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안주무시죠?

전 김규항의 글을 좋아합니다. 처음에는 진중권, 강준만과 섞여 그저 글 잘쓰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는데, <나는 왜 불온한가>를 읽고 그의 블로그에 틈틈히 들리면서, 그의 글이 놋빛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는 몇 해 전에 글 팔기에 진력이 나서 대중매체에 글쓰기를 포기하고, 이제는 어른들을 상대로 한 글쓰기에도 진력이 나서 어린이 잡지를 만들고 있다고 해요. 직설적이지만 겸손하고, 겸손하지만 자신을 낮추지 않는, 삶의 태도를 배우고 싶었습니다.

당신에게 보내는 이 글은 이미 적지 않은 이들이 좋다며 가지려는 글입니다. 저 역시 그 중 하나이지요. 작년 말 서울로 올라올 기한을 정해두고 도서관에 들락거리다 읽었습니다. 무엇보다 전 이 글을 읽으면서, 그 동안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혀왔던 것이, 바로 외로움이었다는걸 알게됐습니다.

사실 그 때 잠깐 오해도 있었지요. 난 그 외로움을 스스로 만들어냈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으로 무언가를 버리겠다 다짐했던 바로 그 때, 내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서울에 올라오면 버리고 간 짐들이 그대로 남아있지 않을까 못난 기대도 했었습니다.

서울에 올라와서는 버려진 짐들이 너무나 낡고 닳아있다는걸 알았습니다. 먼지를 닦아내고 닳아진 부분을 조심히 메웠어요. 변명 같지만, '내가 잘못했어' 라는 용서는 아니었습니다. '그 때는 좀 심했지.' 라는 반성과 비슷했어요. 집착하거나 매달리지는 않았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생각을 해요. 내가 달고사는 외로움이라는건, 근래 몇 년을 떠나서 아주 오래 전 부터, 별 감흥 없던 대학 생활의 시작, 아니 고등학교 시절의 막바지 부터였다구요. 여기까지가 제가 생각하는 진실입니다.

저도 제 외로움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을 만나면 전 늘 딴 짓을 합니다. 주머니 속에 있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어, 위아래 몇 개 되지도 않는 주머니에 몇 번이고 손을 집어넣는건데, 부끄럽게 빈 손을 꺼냈을 때는 이미 헤어질 시간이곤 했습니다. 나중에 놀러오시면 안그러려구요.

편지 잘 읽으시고, 좋은 주말 되세요.

-----

딸에게 보내는 편지
김규항

단아. 아빠는 지금 강원도 어느 시골 마을에 와 있다. 아빠가 좋아하는 작가 아저씨 집이야. 일 때문에 왔지만 “날씨가 죽이기 때문”이라는 핑계로 둘이 술만 먹고 있다. 아빠는 즐겁다. 갈수록 사람들은 빠르고 돈으로 계산할 수 있는 시간만 좋아한다. 그러나 아빠는 이런 아무 것도 아닌 시간, 느리고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시간이 참 좋다.

술을 먹다 단이가 생각났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말하는 단이 얼굴을 떠올리며 혼자 웃었다. 아빠는 그럴 때 담담한 체 하지만 속으론 아주 많이 기쁘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자기 생각’을 ‘옳은 생각’처럼 말하는 버릇이 있다. 그럴 때, 아빠는 단이가 아빠의 잘못을 들추어내길, 그래서 아빠가 잘못을 인정하길 기대하곤 한다. 기대는 점점 더 잘 이루어지고 있다.

단이는 단이 이름을 닮았다. ‘丹’(붉을 단). 처음 그 이름을 지었을 때 좋다는 사람이 없었다. 칭찬은커녕 “이름이 그게 뭐야?” “배추 단이냐 무단이야?” 따위 놀리는 말만 가득했다. 그런데 단이가 이름과 합쳐지면서 확 달라지더라. “너무나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말은 아빠가 억울할 만큼 빨리 나왔다.

아빠도 아빠 이름을 조금 닮았다. 단이는 아빠 이름이 무슨 뜻인지 아니? 홀 규에 늘 항, ‘늘 홀로’라는 뜻이다. 아빠는 어른들이 이름을 왜 그렇게 지었는지 물어본 적은 없다. 아빠는 이릴 적부터 왠지 그 이름이 좋았다. 지금도 그렇다. 아빠가 외롭냐고? 그래 아빠 주변엔 좋은 사람들이 아주 많다. 하지만 단아.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다고 해서 꼭 외롭지 않은 건 아니다. 사람은 외롭지 않아도 생각은 외로울 수 있단다.

이오덕 할아버지를 기억하니? 아빠가 누구보다 좋아했던 분이지. 아빠는 그분을 돌아가시기 오년 전쯤부터 사귀었다. 할아버지는 워낙 훌륭하게 사셨기에 그 뜻을 따르는 이들이 참 많았다. 그분이 아빠 글을 읽고 연락을 해오자 아빠도 한달음에 만나러 갔다. 그분을 사귀면서 많은 걸 배웠지만 한편으론 마음이 많이 아팠다. 그분은 당신을 존경한다고 말하는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너무나 외로워하셨다.

아빠는 그분의 외로움이 그분의 올바른 삶에서 온다는 것을 알았다. 단아. 올바르게 산다는 게 뭘까? 아빠 생각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보는 삶’이다. 사람들은 지난 올바름은 알아보지만 지금 올바른 건 잘 알아보지 못한다. 그래서 가장 올바른 삶은 언제나 가장 외롭다. 그 외로움만이 세상을 조금씩 낫게 만든다. 어느 시대나 어느 곳에서나 늘 그렇다.

예수님은 가장 외롭게 죽어갔다. 아무도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을 죽인 힘세고 욕심 많은 사람들뿐 아니라 따르고 존경한다는 사람들에서 오히려 더 많았다. 그 후 2천년 동안도 그랬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넘쳐나지만 예수님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여전히 드물다. 예수님은 ‘2천년의 외로움’이다.

단이는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많으니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아빠보다 더 많을 거다. 하지만 단이의 거짓 없는 성품과 행동이 단이를 외롭게 만들지도 모르겠다. 아빠는 단이가 외롭길 바라지 않지만 단이가 올바르게 산다면 단이는 어쩔 수 없이 외로울 거다. 단이가 외로울 거라 생각하면 아빠는 마음이 아프다. 외로움은 어디에서 오든 고통스럽기 때문이야. 단이가 외롭고 고통스러울 때 이 편지를 기억하면 좋겠다.

아빠는 아빠 책 머리말에 이렇게 적었었다. “그러나 내 딸 김단이 제 아비가 쓴 글을 읽고 토론을 요구해올 순간을 기다리는 일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가.” 아빠는 정말 그 순간을 기다린다. 지금은 아니지만 머지않아 단이도 술을 좋아하게 될 거다. 내 딸아, 너의 외로움을 사랑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