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겨레)

안과 밖 / 한-미FTA 이후의 한국영화

이제부터 한국 영화를 극장에서 보려는 당신은 누구보다 부지런해져야 한다. 개봉 당일 보거나 최소한 1주일 내로 극장으로 얼른 튀어가야 한다. 그 영화가 가뭄에 콩 나듯 나오는 5백만, 천만짜리 대박 영화가 아니라면 말이다. 게으름을 피우다간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하루에 기껏 한두 번 상영하는 극장 시간표 앞에서 망연자실하거나 이미 상영이 끝난 걸 뒤늦게 발견하며 엉뚱한 영화를 울며 겨자먹기로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 이제 당신은 선택권이 없다. 극장이 당신을 선택하는 것이다. 감독도 배우도 영화사도 당신을 도와줄 수 없다. 오로지 극장만이 힘을 쥐고 있다. 손님은 더 이상 왕이 아니다. 메뉴판에서 먹고 싶은 걸 고를 수도 없고, 그저 주는 데로 먹어야 하는 것이다. 한강에서 독극물을 먹고 자란 괴물처럼 스크린 쿼터라는 고삐가 풀린 극장은 어느새 무시무시한 불가사리가 되어 그렇게 미쳐 날뛰는 것이다. 그 괴물은 오로지 돈밖에 모른다. 돈 되는 영화만 먹어제끼며 나날이 몸집을 불려만 간다. 개봉 첫 주 1등을 차지하지 못한 한국 영화는 이제 며칠 후, 아침에 한번 저녁에 한번 교차 상영을 하게 될 것이고, 줄줄이 늘어선 크고 작은 수많은 헐리우드 영화들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영화 좋다는 입소문을 듣고 헐레벌떡 도착했을 땐 대부분 이미 극장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누가 그랬던가, 스크린 쿼터는 문화 주권을 지키는 우리의 자존심이라고. 틀렸다. 자존심…. 그쯤은 먹고 살기 위해 내버릴 수 있다. 문화 주권? 문화가 밥먹여 주나. 금강산도 식후경인데, 배 쫄쫄 굶으며 풍악을 울린들 무슨 소용 있단 말인가. 정정해야 한다. 스크린 쿼터는 문화 주권과 자존심을 지키는 안전장치가 아니다. 스크린 쿼터는 문화 주권이 아닌 문화산업에 대한 보루였다. 산업. 그렇다 산업이다. 돈이 되는, 배를 불릴 수 있는 산업 말이다. (* 앞 단락에서는 돈 밖에 모르는 헐리우드 영화를 비판하는 듯 하시더니, 갑자기 돈이 되는 한국 영화산업을 위해서 스크린쿼터가 필요하다고 솔직담백하게 고백하시니 이거 원..)  미국이 우리의 문화를 뺏기 위해 스크린 쿼터를 축소하려 했나? 천만의 말씀이다. 그들은 우리의 산업을 뺏기 위해 스크린 쿼터를 때린 것이고, 우린 주판알도 제대로 못 튕긴 채 고스란히 내준 것이다.

개봉 첫주 1등 못하면 ‘퇴출’

한국의 영화산업은 미국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작지만 자국 영화 점유율은 그 어느 나라보다 높았다. 홍콩과 대만은 예전에 망했고, 일본도 미국 영화와 맞장 뜰 수 있는 건 애니메이션밖에 없다. 문화 강국이라는 프랑스 또한 자국 영화 점유율이 한국보다 낮았다. 스크린 쿼터와 한국 영화인들의 노력, 그리고 관객들의 관심 덕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만해도 된다고? 자생력이 생겼고, 무엇보다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하니까? 자동차, 컴퓨터, 핸드폰을 더 팔기 위해? 좋다. 근데 왜 영화산업인가? 왜 그것이 먹고 사는 문제와 관계가 없는가? 한국 영화는 외국에 팔린다. 그러면서 돈도 벌지만 자연스럽게 한국을 ‘홍보’한다. 그 자체가 광고인 것이다. 영화 속의 자동차, 핸드폰, 컴퓨터, 그리고 한국의 관광산업…. 이 모든 것이 이른바 ‘한류’라는 문화상품 속에서, 중국에서, 베트남에서, 대만에서, 유럽에서, 남아메리카에서 공짜로 홍보되는 것이다. 물건을 아무리 만들어도 광고가 안 되면 말짱 헛것 아닌가? 그런데 이 공짜 광고가 어찌 산업이 아니고 단순히 문화이며 먹고 살기 위해 버려도 될 ‘자존심’이란 말인가? 그것이 왜 이 나라 국민들의 밥그릇이 아니고 오로지 영화인들만의 밥그릇이란 말인가? 왜 한국의 영화를 살리자는 것이 한국의 물건을 팔자는 것과 다른 말이란 말인가? (* 상당히 씁슬함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국민들의 밥그릇 운운하는 자동차 섬유 산업의 이해관계자와 닮고싶어하는 영화 산업 이해관계자라.)

한미 FTA를 최종 타결하면서 스크린 쿼터를 ‘미래유보’에서 ‘현재유보’로 바꿔주었다. 어떤 경우에도 축소된 73일에서 스크린쿼터를 단 하루도 못 늘리게 만든 어리석은 결정은 역사가 심판해 마땅할 매판적 행위다. 지금 벌써 3월 한국 영화 점유율이 20퍼센트대로 떨어졌다. 작년 이맘때의 70퍼센트대와는 비교할 수도 없다. 풍작이 있으면 흉작이 있는 법, 단 1년만에 바뀐 이 상황을 이제 누가 책임질 것인가. 영화인들이 용기내어 열심히 만들면 된다고? 보라. 지난 주 개봉한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이 1주일 만에 극장에서 교차 상영되는 우울한 풍경을. 1990년대 초 단 하나의 극장에서 1년 내내 상영하며 100만명을 돌파했던 <서편제>의 신화가 불과 1주일 만에 박살나는 그 슬픈 광경을 보란 말이다. 돈 냄새에만 환장한 극장이라는 불가사리가 내팽게치는 한국 영화의 암울한 미래를 좀 보란 말이다.

스크린 쿼터는 유통의 문제였다. 유통업자들이 값싸고 돈 되는 수입품만 유통시키는 걸 막기 위한 규제였다. 수입품에 관세를 때리는 게 아니라 최소한의 국산품을 유통시키자는 공정거래의 문제였던 것이다. (* 공정거래 앞에다가 '국외 영화제작사와 국내 영화제작사 사이의' 라는 수식어를 넣어야 오해의 소지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이제 그 유통의 뚫렸으니 모든 건 유통업자 마음대로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그들의 마음은 곧 돈의 마음이다. 한국 영화의 진짜 적은 이제 미국이 아니라 유통업자인 극장들이 된 것이다. 이 정부가 생산자인 영화인들과 유통업자들, 즉 같은 나라 사람들 간에 싸움을 붙인 것이다.

중간은 없이 대박 아니면 쪽박만

축소된 스크린 쿼터는 이제 73일. 두달하고 열흘 남짓이다. 이건 대박나는 한국 영화 한 두 편이면 모두 메꿔진다. 그 다음은 정말 전쟁이다. 체급도 없고 보호장비도 없다. 자유경쟁? 오케이! 자유경쟁을 정말 시켜 달라. 공정하게 말이다! 손님 적게 든다고 1주일 만에 교차 상영을 하면서 하루에 한두 번, 그것도 가장 손님이 안 드는 첫 타임과 마지막 타임에 상영하는 게 자유경쟁인가? 얼마 전 개봉한 감우성 김수로 주연의 <쏜다>는 헐리우드 영화 <300>과 같은 날 개봉하는 바람에 첫 날부터 교차 상영을 당했다. 이건 너무하지 않는가? 관객들에게 최소한 선택의 기회는 줘야 하지 않는가?

그래서 요즘 한국 영화는 500만 아니면 30만이다. 관객 500만명을 끌어 성공하거나, 아니면 30만명도 못 들어 망하거나. 한국영화 평균제작비를 뽑으려면 130만 쯤 들어야 하니 30만이면 그야말로 쫄딱 망한 것이다. 100만, 200만 짜리 중간 영화가 사라져가고 있다. 1등 영화는 계속 극장에 걸려 500만까지 가지만, 2등 3등 영화는 금새 교차 상영이 되면서 관객수가 확 줄기 때문이다. 망해도 적당히 망해야 하는데 이제 반타작은 커녕 완전히 망하는 영화들이 부지기수다. 모든 산업이 그렇지만 투자자 입장에선 대박보다 중요한 것은 손해를 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영화산업은 로또판이다. 대박 아니면 쪽박...중간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무서워서 누가 투자를 할 것인가. 이건 투자가 아니고 도박판이다. 스크린 쿼터 축소가 영화 산업을 예측 불허의 도박판으로 만든 것이다. 누가 책임질 것인가?

중간이 없는 한국 영화의 양극화는 몇 년 전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복합상영관 체인들이 짧은 시간에 큰 수익을 거둬들이려고 영화를 많은 스크린에 단기간만 걸어두는 방식을 택하다 보니, 첫 주에 관객을 끌지 못하면 입소문을 낼 시간도 못 번 채 2~3주째에 내려지는 것이 암암리에 있어 왔다. 그러나 이제 스크린쿼터 축소로 그것은 당연시되면서 급기야 개봉 첫 주 교차상영이란 지경까지 온 것이다. 이런 마당에 아무리 영화를 잘 만들면 무엇하나? 영화계에 지원할 펀드를 부랴부랴 만들면 뭐하냔 말이다. 마케팅비를 엄청나게 쏟아부어 첫 주에 1등을 하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인 판에.

투자자들은 모험 회피 불보듯

그러다 보면 결국 갈 길은 뻔하다. 성공할 확률이 확실한 영화만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투자자들은 모험을 결코 하려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전처럼 극장에 일정 기간 걸려서 입소문이 나서 잘 될 확률은 이제 없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성공한 영화의 케이스만 따라 비슷한 복제 영화들이 만들어질 것이 당연하고, 한국 영화는 그 나물에 그 밥이 될 것이 뻔하다. 다양성이 없는 문화, 비슷비슷한 메뉴판. 손님들은 머지않아 질릴 것이다. 어느 순간 그들이 바로 옆, 변화무쌍한 온갖 메뉴로 무장한 헐리우드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몰려갈 것임은 안 봐도 훤한 일이다.

정윤철/ 한국 감독 조합 공동대표. <말아톤> 등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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