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겨레)

당파싸움이 조선 망국의 주요 요인이었다는 오랜 통설은 식민사관에 찌든 사실오인의 전형일 수 있다는 주장들이 힘을 얻고 있다. 개중에는 당파싸움을 정책 중심의 정파들간 정권경쟁 차원으로 파악함으로써 근대 서구 정당제도 발전에 비견될 만한 선구적 정치행태로 보는 시각도 있다. 세계사적으로 예가 드문 조선왕조의 500년 장수를 ‘아시아적 정체’ 따위의 부정적 시각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당파경쟁이 알려진 것만큼 저급하진 않았으며, 그것이야말로 장수의 비결이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일제가 한국사를 조직적으로 깎아내렸고 그 영향이 지금까지도 짙게 이어지고 있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조선조 최대 재난이었던 임진왜란 당시 선조와 권신들의 과도한 붕당적 처신들은 그런 수정주의적 시각에 일말의 회의를 품게 한다. 전란이 한창이던 선조 29년(1596) 이몽학의 난이 일어났다. 조사과정에서 가담자들이 의병장들 이름을 발설했다. 항전의 영웅 김덕령도 연루됐다. 전란 발발 이듬해부터 7년에 걸쳐 영의정과 도체찰사를 겸직한 남인의 거두 서애 유성룡은 졸지에 서울로 압송된 김덕령의 치죄를 신중히 따져가며 하도록 간했으나 서인 거두 판중추부사 윤두수 등은 신속한 처리를 주장했다.

한국사 관련 저술로서는 드물게 숱한 베스트셀러를 내며 역사 대중화를 선도하고 있는 이덕일의 <유성룡>(역사의아침)은 그때 선조의 처신을 이렇게 전한다.

“그러나 선조가 알고 싶은 것은 김덕령의 유·무죄 여부가 아니었다. 그는 백성들의 신망을 얻은 전쟁영웅들을 질시했다. 그는 이런 전쟁영웅들이 올무에 걸리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올무에 걸리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김덕령은 ‘수백번의 형장신문으로 마침내 정강이뼈가 모두 부러졌다’고 <선조수정실록>이 전한 것처럼 숱한 형장을 받았다. 그는 ‘다만 신이 모집한 용사 최담령 등이 죄없이 옥에 갇혀 있으니 원컨대 죽이지 말고 쓰도록 하소서’라고 주청했으나 그 자신은 물론 그의 별장 최담령도 고문을 받다가 죽고 말았다. 민심은 극도로 분개했다.”
 
이순신 천거하고 죽음앞 목숨 구해

전란 중 당파싸움의 절정은 ‘이순신 죽이기’였다. 파죽지세의 왜군을 연전연파한 이순신을 두고 서인 해평부원군 윤근수가 아뢰었다. “임진년에 수전한 장수들 중에서 공이 있는 자는 손꼽아 셀 수 있는데, 그 가운데서 원균이 가장 우직하여 제 몸을 잊고 용맹을 떨치며 죽음을 피하지 않아 공적이 매우 뚜렷합니다.” 원균의 공을 빼앗은 이순신을 죽여라는 얘기다. 선조는 원균을 통제사 자리에 앉히고 의금부 도사한테 이순신을 잡아올리도록 지시했으며, 서인 쪽 성균관 사성 남이신에겐 현지조사를 해 보고토록 했다. “남이신이 전라도에 들어가니 군사와 백성들이 길을 막고 이순신의 원통함을 호소하는 사람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나 남이신은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고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이 섬에 7일간이나 머물러 있었으나 우리 군사가 만약 출전했으면 그를 잡아올 수 있었을 텐데, 이순신이 머뭇거리는 바람에 그만 기회를 놓쳐버렸습니다’하고 보고했다.”

가토를 죽이지 못했다는 이유로 고문당해 죽음 직전까지 갔던 이순신을 살려낸 건 애초 그를 발탁 천거했던 유성룡이었다. 바로 뒤 200척에 이르던 원균의 조선수군은 칠천량에서 전멸했다. 다급해진 선조는 죽이려던 이순신을 복직시켰지만 재기불능이라 본 조선수군을 없애버리라고 했다. “신에겐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라는 이순신의 다급한 장계가 올라간 건 그때였으며, 그의 기적같은 명량해전 승리가 정유재란의 물줄기를 바꿨다. 하지만 나중의 논공행상 때까지도 선조는 이순신을 원망하고 원균을 충신이라 치켜세우면서 신하들 의견을 깔아뭉개며 원균을 1등공신에 책봉했다. “선조가 이순신을 증오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은 백성들의 조롱을 받는데 이순신은 백성들의 추앙을 받은 것이다.” 저자의 이런 시각은 <유성룡> 전편을 줄기차게 관통하고 있다.

선조가 쳐 놓은 올무에 걸려든 또 한 사람의 최대급 희생자는 바로 유성룡이었다. 이순신이란 영웅을 등장시킨 장본인이라는 점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 7년 전란에서 나라를 구한 최고수훈자 유성룡은 바로 그 때문에 전쟁이 승리로 끝나는 순간 제거대상이 됐다. 유성룡은 개전 초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개성으로 평양으로 의주로 야반도주하듯 피난갈 때부터 무책임한 선조를 나무랐고, 광해군 세자책봉 등을 주장함으로써 선조 눈밖에 나기 시작했다. 대신할 인재를 구할 수 없는 유능함 덕에 전란기간에 살아남은 그는 또 속오군을 창설해 양반도 군역에서 빠져나갈 수 없게 했고, 대동법의 전신이라 할 작미법으로 조세제도를 혁신했으며, 노비 등 천출들을 과감하게 기용했다. 이순신 등용과 더불어 승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이런 혁신조처들은 전란수습과 조선조 재건의 토대가 됐으나 선조에겐 오히려 유성룡을 질시하고 제거해야 할 재료가 됐을 뿐이다.
 
태조 이성계가 고려 말의 권신 이인임의 아들이라 기록한 명나라의 <대명회전> 내용을 고쳐달라는 요청이 ‘종계변무’인데, 유성룡 반대파들은 혼란스런 전란 중에 몸을 뺄 수 없었던 유성룡을 두고 황당하게도 종계변무를 위한 중국행을 기피하는 등 불충을 저질렀다며 그를 탄핵했고 그것은 선조가 기다리던 바였다. 이 말 안되는 탄핵사유에도 그를 옹호하는 사대부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절대자 왕의 뜻이기도 했으려니와, 그것보다는 속오군, 작미법, 신분타파 등의 혁신조처들이 바로 그들 자신의 존립기반을 허무는 ‘독약’임을 본능적으로 간파한 양반 기득권세력의 담합·작당 쪽에 더 혐의를 둬야 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공교롭게도 그가 파직당한 선조 31년(1598) 11월19일, 바로 그날 이순신은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을 대승으로 이끌고 최후를 맞았다. 그 전에 이미 유성룡이 실각으로 내몰리던 상황에서 이순신은 그것이 곧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걸로 받아들였고 전장에서 죽기로 결심했다.

어떻게 보면 <유성룡>의 주인공은 유성룡이 아니라 그 자신이 ‘전쟁수행에 최대 걸림돌’이었던 선조다. 유성룡이라는 재상의 일생을 매개로, 난해한 심리구조를 지닌 한 조선왕의 유별난 처신과 비극적이었던 그의 시대를 다시 읽는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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