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겨레)
현재 학력위조 사건으로 검찰 조사를 받고 있는 신정아씨는 어떻게 불과 30대 초중반의 나이에 동국대 교수가 되고 그 뒤 광주비엔날레 총감독까지 될 수 있었을까? 예일대를 나왔다는 거짓 학력도 중요하게 작용했지만, 신씨가 교수와 총감독이란 거물로 성장한 것은 일단 큐레이터로서 언론의 인정을 받은 덕분에 가능했다. 1997년 금호미술관에 아르바이트생으로 들어간 20대 젊은 여성이 불과 2~3년 만에 미술계의 주요 큐레이터가 된 것은 언론매체들이 신씨의 의도에 휘둘려 그를 밀어주었기 때문이다.
다른 문화예술 장르와 달리 미술분야는 언론, 특히 신문이 훨씬 더 큰 영향을 끼친다. 동영상보다는 이미지가 주가 되는 미술의 속성상 방송매체보다는 활자매체가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보다 더 큰 이유는 미술분야가 대중과 만나는 통로가 사실상 신문뿐인 탓이다. 그래서 미술계는 언론의 보도와 평가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는 미술계 양대 뉴스메이커인 화랑과 미술관 모두가 마찬가지다.
미술품 거래가 존재 근거인 화랑들은 광고가 불가능한 실정상 신문 보도가 유일한 홍보 창구이다. 특히 화랑들은 언론에서 많이 다루어주면 작품을 매매할 때 콜렉터들에게 더 높은 가격을 부를 근거가 되기 때문에 기사 게재에 많은 신경을 쓴다. 미술관들도 예전과 달리 전시 평가에 있어 미술계 내부의 미학적 평가 못잖게 대중적 성공도, 관객 동원 숫자 등을 중시하고 있다.
신씨는 이런 미술계의 속성을 꿰뚫고 초기 자기의 모든 성공 전략을 대언론 공략에 ‘올인’했다. 기자들과의 관계를 언론-취재원 이상으로 발전시키며 명절 때마다 선물을 따로 챙겼을 정도였다. 언론사들이 전문성을 크게 따지지 않는 기자 인사방식도 신씨가 기자들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됐다.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정확하게 전시를 검증할 능력이 없는 미술담당 기자들의 경우 일단 신씨의 능력에 크게 의심을 갖지 않고 넘어갔던 것이다.
여기에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 못잖은 신씨의 이런 탁월한 언론 관리는 그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금호미술관이 신씨의 예일대 학력에 의문을 품고 그를 내보냈지만 신씨는 바로 굴지의 미술관인 성곡미술관으로 옮길 수 있었다. 친한 기자들이 나서서 추천과 부탁을 해줬기 때문이었다. 언론 입맛에 맞는 취재원, 그리고 젊은 스타 여성 필자에 목말라는 언론의 속성도 신씨를 거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조선일보>는 신씨의 큐레이터 경력 2~3년에 불과했던 시절에 이미 신씨에게 칼럼을 부탁해 맡겼고, 상당수 일간지들이 신씨의 글을 실었다. 신씨는 <중앙일보>가 주최하는 중앙미술대전 심사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동아일보>에는 지난 6월까지 칼럼을 썼다. <국민일보>는 신씨가 예일대에서 박사학위를 받는다는 기사까지 썼다. 이런 지원을 받아 미술계 내부의 지위가 올라갈수록 신씨는 인맥관리에 더욱 신경을 썼다. 최근에는 신씨가 현직 <조선일보> 간부와 <중앙일보> 기자가 포함된 정·재계 인사들의 사교모임 회원이란 사실이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공들여 기자를 관리했고 또 서로 도움을 주고받은 관계였기 때문에 신씨는 최근 시사주간지 <시사인>과 한 인터뷰에서 언론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를 털어놓기도 했다.
자신과 친하게 지내던 기자들이 신씨에 대한 선정적인 보도를 쏟아내는데 대해 신씨는 “기자들이 악마 같다”라고까지 표현했다. 전시기획자 이섭씨는
“신씨를 만들어 낸 것도 언론이고, 신씨를 끌어내려 죽이는 것도 언론 같다”고 말했다.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