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겨레)

젊은 작가 김경욱(36)씨가 장편 역사소설 <천년의 왕국>(문학과지성사)을 내놨다. <하멜 표류기>에 한 줄로 언급된 17세기 네덜란드 출신 귀화 조선인 박연(본명은 얀 얀스 벨테브레)을 주인공 삼은 작품이다.

김경욱씨는 <누가 커트 코베인을 죽였는가> <장국영이 죽었다고?> 등의 소설집과 <아크로폴리스> <모리슨 호텔> 같은 장편을 통해 당대 젊은 세대의 문화적 기호와 존재의 풍경을 주로 그려 온 작가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패러디한 전작 <황금 사과>(2002)가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삼기는 했지만, 그가 역사를 소재로 한 소설을 쓰기는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다.

“2003년에 단편을 쓰느라 하멜의 보고서를 읽다가 눈에 번쩍 뜨이는 대목을 만났어요. 제주에 표류한 하멜 일행을 조사하러 온 조선 국왕의 사자가 하멜과 같은 네덜란드 출신 벨테브레였다는 것이죠. 벨테브레는 하멜보다 26년 먼저 조선에 표류해 와 그때쯤에는 완전히 조선 사람이 되어 있었어요. 국경이 무의미해지고 국적이 예전과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 이 시대에 일찌감치 ‘세계 시민’으로 살았던 그의 생애가 소설적 흥미를 자극했습니다.”

19일 낮 시내 음식점에서 만난 작가는 “서양인 벨테브레가 자신의 불가해한 운명과 화해하고 마침내 조선 사람 박연으로 거듭나기까지의 영혼의 드라마를 그리려 했다”고 말했다.

<천년의 왕국>은 제주에 표류한 하멜 일행이 국왕의 사자로 내려온 박연과 마주치는 1653년의 상황으로 시작한다. 소설 화자인 박연이 “망각의 악마가 지키는 지옥의 바다를 건너온 내 조상이자 아들”(18쪽)이라 표현하는 하멜 일행과의 만남은 그의 기억을 정묘호란이 나던 해인 1627년으로 데리고 간다. 그 해 그는 동료 두 사람과 함께 낯선 땅 조선의 해안에 표착했다. 소설은 이후 병자호란의 해인 1636년까지 10년 동안의 박연의 삶을 꼼꼼하게 되살려낸다.

“<하멜 표류기>나 실록 같은 역사책에는 박연에 관한 상세한 언급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역사의 그런 불친절이 작가에게는 오히려 상상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축복이 되었습니다.”

<천년의 왕국>은 아주 잘 읽히는 소설이다. 세련된 의고투 문장들이 독서를 매끄럽게 한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면 어쩐지 <남한산성>을 비롯한 김훈씨의 역사 소설들이 떠오른다. “죽음은 생을 윽박지르지 않았고 생은 죽음을 따돌리지 않았다”(203쪽)라거나 “성안에서 전쟁은 죽여야 하는 전쟁이 아니라 먹여 살려야 하는 전쟁이었다”(354쪽)와 같은 문장들이 그러하고,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의 ‘치욕’을 다룬 소설 말미가 또한 그러하다. 작가는 “김훈 선생의 문체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면서 “감명 깊게 읽은 작가의 영향을 받는 건 좋은 일이 아닐까요”라고 반문했다.

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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