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네이버 지식인, 일부 편집함)

[ 박인로 ] : 본관 밀양. 자 덕옹. 호 노계. 영천(永川) 출생.

어려서부터 시재에 뛰어났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장 정세아의 막하에서 별시위가 되어 무공을 세우고, 수군절도사 성윤문의 발탁으로 종군. 이듬해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선전관을 지내고 이어 조라포수군만호로 군비를 증강하는 한편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다. 퇴관 후 고향에 은거하며 독서와 시짓기 전념하여 많은 걸작을 남기고, 1630년(인조 8) 노령으로 용양위 부호군이 되었다.

정철을 계승하여 독특한 시풍을 이룩하고 가사문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작품에 《태평사(太平詞)》 《사제곡(莎堤曲)》 《누항사(陋巷詞)》 등이 있다.

[ 이항복 ] : 본관 경주. 자 자상. 호 백사.

권율의 사위이다. 어렸을 때, 훗날 함께 재상이 된 이덕형과 돈독한 우정을 유지하여 오성과 한음의 일화가 오랫동안 전해오게 되었다.

1580년(선조 13)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581년 검열이 되었으며, 1583년 사가독서를 하였다. 이후 저작·박사·정언·수찬 등 언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1589년 예조정랑으로 정여립의 옥사를 다스리는데 참여했다. 1590년 정여립의 옥사를 무난히 수습한 공으로 평난공신 3등에 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따라 의주로 갔으며, 이후 병조판서가 되어 명나라 군대의 파견을 요청하는 한편 국왕의 근위병을 모집하는 데 주력하였다. 1595년 이조판서에 올랐으며, 1598년 좌의정으로 진주사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1599년 좌의정을 거쳐 이듬해에 영의정이 되었으며, 1602년 오성부원군에 진봉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도 정승의 자리에 있었으나, 대북파들과는 정치적 입장이 달랐으며 1617년 이이첨 등이 주도한 폐모론에 적극 반대하다가 1618년 삭탈관직되었다. 이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고향인 포천의 화산서원(花山書院)과 북청의 노덕서원(老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백사집》 《북천일록(北遷日錄)》 《사례훈몽(四禮訓蒙)》 등이 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선조조상신(宣祖朝相臣)〉조에 행적이 소개되어 있다.

[ 이덕형 ] : 본관 한산. 자 원백. 호 죽천.

1596년(선조 29)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검열·봉교 등을 역임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때 인목대비에게 반정을 보고하고 능양군에게 어보를 내리게 하였으며 1624년(인조 2) 주문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형조판서·의금부판사·돈령부지사를 거쳐 우찬성이 되었다.

저서에 《죽창한화(竹窓閑話)》 《송도기이(松都記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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