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가 펴내는 월간지 <함께걸음>)



당신의 스무살은 어땠나요? - 이장혁

1. 나의 스무살

대학 문턱서 보기 좋게 미끄러졌다. 대형 재수학원에 등록했다. 100명 이상 우글거리는 교실. 같은 반 친구가 누군지 알기도 힘들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복잡한 학원행 버스 안에서 그보다 더 복잡한 내 머릿속을 하얗게 비워내고 싶은 욕구가 고개를 들면, 아무데서나 내려 거리를 무작정 걷거나 극장으로 향했다. 같은 영화를 앉은 자리에서 세 번 연달아 본 적도 있다. 장면과 음악을 다 외었다. 

친한 친구 두명 중 하나는 재수를 준비하는 듯하다가 급작스레 유학길에 올랐다. 서운하기도 했고, 부럽기도 했다. 다른 하나는 동네 레스토랑에서 통기타 가수 아르바이트를 했다. 나도 거기서 얼마간 아르바이트를 했다. 물론 웨이터였다. 검은 나비넥타이를 맨. 집에는 독서실에서 공부하는 걸로 돼있었다. 

그리고, 첫사랑. 뜨겁게 달아올랐고, 예기치 못하게 식어버린…. 지금은 미국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다는 얘기를 건너 들었다. 스무살, 하면 정말 많은 것들이 스쳐 지난다. 그것들은, 몇몇 단어의 나열로 그려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듯하다.

2. 스무살

(작사/작곡/노래 이장혁)

내가 알던 형들은 하나둘 날개를 접고
아니라던 곳으로 조금씩 스며들었지
난 아직 고갤 흔들며 형들이 찾으려했던
그 무언가를 찾아 낯선 길로 나섰어
이해할 수 없었던 세상의 수상한 질서
하지만 난 상관없는 듯…

너는 말이 없었고, 나는 취해있었어
우리에겐 그런 게 익숙했던 것처럼
귀찮은 숙제같은 그런 나를 보면서
더 이상 어떤 말도 넌 하기 싫었겠지
내가 말한 모든 건 내 속의 알콜처럼
널 어지럽게 만들고…

밖으로 밖으로 너는 나가버리고 안으로 안으로 나는 혼자 남겨져
밖으로 밖으로 널 잡고 싶었지만 안으로 안으로 나는 취해만 갔어

어둡고 축축한 그 방 그녀는 옷을 벗었고
차가운 달빛 아래 그녀는 하얗게 빛났어
나는 그녀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고
창밖이 밝아 왔을 때 난 모든 걸 알았지
그녀가 예뻤냐고 그녀의 이름이 뭐냐고
가끔 넌 내게 묻지만…

밖으로 밖으로 사람들이 지나고 안으로 안으로 그녀는 잠들어있어
밖으로 밖으로 달아나고 싶었지만 안으로 안으로 우린 벌거벗었어
밖으로 밖으로 눈부신 태양이 뜨고 안으로 안으로 날 비추던 햇살
밖으론 밖으론 난 아무렇지 않은 듯 안으론 안으론 하지만 난 울고 있었어

나는 울고 있었어 나는 울고 있었어 나는 울고 있었어 나는 울고 있었어…

3. 그의 스무살

영등포고 시절 그는 문예부 문을 두드렸다. 시를 참 많이도 읽고 많이도 썼다. 독서토론 땐 형들이 그저 멋져보였다. “난 밖에 나가면 세상의 틀을 거부하고 자유롭게 살거야.” 혁명을 꿈꾸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학교를 졸업하곤 대학으로, 재수학원으로, 직장으로, 세상의 질서 속으로 하나둘 스며들어갔다.

그는 형들의 그런 모습이 못마땅했다. 대입고사를 치르던 날 수험장에 가지 않고 도망쳤다. 졸업 뒤엔 영등포에서 백화점 청소일이며 건물 철거일이며 닥치는 대로 했다. 돈이 좀 모이면 음악 CD를 사서 헤드폰 끼고 거리를 돌아다녔다. 배고프면 햄버거 하나 사먹고, 지하철 타고 돌고 돌고 또 돌고…. 둥지 없는 새처럼 떠도는 삶이 좋았다. 

여자도 만났다. 그 기억을 거르고 걸러 훗날 ‘스무살’이라는 노래에 담았다. 단편영화와도 같은 영상을 떠올리게 만드는 노랫말에 등장하는 여자는 두명. 그는 “말하기 어려운 복잡한 사연이 있다”고만 했다. 그의 표정은 ‘더 이상 묻지 말아줘’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1996년, 고교시절 스쿨밴드를 같이 하던 친구를 수소문해 ‘아무밴드’를 결성했다. 홍대앞 클럽에서 공연하던 이들은 98년 첫 앨범 <이.판.을.사>를 발표했지만, 큰 반향을 일으키진 못했다. 2000년 밴드가 해체되고 나서야 뒤늦게 ‘저주받은 걸작’ 등등의 평가와 함께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미 절판된 이 앨범은 요즘 경매 등을 통해 5만원이 넘는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고 한다. 밴드 해체 뒤 홀로 공연하곤 했던 그는 2004년 솔로 1집 <이장혁 Vol. 1>을 냈다. 멜로디는 더 유려해지고 노랫말은 더 깊어졌다. ‘스무살’은 입소문을 타고 퍼져나갔고, 골수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는 내년에 발표할 2집 앨범을 준비중이다.

4. 우리들의 스무살

“사실 ‘스무살’은 지극히 개인적인 노래에요. 그런데도 많은 이들이 공감한다는 얘기들을 하죠. 처음엔 굉장히 뜻밖이라고 생각했어요. 각자 스무살 기억이 다 다를텐데, 왜 내 얘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건지. 누구는 제 노래를 들으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가 떠오른다고도 하고….”(이하 이장혁)

나도 ‘스무살’을 처음 들었을 때 그의 스무살 위로 나의 스무살이 물흐르듯 자연스레 오버랩됐다. 
“그 시절을 추억하는 방식은 다들 비슷한 것 같아요. 구체적 기억은 다를지언정.” 

그의 노래는 각자의 스무살로 여행을 떠나게 만드는 차표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하필 스무살일까?
“그때를 기점으로 많은 것들이 변하기 시작하잖아요. 당연히 혼란스러울테고. 누구나 거치는 상징적인 시기 같아요.” 

그의 말처럼, 꼭 호적상 스무살이 아니어도 누구에게나 상징적 ‘스무살’은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스무살은 나의 스무살로, 당신의 스무살로, 모두의 스무살로 전이되는 것이리라. 노래의 울림이 더없이 깊은 이유인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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