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겨레)
 
<한국방송>(KBS)이 수선스럽다. 평소라면 꽤 사이가 나쁠 대통령과 뉴라이트 쪽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성토발언과 시청료 거부운동을 쏟아낸다. 대선 마그마가 부글부글 끓어가는 신호탄으로 보인다. 한국방송 쪽 사람들, 무척 속이 탈 것이다. 앞으로 장장 몇 개월이 남았는가. 대선 회오리의 한가운데 서 있는 방송사가 평상심으로 일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시기가 유난히 힘들 한국방송 사람들이 있다. 내 생각에 직접 펀치를 맞는 보도부서나 경영진이 아니다. 가령 본사 신관 5층에 근무하는 기술분야 제작 인프라팀. 전세계적으로 불꽃 튀는 속도전에 돌입한 방송의 디지털 전환작업의 주역들이다. 기자재며 제작 시스템까지 최고급 인력과 돈을 퍼붓듯이 써야만 따라잡을까 말까 한 엄청난 사업이다. 그밖에도 장애인 방송, 국제방송, 문화사업 등 공적기능에 해당되는 영역이 무수히 많다. 주목도가 높을 뿐이지 ‘정치뉴스’는 방송기능의 일부분일 따름이다.

1980년대를 풍미한 일본 <엔에이치케이>(NHK)의 ‘실크로드’나 ‘4대 문명’, 영국 <비비시>(BBC)의 ‘살아있는 지구’ 같은 역작을 우리는 언제나 가져볼 수 있을까.

방송사를 최첨단의 현장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십여년째 여러 방송사를 전전하며 프리랜서로 일해 온 내 경험으로 볼 때 우리나라 방송환경은 그저 중견기업 정도나 될까 싶은 수준으로 보인다. 그나마 여건이 가장 낫다는 ‘공영’ 한국방송의 형편을 해외 경쟁사와 비교하면 답답함을 금할 수 없다. 가령 비비시는 6천만 수신인구를 대상으로 7조3천억원의 예산을 쓴다. 이중 5조6천억원이 수신료 수입이다. 본사 근무자는 2만명에 육박한다. 엔에이치케이의 지난해 예산은 5조4천억원에 1만9천명이 일하는데, 약 5조원이 수신료로 충당된다. 독일과 이탈리아 공영방송의 형편도 크게 다르지 않다. 반면에 ‘공룡’이라는 한국방송의 올해 예산은 1조3천억원에 직원 수가 약 5300명이며 지난해 수신료 수입은 정확히 5246억원으로 집계되어 있다.
한국방송을 일반 기업체로 여긴다면 형편을 살펴줄 이유가 없다. 방송 품질 또한 돈과 사람 수에만 좌우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한 국가의 지적 문화적 산물의 집적지가 더이상 대학에 국한되지 않는 오늘날, 우리도 세계경쟁의 최선두에 서 있을 방송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국가 경쟁력이 곧 콘텐츠 생산능력에 달려 있다고 하는 세상이다.

관건은 막힌 구멍 두 가지를 뚫는 데 있다. 첫째는 추억의 ‘땡전뉴스’에서 탄핵보도의 양에 이르기까지 정파적 이해를 대변한다는 오명을 벗는 일, 그리고 동시에 비현실적인 수신료를 정상화하는 일이다. 현행 월 2500원은 1981년 4월에 책정된 액수다. 장장 26년째 변동없는 이 놀라운 기록은 눈물겨운 서비스 정신이 아니라 여야 간에 서로 주고받아온 정치적 견제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꾀를 부려 야금야금 늘린 것이 광고수입인데, 공영방송 예산의 절반 이상이 기업체에서 조달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때릴 때 때리더라도 키울 건 키워주면서 때려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공영방송’이 우리 자신의 자산이기 때문이다. 시청료 분리징수안이나 폐지론을 내세워 아예 싹을 죽여버리자는 발상은 눈앞의 정파적 이해에만 사로잡힌 단견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공영방송이 ‘정권의 나팔수 방송’이 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미디어 월드컵에서 2류, 3류 방송은 더더욱 원치 않는다. 허물 많은 한국방송을 매우 쳐라. 단, 수신료는 당장 현실화하고서.

김갑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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