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겨레)








1894년 동학농민전쟁은 한반도 역사의 분수령이었다. 그때까지의 조선과 이후의 조선은 달랐다. 그때 일본군이 개입하지 않고 전주에서 맺은 동학군과 조선정부의 화약이 이행돼, 녹두장군 전봉준이 말한 대로 전국에 집강소가 설치되고 유능한 ‘공화주의자들’이 정사를 맡았다면 우리 역사는 또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그때 영국제 스나이더 소총과 자체 제작한 무라타 소총으로 무장한 일본군과 죽창·농기구로 무장한 동학농민군의 화력 격차는 250 대 1 정도였다. 30~40만 농민들이 도륙당했다. 정부기록이나 증언들도 “시산혈해”니 “여러날 강물을 붉게 물들였다”고 했다. 일제의 1937년 중국 난징대학살에는 전례가 있었던 것이다.

이태진 서울대 교수는 조선과 고종임금이 무능하고 뒤쳐져서 일제의 식민지가 된 게 아니라 일제가 조선을 식민화했기 때문에 뒤쳐지고 무능하게 됐다고 했다. 일본은 조선을 근대화시키기는커녕 조선의 근대화를 사사건건 가로막고 지옥으로 밀어넣은 것이다. 〈녹두 전봉준 평전〉(시대의창 펴냄)에서 김삼웅(64) 독립기념관장도 “시골의 마흔 살 무명 접주가 수십만 농민을 종횡으로 엮어 혁명군으로 동원한” 기적 같은 일이 성공했다면 물론 세상은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일본의 메이지유신 체제와 경쟁하면서 동양의 정세도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 관장은 동학혁명이 비록 좌절하긴 했으나 “실패한 혁명은 아니다”고 했다. 그 뒤 을미개혁 등을 통해 동학군이 요구한 폐정개혁 내용들이 많이 수용됐다. 더 중요한 것은 “동학전쟁을 시발로 밑에 눌려 있던 민(民)이 밑으로부터 들고일어나 봉건적 신분철폐와 외세에 대한 주권·자주를 고창한 일”이다. 그것은 “지금에 이르는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토대”가 됐다.

이 점은 한 번도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경험한 적 없는 일본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메이지유신조차 위로부터의 복고적 개혁이었고 그 결과는 제국주의 침략과 아시아태평양전쟁이라는 비극으로 귀결됐다. 그렇게 보면 동학 농민혁명은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 당시와 정세구조가 닮은 꼴인 지금 그 혁명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비범한 범인 녹두장군이 역사에서 걸어나와 오늘날 전국 어디서나 살아 있는 현실”을 보라. 〈파랑새 노래〉의 파랑을 팔왕(八王), 즉 전(全), 곧 전봉준을 가리키는 것으로, 새타령의 ‘남원산성 이화문전’을 일본군이 점령하고 ‘남은’ 산성과 ‘이왕’(조선)문전으로, 여기저기 쑥쑥국 우는 새들을 곳곳에서 떨쳐일어선 의병으로 보는 설들도 재미있다.

하지만 지식인과 언론 등의 우리 역사에 대한 무지와 편견은 정도가 지나친 것 같다.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한 에드워드 핼릿 카, 도전과 응전이라고 한 아널드 토인비 등 외국인들 얘기는 마치 주술처럼 섬기고 인용하면서도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 본 단재 신채호는 알지도 못하고 가르치지도 않는다. 덩샤오핑 평전은 크게 쓰면서 제 나라의 운명을 바꾼 김구나 단재는 단 한 줄도 제대로 쓰지 않는다. 체 게바라 30돌에는 언론 출판사, 심지어 옷장사들까지 들썩이지 않았나.” 우리는 아직도 사대주의에 찌든 식민지적 상황 속에 살고 있다.

〈녹두 전봉준 평전〉은 김 관장이 지금까지 낸 평전들 중 여섯 번째다. 2004년 8월부터 거의 1년마다 백범 김구, 단재 신채호, 심산 김창숙, 만해 한용운 평전을 냈고 10여년 전에는 박열 평전을 다른 출판사에서 냈다. 모두 나라를 구하고 세상을 바로잡으려 삶을 던진 근대 조선사람들이다. “기회가 되고 능력이 닿으면 모두 20권으로 마무리할 생각”이다. 지금 약산 김원봉 평전을 준비하고 있다. 마지막은 안두희 평전으로 할 생각이다. “역설적이지만, 안두희를 알면 일제, 독재, 미국 등과 얽힌 우리 현대사 모순이 집약적으로 다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친일문제를 연구하다 보니, 친일파들은 오히려 기념관도 동상도 전기도 즐비한데 막상 항일 선구자들은 이렇다 할 전기나 평전이 드물었다. 있다고 해도 전문연구여서 대중에겐 멀었다.”

각별히 평전 형식을 취한 이유가 있다.  “젊은 시절 도스토예프스키를 공부해야겠다 생각하고 관련 책들을 많이 샀는데 그중에 에드워드 핼릿 카가 쓴 평전이 있었다. 방대한 자료를 녹여내는 걸 보고 평전의 가치를 새삼 느꼈다. 역사는 결국 인간의 역사인데, 평전은 바로 ‘글자로 쓴 인간 초상화’라 하지 않는가. 굴곡많고 고난에 찬 선구자들 얘기를 그냥 추상적으로 흘려버리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백범 김구를 그냥 “절세의 애국자로만 알고 있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많은 사실과 에피소드들을 찾아 그들의 내면을 재구성해야 한다. 그래야 대중이 역사의 무게를 실감하고 교훈을 끌어낼 것이다.

자료수집을 위해 중국·일본 헌책방들을 기회 닿는 대로 돌았다. 인터뷰가 끝난 뒤에도 신촌 일대 헌책방을 찾아나섰다. 김 관장은 5공 시절 금서 제1호의 저자가 되는 ‘영광’도 누렸다. 4·19혁명에서 5공 후반까지 재야·학생·노동자·지식인들의 각종 선언문들을 모아 〈민족민주민중선언〉(일월서각)이란 걸 냈는데, 그게 신군부 눈에 걸린 것이다. 1970년대 야당 운동하면서 〈민주전선〉 등을 만들었고 그 때문에 긴급조치로 여러번 끌려가 고문당하는 등 고초도 겪었다. 대한매일신문 주필로 있다가 성균관대 교수로 갔고, 다시 15 대 1의 공개경쟁을 뚫고 독립기념관 관장이 됐다. 3년 임기를 몇 달 남기고 있다.

글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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