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연 (1disc) - 아웃케이스 없음
윤종찬 감독, 장진영 외 출연 / 에스엠픽쳐스(비트윈) / 2006년 3월
평점 :
품절


- 장면 하나. 조선 땅에 일본 군대가 입성한다. 어른들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아이들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아직 민족 의식 따위가 없는 아이들에게, 일본 군대는 식민 지배를 위한 무력이 아니라, 그저 새로운 문화일 뿐이다.

- 장면 둘. 소녀 박경원은 아버지에게 학교에 보내달라고 말했다가 혼줄이 난다. 울며 뛰쳐나온 그녀가 밀밭에서 본 것은 (안창남의 것으로 짐작되는) 경비행기이다. 아직 민족 의식 따위가 없는 아이들에게, 조선은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나라가 아니라, 가난과 여자라는 이중 굴레 때문에 교육을 받을 수 없는 나라일 뿐이다.

- 장면 셋. 일본비행학교에 입학한 박경원. 비행 기술을 배우는데 있어서 자동차 정비가 필수적이라는걸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아무튼 그녀, 밤에는 택시 회사에서 일을 한다. 학비도 벌고, 자동차 정비도 실습하고, 일석이조. 다만, 아쉽다. 실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되어있는 그녀의 자취가 영화에서 생략된 것이. 무척이나 겸손해보이던 감독이 영화적 재미 때문에 생략했을 것 같지는 않다. 시간이 문제였겠군.

- 장면 넷. 벚꽃비행이 있는 날. 승객은 참의원인 한지혁의 아버지, 조종사는 이등비행사가 된 박경원, 시설과 장소는 일본군의 기상장교가 되어 돌아온 한지혁이 마련한다. 그리고 박경원과 벚꽃비행을 취재하기 위해 건너온 조선의 신문기자까지, 벚꽃비행이 이들은 한 자리에 모은다. 조선의 신문기자는 갑자기 카메라 대신 총을 꺼내어 들고, 참의원들을 쏜다. 이내 총구가 한지혁을 향하는 듯 하다 자신의 관자놀이를 겨눈다. "조선적색단 만세! 조국독립 만세!" 그는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 장면 다섯. 드문드문 사람들이 앉아있는 후원회장. 박경원은 허탈해하고 있다. "조선 사람들이 도와줄 것으로 알았다."며 말끝을 흐린다. 실제, 재일 조선인들은 그녀의 고국비행을 유사 친일행위로 생각했고,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추측하건데, 조선인들의 냉담한 반응은, 그녀가 좀 더 적극적으로 고위관료들을 만나게 만들었을 것이다.

- 장면 여섯. 박경원에게 전해진 한지혁의 유해와 편지. 한지혁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무 의식없이 편한대로 세상을 살아온 나 같은 사람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을까.."

- 좀 엉뚱하긴 하지만, 이 두 장면에서 일제 시대의 풍경이 궁금해진다. 우리가 배워 알고있는 일제 시대의 풍경은, 대부분 뚜렷한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일어났던 사건들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테라우치나 사이토, 이승만이나 김구, 안창호, 김좌진, 신채호, 박헌영, 안중근 보다 박경원이 더 많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뚜렷한 정치적 행위가, 더 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좀 더 무게있게 다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다른 삶들도 충분하게 다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지주가, 교장과 선생이, 사장과 관리자가 일본인이든 조선인이든, 사람들은 농사는 짓고, 학교에는 가고, 세끼 밥을 먹고, 일자리를 찾았을 것이다. 나는 이들의 삶에도 관심이 있다.

- 장면 일곱. 박경원은 조선적색단 사건으로 감옥에 갖힌 한지혁을 면회한다. 한지혁은 박경원에게, 비록 일본의 전쟁을 선전하는 수단으로 이용되더라도, 고국비행을 하라고 격려한다. "조선이 네게 해준 것도 없잖아.." 하지만, 애국심 따위가 아니더라도, 전쟁의 선전은 고민거리가 된다.

- 마지막으로. 초반부에 소녀 박경원이 하늘을 나는 꿈 장면만 제외한다면, 제작비가 아깝지 않을 정도의 비행 장면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 사람의 삶을 영화화 하는 데 있어서 무척 성실하고 겸손한 태도를 보였던 제작진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 아쉬운 점, 물론 있다. 굉장히 여러 번 수정된 시나리오라고 하지만, 박경원의 내면에는 그다지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 나 처럼 평범한 관객에게도, 고작 술에 잔뜩 취하거나, 줄담배를 피워대는 모습에서 한 사람의 내면을 짐작하는건 꽤 익숙하다. 더구나, "하늘에는 남자, 여자, 조선, 일본, 그런게 없잖아."라는 대사는, 지나치게 적극적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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