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맥스무비)

한 사람의 인생을 주어진 러닝타임 안에 담아내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일까? 이미 알려진 사람이라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사람의 입장으로서 부담이 더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이야기가 알려져 있지 않은 경우라면 어떨까? 그 인물에 대한 선입견 없이 영화를 순수하게 바라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중략)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공이라는 것은, 행복이라는 것은, 그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오는 것이다. 삶의 질곡을 넘어서야 맛볼 수 있다는 얘기다. 노력한 만큼, 고생한 만큼, 능력만큼, 성실한 대가만큼. 그만큼만 인정받는 것을 좋아하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못하다. 지금 세상을 살아가는 세인들의 눈에는 박경원의 모습이 그렇게 보일지 모른다.

단, 그것은 영화를 보기 전까지의 일이다. 우리의 인생은 행복을 누리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인내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끝자락에서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것은 행복의 순간들이 아니라 삶의 고역을 참아왔다는 사실이다. 윤종찬 감독이 연출을 맡고, 장진영이 박경원을 연기하는 <청연>은 푸른 상공에 자신의 꿈을 펼친 그녀의 질곡 가득한 삶을 통해 그것을 보여줄 것 같다.

3년간의 기획을 거쳐 30여 차례 시나리오 작업으로 탄생한 <청연>은 실존인물을 영화화하는 만큼 철저한 역사적 고증과 주변인물들의 검증을 바탕으로 기획되었다. 순제작비만 80억이 넘는 <청연>은 그녀의 삶을 스크린에 복원하기 위해 세심한 준비를 했다. 국내에서는 그녀에 관련된 자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윤종찬 감독과 제작진은 일본 도서관을 이 잡듯이 뒤졌다. 또 일본의 그 시대 영화도 여러 편 참고했다. 특히, <청연>의 미술 감독으로 영입된 다케우치 감독의 영화 4편(<도다가의 형제> <사사메 유키> <무법송의 일생> <사다>)이 쇼와 시대를 다룬 영화들이어서 국내 제작진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다치가와 비행장 이야기>의 저자이기도 하고, 박경원과 친분이 있었던 미타 상과의 만남은 박경원의 삶을 영화로 재구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지난 5월 6일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윤종찬 감독은 “상상의 인물을 만들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보다 실존 인물을 영화화하는 것이 몇 배 더 힘든 것 같다. 완벽하게 그녀의 삶을 재현해내지 못하겠지만, 그녀의 삶을 영화적 재미를 위해 왜곡시키거나 비화시키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미 <소름>에서 윤 감독과 배우로서 호흡을 맞춘 바 있는 장진영은 "시나리오를 보자마자 희열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그만큼 박경원 역은 여배우라면 누구나 탐을 냈을 것이다"며 캐릭터에 대한 강한 애정을 드러냈다. <싱글즈>에 이어 장진영과 또 한번 연인관계가 된 김주혁은 영화속에서 자신이 맡은 한지혁이라는 인물을 부드러움과 강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캐릭터라고 설명했다.

<청연>은 오랜 준비과정을 거친 작품인 만큼 촬영 현장에서의 누수를 최소화하기 위해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여러 가지 새로운 시도를 했다. 그 중 하나가 3D 콘티 작업이다. 지면에 있는 시나리오를 또다시 지면에 옮기는 2D 콘티 말고 3차원의 영상으로 옮기는 3D 콘티. <청연>의 모든 항공 촬영씬은 실사로 촬영되기 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고, 제작진은 그 결과를 토대로 촬영을 진행해나갔다. CG작업을 책임지고 있는 ‘인사이트 비주얼’에서는 콘티북을 바탕으로 <청연>에 등장하는 모든 비행 씬, 14씬, 610컷을 32분 분량의 애니매틱스로 담아냈다.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CG로 가짜 비행기를 만든 적이 있는 ‘인사이트 비주얼’은 6개월간의 작업을 거쳐 한치의 오차도 없이 성공적인 항공촬영을 할 수 있도록 든든한 조언자가 되줄 3D 콘티를 완성해냈다. <인디펜던스 데이>의 항공 코디네이터 케빈 라 로사와 항공 촬영감독 버논 노블즈 주니어는 이 3D 콘티가 없었으면 비행촬영에 걸린 시간은 지금보다 9배(<청연>의 제작진은 미국에서 항공촬영을 11일 만에 끝냈다)는 늘어났을 것이라고 장담했을 정도다.

하지만 <청연>의 제작진을 가장 괴롭혔던 건 박경원의 삶이 아니라 그녀와 운명을 달리한 복엽기였다. 제작진은 복엽기를 찾기 위해 미국을 비롯해 필리핀, 러시아, 한국까지 전세계를 샅샅이 뒤졌다. 영화 속에서 너무나 중요한 소품이라 복엽기를 찾는데 1년 동안 노력을 기울였고, 그러면서 그들이 다녀온 해외 출장거리는 239만km로 지구를 60여 바퀴 도는 거리와 맞먹는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 것일까? 제작진은 이런 각고의 노력 끝에 결국 어렵게 미국에서 박경원이 탑승한 ‘청연’과 똑같은 1930년대 모델인 복엽기 살무손(Salmuson)을 찾아냈다. 하지만 당시의 사진과 동영상 자료는 모두 흑백이었기 때문에 수백장의 컬러링 테스트를 통해 <청연>만의 복엽기가 새롭게 재창조되었다. 거기에다 '특수제작회사 아트인프라' 오선교 대표가 미국 서부 공항에서 007 첩보작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어렵게 찍어 온 복엽기 도면과 설계도는 <청연>의 복엽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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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청연>은…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았다. 박경원의 삶도. 그녀의 마지막 비행도. 80여년 동안. 어쩌면 당연한 일일게다. 그녀는 영웅이 아니었으므로, 따라서 <청연> 속에 영웅은 없다. 꿈 혹은 사랑의 이름으로 삶의 궤적을 남기고 간 평범한 사람들만이 있을 뿐. 암울한 식민지 시대,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다가지 않았을까. 이제 허구 반 사실 반의 그림으로 박경원을 다시 날려 보낸다. 시대에 대한 몰이해가 있다면 감독의 사려 깊지 못함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얄팍한 상상력이 행여 망자(忘者)의 삶에 누를 끼쳤다면 그저 송구스러울 따름이다. …감독 윤종찬 2004. 4. L.A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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