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제목은 「관료 장관과 정치인 장관」입니다. '행세와 구체적 실천' 이라는 제목은 제가 따로 뽑은 것이구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서 최장집 교수의 주장과 같은 맥락이지만, 일간지 칼럼이라 더 살가운 느낌입니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직업적인 활동가로 규정했을 때, 늘 제 마음 한 구석을 불편하게 했던 그 느낌을 말이죠. 이 글을 늘 거울 삼아 살아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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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관료 장관과 정치인 장관
 
지난주 다시 장관 몇 사람이 바뀌었다. 몇몇 언론이 개각의 필요성과 타당성을 두고 의문을 제기했지만 이목을 끌진 못했다. 이로써 2003년 봄 참여정부 출범 당시 19개 행정부처 장관 중 넷이었던 관료 출신은 정권 마지막 해 열 사람까지 늘어났다. 단정할 자신은 없으나, 현직 장관 열 사람 중 5년 전 노무현 후보를 찍었던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 해도 그것이 장관직의 결격 사유가 될 수는 없다. 또 관료집단을 개혁의 ‘주체’인가, 아니면 개혁의 ‘대상’인가 따위의 흑백논리로 단순하게 재단하는 것도 부질없는 일이다.

하지만 의문은 생긴다. 참여정부뿐만 아니라, 민주화 이후 역대 민간정부가 초기에 한결같이 경계하고 배제하고 싶어했던 관료집단이, 나중에 보면 다시 국정운영의 중심으로 약진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떠들썩한 선거 절차를 거쳐 대통령이 바뀌고 새로운 집권세력이 기세등등하게 정권을 접수하고, 이념적 색채나 노선도 다른 것 같은데, 막상 장관들을 보면 앞선 정부에서 고위직으로 활약했던 그 얼굴 그대로인 연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현상이 바람직한 것일까, 민주주의에 부합하는 것일까?

이는 민주화 이후 2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진정한 의미의 집권이 뿌리내리지 못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대통령제든 의원내각제든 다른 민주국가에서의 집권은, 군림하거나 통치하는 ‘행세’가 아니라, 행정부를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담당하는 구체적 실천으로 나타난다. 선거 과정에서 약속한 정치적 이념과 지향을 구체적 정책에 반영하기 위하여 집권세력은 행정 현장으로 뛰어든다. 그들의 집권은, 외곽에서 추상적 거대담론으로 행정부처를 원격 조정하는 게 아니라, 행정부처 수뇌부에 직접 소매 걷고 들어가 직업관료들과 함께 미시적 사항을 일일이 챙기면서, 공부하고 부딪치고 싸우고, 이해관계자를 설득하는 정치적 실천인 것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 정치인들은 이런 의미의 집권을 ‘거북’해 하는 것 같다. 역대 민간정부 집권세력들에게 통치하고픈 의욕과 열정은 있었을지 모르나, 통치에 필요한 능력과 경험과 자세는 없었다. 그들은 대부분 대통령 부근이나 국회에 머물며 행정 관료들의 보고를 듣고 훈계하고 지시하는 것을 선호했지, 근무강도가 엄청나고 책임질 일이 많은 행정부 그 자체의 일원이 되겠다는 노력이나 의지는 없었다. 간혹 장관으로 기용된 사람들도, 그것을 경력과 경험관리 차원의 ‘외도’로 받아들였고, 계기만 생기면 장관직에서 벗어나 먼저의 지위로 돌아가기에 바빴다. 행정부 일에 관심은 많으나 직접 빠져들어 자신이나 위험부담 의지는 없고, 그렇다고 전적으로 행정 관료에게만 맡길 수도 없었던 집권세력은, 결국 청와대 기구를 늘리고 각종 위원회와 기획단을 만드는 것을 돌파구로 삼았고, 거기에서 만든 수많은 ‘로드맵’을 행정부에 던졌다.

야당 역시 집권세력의 행정부 진출을 집요하게 방해했다. 참여정부에서의 ‘코드 인사’ 시비가 전형적인 보기다. 그들은 대통령과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정치권 인사의 행정부 진출을 배제함으로써 대통령의 통치력을 약화시킬 수 있었을지는 모르나, 그만큼 대통령의 인사권을 축소함으로써 앞으로 자신들에게도 부담이 될 나쁜 관행을 만들었다.

차기 대통령은 ‘정말로 집권’하기 위해 정치인을 장관으로 임명하면 좋겠다. 다만, 그들은 피나는 노력을 통하여 관료집단을 실력과 인격으로 장악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정치인들로 행정과 정치가 일체가 된 집권구조를 만드는 일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중요한 과제다.

이윤재 코레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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