 의심스러우면 사또는 반드시 감초즙으로 해당 부위를 닦도록 하라. 진짜 상처가 있었다면 즉시 나타날 것이다.’ 이는 경험으로 알게 된 산과 알칼리의 중화 반응을 활용한 것이다.

독극물 검사법도 있었다. 유황이나 비소 등은 은과 반응하여 검은 막을 형성하는데, 바로 이런 원리를 이용하여 은비녀를 죽은 자의 구강과 식도에 밀어 넣은 뒤 색이 변하는지 관찰하여 독살인지 아닌지를 밝히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방법으로도 잘 판단이 안 될 때에는 밥 한 숟가락을 죽은 자의 입이나 식도에 넣어 두고 종이로 봉해두기도 했다. 나중에 밥을 꺼내어 닭에게 먹여봐서 죽으면 이 역시 독사한 것으로 간주한 것이다.

물에서 발견된 시신이 정말 익사한 것인지 알아보는 방법도 있었다. 만일 입과 코에서 하얀 물거품이 나오지 않는다면 물에 빠지기 전에 이미 죽은 것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익사한 사람은 급하게 호흡을 하려다가 물을 들이마시게 되는데 이때 기관지에 남아있던 공기와 점액이 물과 섞여 자잘한 흰 거품이 되기 때문이다.

한편 남자가 익사하면 엎드린 자세가 되고 여자는 드러눕는 모양이 된다고도 했지만, 이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정확하지 않은 내용이다. 남자의 양기는 얼굴에 모이고 여자의 음기는 등에 모인다고 본 것인데, 실제로는 남녀 모두 엎드린 상태가 된다고 한다. 머리와 사지 부분이 몸통보다 비중이 커서 아래쪽으로 늘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불에 탄 시신의 경우 현대 법의학과 마찬가지로 입과 코 안에 재나 그을음이 있는지를 중요하게 여겼다. 만약 재가 있다면 불에 타 죽은 것이고, 없다면 그 전에 죽은 것이다. 불이 났을 당시에 살아 있었다면 숨을 쉬면서 재도 들이마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잘 살피면 시신이 불에 타 죽었는지, 아니면 이미 살해당한 상태에서 불에 타 죽은 것으로 위장되었는지도 판별해 낼 수 있었다.

그밖에도 조선시대의 법의학 지식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내용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지만, 한편으로는 부정확한 지식들도 적지 않았다. 친자감별법이나 처녀성의 판단법 등 과학적 근거가 희박한 경우도 있으며, 사람이 이빨로 물면 독이 스며든다고 본 것도 2차 감염 현상과 혼동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원록의 내용들엔 당시의 과학을 총동원해서 엄정하게 범죄를 수사하겠다는 의지가 집약되어 있다. 비록 현대의 과학수사 기법보다 기술적인 면에서는 뒤떨어졌을지 몰라도 그 정신만은 지금도 전혀 빛이 바래지 않은 것이다. (글: 박상준 - 과학칼럼니스트)

출처 : KISTI의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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