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이 인 더 시티
신윤동욱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 표지에 빨간색으로 강조된 '급진적 다양주의자' 라는 단어가 눈에 띄인다. '다양주의'라. 형용 모순이 아닐까? 무릇 '주의' 라 하면, 사회의 문제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이 아니던가. (물론, 이것과 다른 맥락에서 쓰이는 '주의' 들도 있다.) 예컨대, 민족주의는 분단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라는 주장이고, 자본주의는 시장경제가 희소한 재화를 분배하는데 최적의 방법이라는 주장이며, 사회주의는 계획경제가 최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다양주의라니. 소수자에 대한 연대를 의미하는 다양주의는, 의미와는 별개로, 적어도 방법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 없다.

- 형용모순인 수식어를 표지에 써놓았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누구나 무슨무슨 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고, 현실의 문제점을 나열하는 것과 현실의 해결책을 탐구하는 것은 개별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 책은 전자에 가깝고, 그저 그것 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유쾌하고 즐겁게 사회를 비춘다. 굳이 후자를 흉내낼 필요는 전혀 없지 않은가.

- 첫번 째 장 '사회(SOCIETY), 대한민국 1퍼센트의 뒷담화' 는 사회적 통념에 대한 비판이자, 반대로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변론이다. GNP를 국민총생산을 나타내는 경제적 지표 이상으로 활용하는 GNP 인종주의, 민족의식으로 치장한 북한 여성 응원단에 대한 관음증, 공영언론 사영언론을 가리지 않는 민족주의, 반 한나라당 정서, 대마초 흡연에 대한 금지, 반 동성애 정서, 등 사회 구성원 다수에 의해 무난하게 받아들여지는 '통념' 들을 비판한다. 하지만, 이런 내용들은 한국 사회의 다수자 정서, 집단적 정서를 비판하는 데 있어서 의미가 있는 것이지, 어떤 주장으로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충분히 글쓴이의 재치로 읽힐 수 있는, 유행어나 영탄적 표현으로 마무리하는 글쓰기 역시, 그가 비판이나 자조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경향은 티브이 프로그램과 영화에서 읽히는 사회적 통념과 소수자 이야기를 다룬 세 번째 장, '문화(CULTURE), 쇼쇼쇼, 채널을 돌려라.' 에서도 비슷하게 읽힌다.

- 글쓴이의 일상과 취향에 대해 쓰고 있는 두번 째 장, '취향(TASTE), 아저씨의 브로크백 드리밍' 은 이러한 글쓴이의 솔직평범한 일상을 보여준다. 그의 동남아 여행 이야기, 이태원 클럽 이야기, 티브이 시청기, 운동이나 쇼핑에 대한 이야기들은 즐겁지만, 동시에 즐거운 '일상' 일 뿐이다. 
하지만, "'운동(movement)'에서 '운동(exercise)' 으로 거처를 옮겼다." (「당신의 10주년을 축하합니다.」) 거나, "여전히 진보정당의 당원으로 늙어가는 꿈을 선선히 포기하지는 못한다." (「블루밍 데이즈」), 머리가 빠져 고민인 자신을 두고 "마침내 차별에 눈 뜬다." (「마침내 차별에 눈 뜨다」), "소비로 제3세계 인민을 돕는다." (「아저씨의 브로크백 드리밍」) 와 같은 농담 섞인 자조의 행간에서 글쓴이의 쓸쓸함과 무기력함이 느껴지는 것은 단지 나만의 생각일까?

- 다양주의 같은건 없다. 다양함에 대한 인정은 '추구해야 할 가치' 이지 '추구하는 가치를 실제로 이루어내기 위한 방법' 은 아니다. 혹시나, 다양함에 대한 인정을 하나의 주의로 포장하려 한다면, 그것은 무기력한 자기 위로 이상이 되지 못할테니까.

- 그의 글은, 다양주의가 아니라, 그저 공평무사하게 다루어지는 소수자들의 모습에서 가치가 있다. 특히,「동성애자 천국과 나쁜 어린이의 향연」은 '내가 생각하는 인권 운동' 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는데, 소수자는 다수자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와 내 주변에 있는 그들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글쓴이 덕분에 동성애를 다루었다고 알려진 영화들을 사랑 영화 목록에 끼워넣었고, <발레교습소>가 보고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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