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 전방위적 지식인 정약용의 치학治學 전략
정민 지음 / 김영사 / 2006년 11월
평점 :
- 일전에 KBS 역사스페셜에서 조선의 과거시험을 다룬 적이 있습니다. 임금 앞에서 시험을 치루기 전까지 선비들이 치뤄야 하는 시험은 모두 세 번. 이 세 번의 시험을 통해 전국에서 서른 세명을 선발합니다. 이 시험을 위해서 조선의 선비들은 자신의 키 보다 높이 쌓인 수 권의 책들을 독파해야 했습니다. 시험의 시기나 방식, 내용이 오늘날의 고시와 무척 비슷하더군요.
- 정약용 선생은 이런 과거시험에 합격하고 관직에 진출합니다. 서인 노론을 견제하기 위해 남인 계열을 등용했던 정조의 정치전략도 한 몫 했을겁니다. 여튼, 정약용 선생은 서른 가까운 나이에 정조의 초계문신제 교육을 받았을 것이고, 정조의 화성 건립에도 기여합니다. 이후 경관직 뿐만 아니라 외관직으로도 근무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천주교에 나름대로 관대했던 정조 사후에는 노론 벽파에 의해 강진으로 유배됩니다.
- 강진에서 선생은 200여권이 넘는 책을 지었습니다. 저술한 책도 있지만, 편집한 책도 많이 있었습니다. 주목할 것은, 그의 저작이 굉장히 다양한 분야에 걸쳐있다는 것인데요, 이미 잘 알려져 있는<목민심서> <흠흠신서>와 같은 정치 분야나 <아방강역고>와 같은 지리 분야 외에도, 교육, 토목, 의학, 자연에 이릅니다. 여러 편의 시도 썼고, 경학 예학 등에도 박식했습니다. 닭을 기르다가 <계경>(닭 기르는 방법)을 저술했다는 일화가 인상깊었습니다.
- 선생이 유배에서 풀려났을 때는, 머리와 이가 다 빠졌다고 합니다. 오직 건강에만 소홀했던 것 같아요. 아무튼 그의 엄청난 저작에 당시 선비들도 무척 놀랐다고 합니다. 사실, 그 당시에는 일본 알기 열풍이 불고있었다고 합니다. 북학의 태동기이기도 했지요. 조선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적지않은 책들이 저술되고 필사되어 유통되었습니다. 물론, 선생은 그 이상이었죠. 저자인 정민은 당시 선비들의 연구와 저술 활동 자체에 관심이 있는 분 같습니다. 저자는 선생의 엄청난 활동력에 놀라는 것과 동시에 저술 방법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선생의 방법 그대로 이 책을 지어냈습니다. 목차가 무척이나 깔끔합니다.
- 중복되는 부분이나 방법과는 거리가 있는 내용들을 제외하고, 간단히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기초 학습에 충실한다. (2) 무엇을 공부하고, 왜 공부하는지를 명확하게 한다. (3) 주제가 정해지면 목차를 먼저 정한다. (4) 관련 자료를 꼼꼼하게 수집한다. (5) 수집한 자료를 충분히 읽고 중요한 내용을 초서(카드작업)한다. (6) 목차에 맞추어 카드를 분류한다. (7) 문제의식은 끝가지 쫓아간다. (8) 저술한다. 인데요, "복잡한 것을 간단하게 만드는 것이 공부" 라고 선생은 여러 번 강조합니다.
- 편집 외적인 부분에 대한 내용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1) 수시로 메모하라. (2) 문제의식을 확장하고 정돈하기 위해 서면 토론을 활용하고, 두 세명의 논평을 입체적으로 활용하라. (3) 작업을 하기 전에 조례를 정하고 작업을 분담하라. (4) 동시에 여러 작업을 병행하라. 등입니다. 공부하는 자세에 대한 내용도 있습니다. 학문 외적인 일에도 공부의 방법을 적용하라던지, 주기적으로 주변 정리를 하라던지, 일상에 운치를 곁들이라던지, 인간의 기본도리를 벗어난 공부는 쓸모가 없다던지 하는 조언을 하고 계십니다. 선생은 효용성이 없는 공부, 현실에 쓸모없는 공부, 공부를 핑계로 온 식구들을 배곯리며 고고한체하는 학문을 가장 혐오했다고 하네요.
-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선생의 방법일 뿐입니다. 실제, 자신의 공부 방법, 습관에 적용하는 것은, 분명 한 권의 책을 짓는 것 만큼의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저자 역시, 논문을 쓸 당시의 저자의 경험을 살짝 들려주고 있는데요, 많은 분들이 공감을 하실거에요. 저 역시 꿰지는 못한 채 담고만 있는 수 개의 개인 블로그의 구슬들을 되돌아봅니다. 목적도 쓸모도 없이, 번듯한 분류에 갈무리만 해놓은 후에 거들떠보지도 않은 자료들이죠. 에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