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름포럼에서 <푸른 눈의 평양시민>을 보다. 씨네21에서 정기적으로 메일링리스트 메일을 받아보고 있지만, 시사회 응모는 처음이었다. 시사회 응모는 떨어졌지만, 표를 나눠주는 고마운 사람들 덕분에 볼 수 있었다.

- 표를 나눠주기로 한 분이 늦어, 20분 지각하다. 내용을 이해하는데에 20분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시작 부분이라면 문제가 된다. 아쉽다.

- 마침 주인공 '제임스 드레스넉'이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이었다. 가난한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부모님의 이혼, 이모집에서의 생활, 가출, 절도와 감옥. 감옥에서 나온 그가 군에 지원하는 것 까지가 하나의 흐름이다. 드레스넉이 불행하다고 생각한 과거로부터 도망친 곳은 군대였고, 불행하다고 생각한 군대로부터 도망친 곳은 신혼의 가정이었다. 하지만, 군대가 신혼의 가정을 갈라놓았고(해외근무), 가정을 잃은 그는 다시 군대로 향한다(재입대).

- 재입대한 그가 배치받은 곳은 62년 한반도 DMZ. 전장의 긴장과 피로 속에서 방황을 이어가던 그는, 부대 근처 홍등가로의 외출을 허락하지 않는 답답한 부대를 떠나, 북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느닷없이 북으로 돌려진 카메라에 빠르게 '오라 평양으로'라는 북의 선전문구가 잡힌다. 그리고 이어진 관객들의 폭소. 최전선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할 미국 군인이 공산주의 국가에 투항한 이유 치고는 너무 어이가 없다는 것인가?

- 하지만, 드레스넉의 북한행은 그저 수많은 선택 중의 하나였을 뿐이었다. 이모집에서 가출을 결정할 때 처럼, 입대와 결혼을 결정할 때 처럼 말이다. 그를 설명하는 것은, 그가 미국에 사느냐 한국에 사느냐 북한에 사느냐가 아니다.
이혼을 회상할 때, 자식을 갖지 않아 다행이었다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드레스넉이고, 북한 외국어대학교에서 공부하며 외교관이 되고싶어하는 아들 짐과 토미에게 큰 소리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드레스넉이며, 노년을 낚시터에서 보내며 자식들이 좋은 교육을 받길 원한다고 소회하는 사람이 드레스넉이다.
일관되게 그를 표현하는 것은 그것 뿐이며, 가출 입대 결혼 이혼 재입대 북한행까지 이어지는 어이없다는 인생역정은 그것을 위한 선택에 다름 아니다.

- 자유민주주의, 사회주의, 국가자본주의, 무엇이라 부르든 그에게 체제는 선택일 뿐이었다. 한 국가의 선전도구로 활용되고, 경제제재 속에서 생활은 불편했으며, 그 만큼의 배급도 받지 못한 대다수의 국민들이 참혹하게 굶어죽는 모습을 목격했지만, 영화에 출연할 기회를 기뻐했고, 자신에게 잊지 않고 배급을 주는 국가를 사랑했고, 자신의 능력이 닿는 한 대학 강단에서 최선을 다하고, 자식들의 교육에 애쓰고, 볼링이며 낚시로 여가를 즐기고 싶어하는, 좋은 점과 불편한 점이 뒤섞이기 마련인 선택 말이다.

- 더 좋은 사회에서 살고싶어하는 욕망은, 존중받아야 한다. 점심 먹고 산책하듯 군사분계선을 넘은 드레스넉의 선택이든, 그것을 보고 어이없다며 폭소하는 한국 관객들의 선택이든, 그 무엇이든 말이다.

- 영화는 전반적으로 무척 섬세하게 편집했다는 느낌이다. 지금까지 봤던 고작 몇 편의 다큐멘터리와 비교할 뿐이지만, 화면에서 전혀 군더더기를 발견할 수 없었다. 깔끔하고 말끔했다. 감독의 촬영 후기가 무척이나 궁금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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